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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Sep 23. 2015

베르나도트 : 프랑스에서의 삶(6)

1797년 

유명한 보나파르트 장군이 지휘하는 이탈리아군(이탈리아에 있던 프랑스 군의 명칭, 이땐 이탈리아라는 나라는 없었드랬죠.)은 엄청난 승리를 이루고 있었다. 당시 한 장군은 "장교라면 누구나 보나파르트 장군 휘하에서 싸우고 싶을 것이다."라고 할 정도였다. 탁월한 전략과 사람이나 상황에 대해 핵심을 바로 파악하는 보나파르트 장군의 능력은 군대를 승리로 이끄는 요인중 하나였다. 

나폴레옹은 정부에 강력히 보충병을 요구했고, 군을 지원하는데 늘 소극적이었던 총재정부였지만, 이탈리아 군의 승리와 부(특히 부에 관심이 많았다)에 지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보충병을 이끌고 가는 장군으로 베르나도트가 지목된다. 이것은 클레베르가 모로에게 추천을 부탁한 것으로, 이런 클레베르의 노력은 베르나도트의 일생을 완전히 바꾸게 했다. 


라인전선에서 약 이만 명의 병사를 데리고 프랑스 전역을 행군해서 이탈리아까지 가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상황이었다. 특히 이 년간이나 집에 가지 못했던 병사들을 이끌고 프랑스 내륙을 관통한다는 것은 병사들에게 탈영하라고 유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베르나도트는 과감한 정책과 엄격한 규율을 유지시켰고 이 때문에 거의 대부분의 병사들이 탈영을 하지 않았다. 또 군대가 민간인에게 "민폐"끼치는 행위에 대해서 엄격하게 통제했기에, 베르나도트의 보충병이 행군한 곳에서는 그와 그의 군대에 대해서 칭송하는 소리가 높았다.

베르나도트는 1월의 한 겨울에 알프스 산맥을 넘어야 했다. 방한복도 제대로 없었던 베르나도트의 군대는 여섯 시간 만에 알프스 산맥을 넘었다. 길잡이가 눈보라 때문에 행군을 잠시 멈춰야 한다고 했지만, 장교들은 북을 치게 했고, 마치 전투에 진격하는 것처럼 병사들을 독려해서 알프스 산맥을 넘었다고 한다. 


베르나도트와 보나파르트 장군은 3월 오스트리아 군의 공습이 시작되기 직전 만난다. 둘의 만남은 흥미로운 것이었는데, 서로에 대한 평가는 당시 둘의 능력차를 확연히 드러내는 것으로 특히 사람을 꿰뚫어보는 나폴레옹의 통찰력이 돋보이는 부분이었다.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을 처음 만난 후,  스물대여섯 살의 외모에 오십 대의 풍모를 느꼈으며, 공화국에 그다지 좋은 징조는 아닌듯했다라고 이야기한다. 여기서 베르나도트가 느낀 것은 총사령관이 자신보다 어리지만-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보다 여섯 살 어리다- 그에 걸맞은 위엄을 느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베르나도트 역시 나폴레옹이 자신이 만났던  다른 장군들 -공화국에 충성하는 장군들이었던 주르당이나 클레베르 마르소 같은 인물들-과는 좀 다른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하지만 베르나도트는 그것보다는 자신보다 어리지만 뛰어난 지략과 통찰력을 가지고 있고 지위도 더 높았으며 교육마저 더 많이 받았던 이 총사령관에 대해서 무엇인가 질투 어린 심정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심정은 이때는 확연히 드러나지 않지만, 후일 베르나도트가 완전히 나폴레옹의 사람이 될 수 없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베르나도트는 자신보다 모든 면에서 뛰어난 이 총사령관을 만나면서, 이 총사령관처럼 되려 노력했고, 그 결과는 그가 왕위 계승자가 되었을 때 확연히 드러난다. 


나폴레옹이 베르나도트를 만났을 때 그는 베르나도트에 대해서 세 가지 언급을 했다. 첫 번째는 외모에 신경 쓰는 모습을 약간 비웃은 것이었는데, 이것은 나폴레옹 자신의 개인  의견이라기보다는 나폴레옹 휘하 참모들이 새로 온 보충병과 그 군대의 장군에게 느끼는 감정이 드러난 것이었다. 나머지 두 가지 언급은 베르나도트의 본질에 대해서 언급한 것이었다.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에 대해서 "프랑스인의 머리에 로마인의 가슴을 가졌다."라고 했고 "기사도 정신을 가진 공화주의자"라고 언급했다. 이런 의견은 베르나도트의 복잡한 성격을 딱 꼬집어 말한 것이었다.

베르나도트의 연설 능력은 탁월했는데 그는 연설은 당면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병사들의 마음을 사로 잡는 것이었다. 많은 경우에서 베르나도트는 연설을 통해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자신의 목적을 이루게 했으며, 만약 연설이 통하지 않을 경우에는 극적인 행동을 통해서 병사들의 마음을 되돌리고는 했다. 이를테면 그가 대령이었을 때 한 전투에서 부대원들이 전투 중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때 베르나도트는 말로써 병사들을 재 집결하는데 실패했는데, 그러자 그는 자신의 대령 견장을 떼어서 땅에 내동댕이 치고는 "이렇게 불명예스럽게 행동한다면 나는 그대들의 대령이길 거부하겠소"라고 했다. 이에 병사들은 그의 견장을 주워주고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고 한다. 또 베르나도트는 가스코뉴 출신답게 격렬한 성격과 과장되지만 사람을 매혹시키는 언행을 가지고 있었다. 

또 베르나도트는 구체제에서는 평생 장교가 될 수 없는 신세였지만, 공화국은 그에게 장군이 되게 해주었고, 엄청난 명예를 가져다 주었다. 당시 이런 공화국에 그는 절대적으로 충성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장군으로써 그의 행동은 "귀족적"이라고 여겨지던 기사도를 실천하려고 했다. 대표적인 예가 약탈을 금지하는 것이었는데, 그는 절대 개인재산을 착복하기 위해서 점령지의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빼앗지 않았다. 게다가 몇몇 상황에서는 명예 때문에 매우 고지식하게 행동하기도 했고, 다른 이와 불화를 겪기도 했다.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가 편하게 자기편이 되지 않을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는 베르나도트에 대해서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사용해야만 했다. 


나폴레옹과 베르나도트


나폴레옹과 베르나도트가 만난 직후, 오스트리아 군이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3월에 시작된 이 침공은 나폴레옹의 탁월한 전략 때문에 전투도 얼마 하지 않고 3월 안에 전투가 끝나버린다. 나폴레옹의 작전은 아주 단순했다. 오스트리아군이 오기 전에 미리 선수를 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탈리아 전역에 퍼져있던 나폴레옹의 군대가 효과적으로 선수를 치기 위해서는 매우 빨리 진격해야만 했기에 큰 어려움이 따랐고 특히나 몇 개의 강을 건너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베르나도트와 그의 보충병은 나폴레옹 휘하 우익에 배치되었다.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를 선봉으로 삼았고, 자신은 세뤼리에 장군과 함께 이동했다. 이 짧은 전투기 간 중 베르나도트는 총사령관인 나폴레옹 다음으로 큰 명성을 얻게 된다.   

나폴레옹의 군대는 이탈리아로 온 오스트리아 군을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알프스를 넘어 오스트리아까지 진격했다. 나폴레옹의 군대는 빈을 향해 진격했고, 결국 오스트리아와 나폴레옹 사이에는 잠깐의 평화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1797년 3월의 전투



베르나도트의 보충병과 이탈리아에 주둔했던 나폴레옹의 선임 병들 사이에는 상당한 알력이 존재했다. 이탈리아군은 주로 프랑스 남부 출신의 의용병들로 구성되어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공화국의 병사인 것과 보나파르트 장군 휘하에 있다는 것에 매우 큰 자부심을 느꼈다. 그들은 이런 자부심으로 스스로를 "시민"이라고 불렀고 서로에 대해서도 그런 호칭을 사용했다. 하지만 그들은 매우 거칠었으며, 정복지 주민들에 대해서 자주 "민폐"끼치는 행동을 했다. 이탈리아군의 민폐는 사실상 프랑스 정부의 책임이었다. 주 전선인 라인전선마저도 보급이 월활하지 못했기에, 주 전선도 아니었던 이탈리아 전선은 거의 보급이 없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탈리아 군은 결국 스스로 알아서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에 반해 베르나도트의 군대는 기존의 왕립군과 프랑스 북부지역의 자원병들로 주로 구성되어있었다. (베르나도트의 주 부대는 36연대 소속이 많았는데, 이 연대의 전신은 앙주 군이었다.) 이 때문에 이들은 좀 더 엄격한 규율을 유지했다. 특히나 베르나도트는 엄격한 규율을 좋아했고, 이탈리아군에서는 이런 그에 대해서 "미쳤다" 내지 "독재자"라는 표현을 쓸 정도였다. 하지만 베르나도트는 엄격한 규율을 유지하는 대신 그만큼의 병사들에 대한 복지를 무척이나 신경 썼기에, 베르나도트의 병사들은 좀 더 공손하고 정복지 주민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으면서도 무척이나 단정하고 예의 바른 모습을 보여줬다.


이 때문에 이탈리아에서는 기존의 이탈리아군을 군대 스스로가 부르던 호칭인 "시민의 군대"라고 이야기했으며, 상대적으로 베르나도트의 보충병은 "신사의 군대"라고 불렀다.

이 호칭은 이탈리아군이 라인방면에 있던 보충병들에 대한 불만을 잘 나타내는 것이었다. 당시 "신사"라는 의미는 좀 더 귀족적이라는 의미였으며, 결국 귀족적이라는 말은 공화국에 반대한다는 의미로도 해석되었다. 이 때문에 이탈리아군 선임 병들은 보충병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들이 보급에 허덕이면서 "깔끔하지 못한 복장"으로 지내고 있을 때, 라인방면의 부대들은 "깔끔한 복장"을 유지할 정도로 좋은 보급을 받고 있었다는 생각에 불만이 터져나왔을 수도 있다.


어쨌든 이런 알력은 결국 대형사고로 번진다.

평화조약이 체결된 후, 프랑스군이 퇴각하는 중, 마세나의 부대와 베르나도트의 부대가 한 도시에 머물게 되었다. 이때 마세나는 파리로 평화조약문을 가지고 가고 있었고, 베르나도트는 먼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마세나의 부대는 브뤼네 장군이 베르나도트의 부대는 사라쟁 장군이 맡고 있었다. 병사들간의 작은 소란이 결국 결투로 이어졌으며, 마세나 부대의 장교 한 사람이 사망하는 사건으로 번졌다. 그러자 브뤼네와 사라쟁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만났다. 하지만 둘은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자기 주변의 병사들을 끌어모아서 결국 큰 싸움으로 번지게 된다. 결투와 패싸움이 여기저기 일어났고, 오십 명 이상 사망했으며 삼백 명 이상이 다쳤다. 부대 전체가 싸움에 참가하는 것을 막기 위해 북을 쳐야 했으며, 병사들은 대부분 막사에 감금당했고, 일부는 도시 밖으로 쫓겨나기도 했다. 단순히 말싸움으로 시작된 이 사건은 이런 큰 사건으로 번졌는데, 베르나도트의 부대는 이 뿐만 아니라 오주로의 부대와도 같은 이유로 싸움을 했고 역시 사상자가 났다. 


이런 알력은 베르나도트와 나폴레옹 측근 장군들간의 불화로 이어진다. 이때 싸운 부대의 사령관이었던 마세나나 이전에 역시 베르나도트의 보충병에 대해서 빈정댔던 베르티에와 베르나도트는 평생 가까워지지 않았다. 이들과 베르나도트의 불화는 단순히 양자 간의 문제로만 끝나지 않았다. 마세나나 베르티에는 나폴레옹의 최측근이었다. 나폴레옹이 믿고 아끼던 이들과의 불화는 나중에 베르나도트와 나폴레옹의 사이가 벌어졌을 때, 둘의 사이를 더 멀어지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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