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엘아라 Sep 21. 2015

클레베르의 설득

베르나도트 : 프랑스에서의  삶...번외편(4)

1796년 베르나도트는 코블렌츠에 사령부를 두고 겨울 숙영에 들어간다. 그는 이 기간 동안 파리 신문의 악의적인 비방에 시달린다. 베르나도트는 뉘렌부르크를 장악했을 때, 평소 그의 행동과는 달리 이곳 교수들과 대학 당국에 장교들을 수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주르당은 대학 당국에 군인을 수용하기 위해 집을 징발하는 것을 면하는 면책장을 주었다. 하지만 주르당의 참모장은 "자원병"의 수용을 면제해주었고, 베르나도트의 장교들은 자신들은 자원병이 아니라 정규군이라고 주장하면서 해당사항이 아니라고 했다. 좁은 지역에 군인들을 다 수용할 수 없어서 골치 아파했던 베르나도트는 거리낌 없이 대학교수들과 대학의 건물들에 군인을 머물도록 조치했다. 이에 뉘른베르크 교수들은 항의를 하러 베르나도트를 방문했다. 교수들의 항의를 받은 베르나도트느 "그대들이 거절하려면 하시오. 하지만 내가 이곳을 불 질러 없앨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오"라고 말했고, 결국 대학은 베르나도트의 장교들에게 숙소를 제공해야만 했다. 


이 이야기는 파리에서 와전되었고, 한 신문에서 베르나도트의 군대가 뉘렌부르크를 약탈했으며, 베르나도트가 이를 방관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에 심각한 모욕을 느낀 베르나도트는 정부에 진상을 알려달라고 청원을 했다. 하지만 정부는 그의 편지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무시해버렸다. 그리고 베르나도트의 청원이 계속되자, 이런 기사의 빌미를 준 것을 도리어 베르나도트의 잘못이라고 몰아세웠다. 이에 베르나도트는 퇴역을 청원한다. 물론 정부는 베르나도트의 청원을 거절했고, 그를 달래면서 이런 악플 같은 기사는 무시하라고 조언했다.


정부의 이런 조언은 베르나도트의 마음을 바꾸지 못했다. 하지만 베르나도트의 상관이자, 친구이자 형제 같았던 클레베르는 베르나토트를 설득했고 결국 베르나도트는 클레베르의 말을 따른다. 베르나도트의 참모였던 사라쟁 장군은 클레베르가 베르나도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만약 정의를 사랑하고 정직한 그대가 프랑스로 돌아간다면, 친애하는 베르나도트, 내 장담하건대' 클레베르는 말했다. '그대는 석 달을 못 견딜 거요. 정부는 다섯 강도들이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작은 마을을 담당하는 시장까지도 다를 바 없소. 스승으로써 남자로서 (이야기하건대), 비밀경찰들은 -그들은 정치를 위해서 라면 전쟁의 기술이 될 정도로 파고 들것이오.- 악당을 위해 일하고 있고, 이런 악당들은 역겨운 복수심과 덕 있는 이를 파멸시키거나 적어도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주기 위해 자신들의 권력을 이용하고 있소. 정직한 시민으로써 그대의 행동은 헛된 것이 될 것이고, 그들은 그대가 손으로 쓴 글을 위조하고, 그대가 해본 적도 없는 생각을 주고받았다고 주장할 것이오. 그리고 그대의 성공을 늘 시기 질투해왔던 무리들의 배반을 통해서, 그대의 철학적인 좋은 생각과 행동들은 그대가 나라의 반역했다는 증거로 그대를 파멸시키는데 이용될 것이오. 뤼크네르, 퀴스틴,보아르네, 우샤르와 다른 많은 용감한 군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오. 우리 정부 관리들은 변호사들이고 그들은 장군들의 영광을 시기하고 있소. 그들은 천하고, 무식하고 거만하며 복수심에 가득 차 있고 난폭하오. 이런 말들은 오직 악마들에게나 어울리는 말들이오. 그들은 권력을 오래도록 지속할 수 없을 것이오. 늦던지 빠르던지 항상 좋은 것은 사악한 것에 대해 승리하게 마련이오. 그대 친구들이 만개할 행복한 시기를 위해 고통을 참고 기다립시다. 그리고 그대 자신이 이 피에 굶주린 호랑이들의 먹이가 되러 가지 마시오. 이들은 우리의 불행한  나라의 생명들을 사 년간이나 먹이로 삼아왔소.  나는 그대의 전원생활이 몇 달간은 행복할 수도 있을 것이라 이야기했소. 하지만 지금 당장 국민의용군의 드럼 소리를 듣고 그대가 사랑하는 군대가 만들어내는 그대의 심장소리를 기억 해내 보시오. 그대는 진지에서 살고 전장에서 죽을 운명으로 태어났소. 그대는 그대 마을의 자코뱅당원이 떠드는 소리가 전장에서 그대의 책략으로 목숨을 구한 병사들의 환호를 다시 듣고 싶게 만들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소?... 우리는 삼 년간 같은 계급에서 싸워왔소. 나는 그대를 항상 형제처럼 여겼소. 그리고 신실한 친구로서 그대에게 우리와 함께하자고 부탁하오.
 


한편 마르소의 전기 작가는 클레베르의 사령부에서 장군들이 모였던 날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코블렌츠에 있었던 클레베르의 사령부에서 장군들이 모였을 때, 베르나도트는 개인의 명예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군인들의 대부분 업적은 기록되지 않고, 그들이 점령한 지역은 알려지지도 않소. 프랑스에서 많은 군인들이 오해받고 있고, 잘못된 이들에게 공이 돌아가고 있소.'라고 했다. 그러자 클레베르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백 년 동안에, 우리는 우리 조국에서 가장 잘 알려질 것이오. 정의는 우리 편일 것이고 우리가 행동한 것은 정당한 심판을 받을 것이오. 그러고 나서 역사는 현재 이 군대를 이끌고 있는 사람들 편에 설 것이오." 클레베르는 라인강이 바라보이는 창문 쪽으로 갔고, 반대쪽 강둑을 가리키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전우여, 저곳이오, 저곳이 다 되돌아가야 할 곳이오, 저곳이 역사학자들이 우리가 무엇을 했는가에 대해 배우러 갈 곳이오. 그들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소." 


이런 클레베르의 설득으로 베르나도트는 군에 남았다. 이 당시 베르나도트는 권력에 대해서 욕심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장교들과 이야기하면서, 후일 은퇴해서 장군 월급의 반인 연금을 받으면서, 고향인 포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앞선 예에서 보면 이 당시 베르나도트의 소망은 사실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명예가 실추되었다고 생각하자 장군직을 관두려 했다. 그가 명예에 예민한 것은 오래된 것으로, 혁명이 일어나기 훨씬 전 그가 척탄병 시절에 이미 장교와 결투를 할 정도였다. 베르나도트는 민감한 정치 상황을 빠르게 판단하지 못했다. 하지만 클레베르는 당시 민감한 정치 상황에 대해서 잘 판단했으며, 심지어 "동료들이 만개할 시기"라는 언급을 할 정도로 미래를 정확하게 예견했다.


클레베르는 이후 베르나도트를 이탈리아로 보낸다. 그는 베르나도트가 독일 전선에 있는 것보다는 이탈리아 전선으로 가서 당시 "장교라면 누구나 휘하에서 복무하고 싶어 한다"라고 일컬어지던 보나파르트 장군 즉 나폴레옹의 휘하에서 복무하는 편이 더 낫다고 여겼다. 그리고 이런 그의 선택은 어쩌면 멀지만 또 가까운 사이였던 나폴레옹과 베르나도트의 인연의 시작이기도 했다.


장 바티스트 클레베르."군복을 입은 마르스 신"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매거진의 이전글 마르소 장군의 죽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