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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Sep 19. 2015

마르소 장군의 죽음

베르나도트 : 프랑스에서의 삶-번외편(3)

1796년 9월 주르당이 사령관으로 있던 상브르와 뫼즈군은 라인전선에서 오스트리아 군에 고전하고 있었다. 이때 마르소는 베르나도트와 함께 군의 우익을 담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르당은 이때 실수를 했다. 마르소와 베르나도트가 함께 간신히 적을 막고 있던 우익에서, 상대적으로 오스트리아 군에 우세했던 좌익으로 베르나도트를 보낸 것이었다. 이 때문에 마르소는 혼자 적을 감당해야 했다. 결국 이 실수는 프랑스 군 전체를 후퇴하게 만든다. 


9월 17일 베르나도트는 다시 마르소를 지원하기 위해 마르소가 있던 림부르크로 갔다. 베르나도트가 도착했을 때 이미 오스트리아의 주력군이 림부르크에 도착해 있었다. 베르나도트는 마르소에게 퇴각할 여유를 주기 위해서 오스트리아 군과 교전을 시도했으며, 베르나도트와 그의 부대는 하루 종일 오스트리아 군과 교전했다. 그리고 이 교전 덕에 마르소는 림부르크 외각지역을 점령해서 퇴각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다. 이후 마르소와 베르나도트는 주력군을 퇴각시키기 위해 오스트리아 군과 끊임없이 교전을 시도하였으며 이틀 동안의 교전으로 프랑스 군은 후퇴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하지만 9월 18일 프랑스 군 우익의 측면이 노출당하기도 했다.

 

9월 19일 마르소와 베르나도트는 함께 퇴각하는 군의 후미를 보호하는 임무를 맡았고, 느리게 퇴각 중이었다. 그들의 부대는 알텐키르헨 외각지역을 점령했으며, 그날 저녁 마르소는 자신의 기병대와 함께 야영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것은 마르소가 자신의 병사들과 한 마지막이었다.

마르소는 장군들과 만나기로 한 알텐키르헨의 다리에서 매복한 티롤 병사의 총에 맞았다. 총알이 그의 팔꿈치를 뚫고 옆구리로 들어갔는데, 피가 멎지 않았으며 호흡이 곤란해졌다. 프랑스 장군들과 병사들은 마르소가 살기 힘들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렸고, 슬픔으로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마르소는 "저는 나라를 위해 죽게 되어서 행복합니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는 죽어가면서 사령관인 주르당에게 자신의 친구와 가족들을 부탁했으며, 곁에 있던 베르나도트에게 자신의 부대를 부탁했다. 마르소는 베르나도트에게 자신의 부대가 지휘관 없이 흩어져서 도망가다가 괴멸될 것을 우려했고, 베르나도트는 마르소에게 그의 부대는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기병 복장의 마르소 장군


프랑스군은 계속 퇴각을 해야 했는데, 마르소의 상처는 너무나 치명적이라 마르소를 데려갈 수 없었다. 결국 프랑스군은 마르소를 알텐키르헨에 두고 가기로 결정했다. 마르소는 이를 이해했고 "가시오... 내가 죽을 때 까지 나를 보지 마시오.."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하지만, 적의 수중에 남는 것은 마르소에게는 매우 큰 고통이었는데 그는 평소에 포로가 되느니 자결하겠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었다. 

의식을 잃어가는 마르소는 알텐키르헨의 행정관 집으로 옮겨졌으며, 주르당은 오스트리아 군 사령관에게 오스트리아 군의 명예에 호소하면서 마르소를 포로 취급하지 말아달라는 편지를 남겼다. 마르소는 의사 한 명과 함께 알텐키르헨에 남겨졌다. 


프랑스군이 떠난 후인 9월 20일 오스트리아군 후사르가 알텐키르헨에 도착했다. 그들은 마르소와 주르당이 남긴 편지를 발견했으며 이를 하디치 장군에게 보고했다. 하디치 장군은 마르소를 찾아왔으며, 총사령관인 카를 대공도 보고받고, 안타까움을 표시했으며 마르소를 위해 의사를 보내줬다.


마르소의 상태를 알게 된 오스트리아 군 장군 대부분이 마르소의 상태에  안타까워했으며, 적진에 남겨지는 것을 택한 그의 용기에 경의를 표했다.   그들 중 가장 슬퍼한 이는 크레이(Kray) 장군이었다. 그는 마르소를 방문했으며 그의 곁에 앉아서 죽어가는 마르소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크레이 장군과 그의 부대는 자주 마르소와 그 부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 때문에 크레이 장군은 전장에서 자주 마르소를 봤었다. 전장에서 서로의 목숨을 노리고 싸우던 이가 침상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크레이 장군에게 큰 슬픔이었던듯하다. 


마르소의 곁에 있던 두 명의 의사들은 아무런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마르소는 호흡이 가빠졌지만 고통 때문에 잠을 잘 수도 없었다. 마르소는 자신의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죽음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1796년 9월 21일 아침 6시에 27살의 프랑스 장군인 마르소는 고통에서 해방된다.


마르소가 죽자 카를대공은 마르소의 시신을 프랑스 군의 사령부가 있던 코블렌츠로 보낸다. 이때 시신을 호위하기 위해서 카를 대공은 자신의 기병대를 함께 보냈다. 오스트리아 기병대의 호위 속에 마르소의 시신이 코블렌츠로 돌아온 것은 프랑스 혁명 전쟁 사상 가장 큰 슬픈 일중 하나였다. 오스트리아 기병대의 장교는 정중하게 마르소의 시신을 인계했으며, 마르소의 장례식이 언제 열리는가에 대해서 물었다. 오스트리아군 역시 마르소를 위한 추모식을 열고 싶어 했다.  


마르소의 죽음, 파리에 있는 개선문에 새겨진 부조



마르소의 시신은 코블렌츠에서 화장되었으며, 그곳에 묻혔다. 그의 묘는 방데내전에서부터 같이 싸웠으며 가장 친한 사이였던 클레베르에 의해  디자인되었다.  이후 마르소의 유해는 1889년 프랑스의 팡테옹으로 이장되었다. 그리고 그 이전 마르소의 전우였던 베르나도트는 코블렌츠에서 총독으로 머물 때 마르소와 가장 친했던 누이를 위해 마르소의 화장한 재를 조금 덜어 집으로 보냈었다. 

마르소의 죽음은 프랑스 혁명 전쟁 중의 안타까운 사건중 하나로 기록된다. 27살이었던 젊고 유능하며 기사도 정신에 충실했던 낭만적인 장군의 죽음은 모두에게 큰 슬픔이었던 것이다. 그의 죽음 이후, 상브르와 뫼즈군은 결속력이 깨진다. 마르소와 늘 함께 전장을 누볐던 클레베르와 클레베르가 가장 아꼈으며 마르소와도 절친했던 베르나도트는 마르소의 죽음이 주르당의 잘못된 전술 때문이라고 여겼다. 이들은 주르당의 휘하에서 복무하길 거부했으며, 주르당을 총사령관으로 인정하지 못했다. 이전까지 클레베르는 주르당 휘하에서 복무하면서 자신의 부대를 "상브르와 뫼즈 가족"이라고 부를 정도였지만 그런 결속력은 이제 찾아볼 수 없게 된다. (클레베르는 삼브레와 뫼즈 군의 부사령관이었다.)  

  

프랑수아 세브앙 마르소-드그라비에 (François Séverin Marceau-Desgraviers)는 법률가의 아들로 태어나서 19살에 입대해서 24살에 장군이 되었으며 27살에 사망했다. 그는 프랑스 공화국을 위해 헌신한 사람으로 기억된다.  


프랑수아 세브앙 마르소-드그라비에, 마르소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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