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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Sep 18. 2015

디닝전투 (1796년 8월 22일)

베르나도트 : 프랑스에서의  삶 ... 번외편(2)


주르당의 세 번의 독일 침공은 늘 같은 루트로 구성되었다. 클레베르크가 먼저 선봉으로 라인강을 건너서 프랑크푸르트 쪽으로 이동하면, 주르당의 주력군이 남하해서 라인강을 건너는 식이었다. 

주르당의 세 번째 독일 침공은 1796년 6월에 시작된다. 이 침공은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1796년 8월 중순 주르당은 알트도르프에서 베르나도트를 남쪽인 라티스본으로 보내고 자신은 헝가리인 나헤강쪽으로 이동한다. 

주르당은 베르나도트의 사단을 남쪽으로 보내면서 척후와 소규모 교전을 통해 상브르와 뫼즈군의 우익을 보호하고, 모로의 라인과 모젤군에 합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이후 이 작전에 대해서 주르당은 크게 비난받게 된다. 약간 후대의 프랑스 장군이자 뛰어난 전쟁저술가였던 조미니 장군은 베르나도트의 이동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지도를 흘끗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고 평했다. 하지만 당시 주르당은 이러한 위험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프랑스 혁명 전쟁기 장군 복장의 주르당


8월 15일경 베르나도트가 자신의 사단 병력을 이끌고 노이마르크트를 거쳐 라티스본(레겐스부르크)으로 향했다. 한편 베르나도트의 사단이 남하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카를 대공은 모로와 대치중이던 군대에서 이만 병의 군사를 이끌고 베르나도트가 진격 중인 곳을 향해 직접 이동했다. 카를 대공의 판단은 정확했는데, 베르나도트의 사단을 차단해서 모로와 주르당 사이를 끊어놓는다면 주르당은 고립되어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베르나도트는 디닝 마을에 도착했으며, 8월 20일 여기서 라티스본을 공격했다. 베르나도트는 여기서 카를대공의 병력과 만났는데 자신의 병력이 오스트리아 군의 1/3밖에 안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그와 그의 부대는 용감히 싸웠고, 심지어 카를대공의 본대와 선봉대 사이를 끊어 선봉대를 고립시키기까지 했다.  이런 고무적인 일에도 병력 차이는 엄청났으며 (오스트리아 기록에는 9000명대 28000명이라고 되어있고, 베르나도트의 참모장의 기록에는 10000명대 25000명이라고 기록되어있다. 또 다른 기록에는 베르나도트의 병력은 보병 6000명과 기병 1200명이었던 반면, 카를대공의 병력은 24개 보병대대와 50개의 기병대대로 구성되어있었다고 한다.) 베르나도트는 지원병이 필요했다. 


베르나도트는 8월 20일 자신의 사령관인 주르당과 라인과 모젤군의 사령관인 모로에게 각각 구원병을 요청하는 편지를 쓴다.  하지만 어느 쪽도 베르나도트에게 구원병을 보낼 수 없었다. 주르당은 다음날 보내는 명령서에서 군의 우익 측면이 적에게 노출되는 것을 우려해서 "가능한 천천히 퇴각하라"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때문에 베르나도트는 고립된 상황에서 최대한 시간을 벌면서 퇴각해야 하는 어려운 임무를 맡게 되었다. 



8월 21일 카를 대공의 선봉대가 베르나도트의 전초기지에 있는 병사들과 교전을 벌였다. 베르나도트는 즉시 군을 디닝의 뒤편 언덕으로 옮겼다. 조미니는 이 위치가 좋은 위치라고 이야기하지만, 오스테리아 군의 병력이 너무나 많았기에 버티는 것을 무리였을 것이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8월 22일 카를 대공은 이 마을에서 프랑스군을 공격했다. 이날 하루 종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이 전투가 바로 디닝전투였다. 이날에 대해 당시 베르나도트의 참모장이었던 사라쟁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22일 대공은 프랑스 군을 공격했다. 이 전투는 피비린내 나는 치열한 전투로, 하루 종일 여기 저기서 지속되었다. 디닝마을은 수차례 뺏고 뺏겼으며, 거리는 죽은 병사들의 시신으로 들어찼다. 저녁 때가 되자, 마을에는 불이 났는데, 적이 집에 숨은 병사들을 몰아내기 위해 불을 지른 것이었다. 이러는 동안 대공은 그의 우익에 베르나도트의 좌익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위치에 있던 제 88 전열 연대는 퇴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베르나도트의 진지는 매우 위험해졌는데, 오스트리아 군이 프랑스군이 퇴각할 수 있는 유일한 도로였던 노이마르크트의 주도로를 장악하고 전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좌익이 잃은 곳을 되찾을 수 있다는 확신을 한 베르나도트는, 37 전열 연대의 척탄병 대대와  7 용기병대가 적과 맞서고 있던 곳을 향해 갔다. 이들은 약 사천 명으로 구성되어있었다. '나의 친구들이여, 여러분도 알다시피' 장군은 병사들을 향해 말했다. ' 내가 그대들을 위해 얼마나 잘 해줬는지 알 것이다. 나는 그대들과 같이 용감한 전우들을 지휘한다는 것이 행복했기 때문이다. 이제 이에 대한 감사와 우리 나라에 대한 충성과 영광스럽게 여러분 자신들을 보호하는 것을 보여줄 때가 왔다!"
비록 병사들은 새벽부터 전투를 치렀으며, 그땐 이미 밤이었지만, 이 몇 마디 단어는 병사들을 계속 싸우게 만들었고, 그날의 비참함을 잊게 만들었다. 병사들은 모두들 열성적으로 함성을 질렀고,  그들이 자신의 장군을 따라 지옥 끝까지라도 갈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런 다음, 베르나도트는 공격명령을 내렸고, 세배가 넘는 병력이 있는 오스트리아군 중앙에 가장 가까운 열에서 돌진했다. 이런 대담한 공격으로 적은 당황했고, 약한 저항 후에 전선에서 무질서하게 퇴각했다


하지만 이런 승리는 잠시였고, 베르나도트는 노이마르크트 쪽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퇴각 중 베르나도트 부대의 군율이 얼마나 잘 잡혀있나를 보여주는 사건이 일어났다. 자정 무렵 퇴각하던 부대의 가운데 부분에서 화약통에 불이 났으며, 이것은 다른 화약통들로 옮겨 붙어서 대포쏘는 소리처럼 들렸다. 앞쪽과 뒤쪽 부대원들은 가운데 부분이 기습당했다고 여겼고, 전투열을 짜서 적을 향해 돌격할 준비를 했다. 하루 종일 전투를 벌였고, 한밤중에 퇴각 중인 낙담한 병사들이 적의 기습공격이라 판단되자 다시 전투열을 짜는 모습에 베르나도트는 자신의 부대원들에게 이 순간이 생애 제일 기쁜 날이라고 말했다.

 

10월 23일 오스트리아군은 노이마르크트 평원까지 추격해왔다.(노이마르크트 전투) 카를 대공은 자신의 모든 기병대를 추격에 동원했고, 막강한 화력의 포병대를 함께 보냈다. 이날 포전이 얼마나 치열했는가에 대해서는 프랑스 우익에 있던 한 대위는 멀리서 들리는 포격이 밤새도록 지속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베르나도트는 포격이 끝난 직후, 카를대공이 총 공격을 명하리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카를 대공은 잠시 지체했고, 이것은 베르나도트를 구하는 기회가 된다.  베르나도트는 자신의 주특기인 "허세부리기"책략을 이용했다. 대담하게 전선에서 버티는 병력을 보고 오스트리아군은 잠시 프랑스 주력군이 그곳에 있지 않을까라는 의심을 했고 이 때문에 카를 대공은 베르나도트의 적은 병력이 아니라 프랑스 주력군과 전투를 하기 위해 준비하느라 지체했던 것이었다. 이렇게 오스트리아군이 잠시 지체하는 동안 베르나도트는 뉘른베르크로 향하는 도로를 오스트리아군이 장악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뉘른베르크로 퇴각하려던 생각을 바꾸어서 동편인 라우프로 퇴각했으며, 페그니츠강을 건너편에 부대를 머물게 했고 자신의 위치를 뉘른베르크에 있는 부대에게 간신히 알릴 수 있었다. 

카를 대공, 테센 공작

 

카를대공은 퇴각 중인 베르나도트를 추격하기 위해 호츠장군을 보냈다. 그리고 그 자신과 주력군은 주르당의 본진과 전투를 한다. (10월 24일, 암부르크전투) 베르나도트는 추격하는 호츠장군과 교전하면서 계속 후퇴했고, 포르흐하임까지 간다. 이때 뉘른베르크와 포르흐하임간 도로 역시 오스트리아 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에 베르나도트는 그들을 공격해서 빈센트 강어귀에 오스트리아 군을 묶어두었고, 이때를 이용해 샹피오네와 그르니에 장군이 포르흐하임으로 왔다.

베르나도트는 10월 27일이 되어서야 겨우 포르흐하임 평원에 있던 주르당의 본진과 합류하게 되었다. 그의 부대는 끊임없이 전투를 치르면서 퇴각했기에 기진맥진한 상태였고, 베르나도트 역시 그랬다. 게다가 그는 이마에 부상까지 입고 있었다. 

하지만 주르당의 본진 역시 위험했으며, 베르나도트의 그의 고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장 바티스트 베르나도트, 프랑스 장군

그림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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