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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Sep 16. 2015

베르나도트 : 프랑스에서의 삶(5)

1794-1796

상브르와 뫼즈군의 장군이 된 베르나도트는 1794년 벨기에를 점령하는 상브르와 뫼즈의 영광에 동참한다. 1794년 베르나도트는 여전히 클레베르의 선봉장으로 수많은 전선에서 맨 앞에 섰다. 상브르와 뫼즈군에서 클레베르는 주로 군을 선도하는 역할이었고, 이런 클레베르의 부대중 베르나도트의 사단은 가장 앞에 서는 부대였다. 수많은 전투에서 베르나도트는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며, 병사들의 앞에서 먼저 적진에 뛰어드는 사령관이었다.


 이를테면 프랑스가 대승을 거둔 알덴호벤전투에서 베르나도트의 부대는 클레베르의 선봉으로 가장 먼저 강을 건너 제방의 위치를 장악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때 로르강을 건너기에 만든 다리가 짧았다. 그러자 베르나도트는  "선봉은 제일 용감하다. 다른 이의 모범이 되자"라고 가장 먼저 강으로 뛰어들어서 강을 건넜다. 이에 그의 병사들은 장군의 뒤를 따랐다. 이런 용감한 행동으로 강을 장악했고, 이후 알덴호벤을 공격하는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기에 베르나도트의 부대는 "알덴호벤"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특별한 군기를 수여받았다.


상브르와 뫼즈군은 벨기에를 점령하고 피슈그뤼가 이끄는 모젤군의 네덜란드 점령을 도왔다. 그러고 나서 이제 라인강으로 이동하게 된다. 주르당이 이끄는 삼브레와 뫼즈군은 1795년에서 1796년 사이 세 번의 독일 침공을 벌린다. 하지만 사실상 1795년은 대부분 라인강둑에서 독일을 넘겨다 보고만 있었다.  

주르당,1792년경



플뢰뤼스 전투 후,  로베스피에르와 생 쥐스트 등이 주도하던 공포정치가 붕괴했다. 이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공포정치가 사람들에게 용인될 수 있었던 것은 수도 파리가 외적에 침략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이런 불안감은 사람들을 극도로 긴장하게 했고, 결국 "공화국의 적"에 대해 맹목적으로 변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플뢰뤼스 전투 이후 파리가 함락당할 염려는 사라졌으며, 사람들은 "공화국의 적"에 대해 이제 약간 느긋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가혹하게 "공화국의 적"을 탄압한 공포정치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었다.


공포정치가 막을 내리고 총재정부가 들어서지만, 이것은 독일을 침공하려던 군에는 그다지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비록 생쥐스트 등의 인물들이 "무개념"으로 작전에 관여하고 장군들을 심하게 탄압하긴 했지만, 적어도 군대에 필요한 보급품은 제대로 공급해줬었다. 이것은 내각에 카르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테미도르 반동 이후, 카르노는 그의 명성 때문에 처형당하지는 않았지만 공직에서 물러나야 했고 이후 군의 보급에 그만큼 신경 쓰는 이는 없게 된다. 결국 정부는 아무런 지원도 해주지 않으면서 전공을 세우라고 주르당을 몰아세운다. 주르당은 라인강을 건너기 위한 물자를 스스로 마련했지만, 병사들의 보급 문제는 여전했고 이 때문에 병사들은 폭동을 일으키기 직전에 까지 달한다. 그리고 주르당은 1795년 가을 첫 번째 독일 침공에 들어갔으며 이후 세 번의 공격이 시도된다.


주르당이 수행한 세 번의 독일 침공은 모두 같은 루트로 구성되어있었다. 우익인 클레베르 장군이 먼저 뒤셀도르프에서 라인강을 건너 적들을 몰아내면, 나머지 부대가 남하하다가 노이비트에서 라인강을 건너서 나사우를 향해 가서 란강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인츠 등의 라인강 주변 주요 도시를 점령하면서 독일 쪽으로 전진했다.


주르당의 첫 번째 침공은 마인츠에 이를 때까지는 순조로웠다. 하지만 합동작전을 하기로 했던 피슈그뤼의 모젤군이 주르당이 마인츠에 접근한 뒤에도 오지 않았다. 이 때문에 주르당은 고립되어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베르나도트는 퇴각하는 군의 후미를 사수했다. 베르나도트의 가장 뛰어난 능력을 여기서 발휘된다. 베르나도트는 퇴각하는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고, 쫓아오는 적들을 막아내도록 했다. 그는 뛰어난 선봉장이었던 동시에 퇴각하는 군을 엄호하는데 역시 탁월했다. 프랑스 장군 출신의 전쟁 저술가인 조미니는 이런 베르나도트에 대해 "전장에 있는 것만으로도 적을 몰아낸다"라고 평할 정도였다.


주르당이 첫 번째 공격에서 퇴각했을 때, 파리에서는 다시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다. 바로 총재정부였다. 이때 카르노가 다시 복귀했기에 군에는 어느 정도 희망이 생기리라 여겼다. 하지만 혼란한 정치 상황은 군의 상황을 신경 쓰지 않았고 이 때문에 오스트리아군이 라인강을 건너 프랑스군을 공격할 때까 지도 주르당은 정부의 공격명령을 기다리고만 있어야 했다. 오스트리아 군이 공격을 시작하자, 정부는 주르당에게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동원해서 적을 막으라는 명령을 했다. 하지만 상황은 너무나 힘들었는데, 각각 다른 방면에서 적을 막고 있던 마르소와 베르나도트는 총사령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상황이 계속 이렇게 유지된다면 "죽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거나 "프랑스 장군이 택할 수 있는 최선은 죽음 밖에 없다"라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하지만 마르소의 뛰어난 승리로 프랑스군은 다시 숨통이 튀였고, 본진의 고립을 우려하던 주르당은 오스트리아군의 휴전제의를 받아들였다.


주르당의 두 번째 침공은 육 개월간의 휴전이 끝난 1796년 5월에 재개된다.

같은 경로로 시작한 침공은 클레베르가 라인강을 건넜을 때 막히게 된다. 라인강을 건넌 클레베르를 오스테리아 군이 기다리고 있었고, 곧 전투로 이어진다. 이 알텐키르헨 전투는 프랑스군의 빛나는 승리 중 하나가 되었다. 클레베르와 네, 르페브르, 술이  이 전투의 주역이 된다. 베르나도트는 다시 똑같이 노이비트에서 나머지 군대와 함께 라인강을 건넜고, 나사우 지역으로 이동한다. 이때 베르나도트는 헤센-다름슈타트 지역을 방어했다. 이때 주르당의 부대는 잠시 지체했고, 결국 이것은 베츨라전투의 패배로 이어진다. 결국 프랑스군은 다시 퇴각해야 했다. 퇴각할 때, 후미를 보호한 사람은 여전히 베르나도트였고 그는 자신의 임무를 완수했다.


잠시간의 휴식 후 1796년 6월 주르당은 다시 독일 침공을 한다. 이때 목적은 모로 장군이 지휘하는 라인과 모젤군을 방어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군이 집결하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똑같은 경로로 다시 독일로 들어갔고, 베르나도트는 주르당이 노이비트에서 라인강을 건널 때 선봉이 되었다.  이때 강을 건너다가 오스트리아 군에게 발각되자 베르나도트는 대담하게 오스트리아군의 수비대가 있는 곳으로 직전 상륙해서 공격하게 했다. 한밤중의 기습으로 오스트리아군은 간신히 퇴각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란강을 따라 진격했으며, 헤센-다름슈타트로 갔다. 주르당의 부대는 드디어 프랑크푸르트를 함락시켰으며, 뉘른베르크 대학이 있는 알텐도르프까지 진격했다.


이때 베르나도트의 군생활중 가장 뛰어나게 임무를 수행했다고 평가받는 디닝전투가 시작된다. 주르당은 나헤강 쪽으로 진격하면서, 베르나도트를 남쪽으로 보내면서 우익을 보호하고 모로장군을 만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를 들은 카를 대공[오스트리아측 총 사령관]은 우익의 후미인 베르나도트를 공격해서 모로와 주르당의 연결을 막으려 했다. 이렇게 된다면 주르당은 고립된 채 후퇴하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카를대공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갔다. 베르나도트와 카를 대공이 만났을 때 병력차는 세배에 달했다. 하지만 이런 불리한 상황을 이겨내고 베르나도트는 카를대공의 선봉과 본진 사이를 끊어 선봉을 고립시키기까지 했다.

그러나 중과부족이었던 베르나도트는 디닝마을로 후퇴했고, 모로와 주르당 모두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둘 다 구원병을 보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베르나도트가 성급하게 후퇴한다면, 나헤강쪽으로 너무나 나가 있던 주르당의 우익 전체가 공격당할 위험이 있었기에 주르당은 할 수 있는 한 늦게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베르나도트는 하루 동안 디닝 마을에서 버텼지만, 더 이상은 무리였고, 밤에 노이마르크트로 퇴각한다. 카를대공은 기병대 모두를 동원해서 베르나도트를 추격했고, 노이마르크트인근에서 다시 따라잡았다. 다시 하루 동안 치열한 포격전이 있었고, 베르나도트는 노이마르크트로 향하는 길이 봉쇄된 것을 알 때까지 버텼다. 그는 길을 돌아가야 했고, 계속되는 추격에 싸워가면서 본진과 합류하기 위해 이동했고, 간신히 본진과 합류했다. 베르나도트가 카를 대공과 맞닥들인것은 8월 20일이었고, 본진으로 돌아온 것은 8월 27일이었다. 거의 일주일간 쉬지 않고 전투를 하면서 퇴각했다. 이때의 일로 프랑스는 베르나도트를 칭송했다. 그가 이렇게 버티지 않았다면 우익이 드러난 주르당의 군대는 괴멸했을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오스트리아측에서는 베르나도트가 카를 대공의 진격을 막은 요소중 하나였을 뿐이라고 평하지만, 그렇게 많이 병력차가 나는 군대를 지휘한 카를 대공이 더 많은 전공을 세워야 했다는 것은 인정했다.  

디닝 전투,1796년 8월


간신히 본대에 합류한 베르나도트는 쉴 수가 없었다. 오스트리아군이 게속 주르당의 군대를 뒤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쉬지도 못하고 다시 거의 일주일간 전투를 벌였고 주르당의 군대가 퇴각하는데 시간을 벌어주었다. 주르당은 9월 2일 뷔르츠부르크에서 결정적 패배를 한 후 라인강 뒤로 후퇴해야만 했다. 주르당이 부르츠부르크에서 적과 싸우려 했을 때, 장군들 대부분이 이에 대해서 반대했다. 특히 부사령관이었던 클레베르는 강하게 반대했고, 주르당의 참모장과 베르나도트, 콜랑, 샹피오네 등도 이에 동의했다. 그리고 군대의 대부분 이들이 이 전투를 반대했다. 하지만 주르당은 이를 강행했고, 클레베르와 베르나도트,콜랑은 병을 이유로 잠시 지휘권을 내려놓는다. 모두들 그들이 주르당에게 항명해서 그랬다고 여겼으며, 특히 클레베르와 콜랑에 대해서는 모두들 확신을 가졌다. 하지만 베르나도트는 14일간 매일 전투를 했고, 그는 다이닝 전투 이후 이마에 커다란 상처를 입고 있었기에 그의 휴식은 정당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베르나도트를 아는 사람들은 그가 총사령관에게 복종했다면, 지쳤거나 어떤 큰 부상을 입었을지라도 전투에 참가했으리라 생각했다. 아마도 베르나도트가 잠시 쉰 것은 정당한 행동이었지만, 총사령관에 대한 불만도 다분히 있었을 것이었다.  


베르나도트가 복귀한 후 그는 우익의 마르소를 지원했다. 그리고 마르소와 베르나도트는 적을 막아서 프랑스군이 퇴각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둘은 함께 퇴각하는 군대의 후미를 보호했다. 이때 27살의 뛰어난 장군이었던 마르소는 매복한 병사의 총에 맞고 사망했다. 마르소의 죽음은 클레베르와 베르나도트가 후에 주르당을 더 이상 총사령관으로 신임할 수 없다고 주장하게 되는 이유중 하나였으리라 생각된다. 마르소가 죽게 되는 상황에 이르는 일련의 전투들은 처음부터 주르당이 부대들을 잘못 운용했기 때문이었다. 클레베르는 방데내전에서부터 함께 싸운 마르소와 절친했다. 방데내전 당시 한 사람은 둘에 대해 "이들과 같은 우정을 본 적이 없다. 이들이 나라를 구할 것이다"라고 할 정도였다. 대령이었을 때부터 둘의 휘하에서 싸웠고 클레베르와 절친했던 베르나도트 역시 마르소와 친했다. 베르나도트와 마르소는 법률가의 아들로, 10대에 군에 자원 입대해서 사병에서 장군이 된 비슷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둘은 처음부터 친밀감을 느꼈을 것이다.

기병 복장의 마르소, 마르소는 늘 기병복장에 장군 복대만 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프랑스군은 다시 라인강을 건넜고, 장군들은 총사령관인 주르당에 대해 회의적이 되었다. 특히 클레베르와 베르나도트가 주르당이 총사령관직에 머무는 것에 대해 크게 반대했는데, 베르나도트는 주르당에게 "분대 하나도 지휘하지 못하는 총사령관"이라는 소리까지 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것은 전적으로 공적인 일로 둘의 사이는 변함없었다고 한다. 특히 주르당은 이후 쓴 자신의 회고록에서 베르나도트의 행동에 대해 늘 칭찬하는 말로 일관했다.-대인배 주르당] 주르당은 결국 사직을 원했다. 정부는 부사령관이었던 클레베르가 총사령관이 되길 원했지만, 클레베르는 총사령관이 될 마음이 없었다. 결국 상브르와 뫼즈군의 총사령관은 베르농빌이 되었다.


베르나도트는 1796년 겨울 숙영을 코블렌츠에서 했다. 그는  이때 파리 의한 신문에 자신에 대한 비방기사가 났고 이에 대해서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것에 분개했다. 그는 자신의 명예가 더럽혀졌으며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데 화가 나서 장군직을 사임하려 했다. 하지만 클레베르는 베르나도트를 잘 달랬고, 베르나도트는 마음을 바꿨다.  

이 기간 동안 베르나도트의 명성은 정점에 이르렀다. 특히 1794년은 베르나도트에게 "기적의 해"였다. 1월에 지휘관급인 대위가 되었고, 2월에는 중령이 되었으며 4월에는 대령이 되었다. 그리고 6월에는 여단장(소장)이 되었으며, 8월에는 사단장(중장)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 두 해에는 언제나 무공으로 이름이 언급되었다.


  베르나도트는 진격한때는 늘 선봉에서 병사들 앞에 섰으며, 퇴각할 때는 늘 후미에서 적과 교전하면서 퇴각할 시간을 벌어다 주었다. 불리한 상황에 직면할 때면 베르나도트는 더욱더 대범하게 나갔고 이런 "센 척"하는 기술은 자주 적들을 당황시키면서 시간을 벌게 해줬다. 베르나도트가 이런 "센 척"하는 기술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장군을 믿고 따르던 병사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이런 신임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병사들과 함께 행동했기 때문이었다. 포탄이 빗발치던 한 전투에서 베르나도트는 참호를 파는 병사들을 매일 둘러보았다. 병사들은 너무나 위험하니 장군은 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지만, 베르나도트는 병사들과 함께 위험한 곳에 있는 것이 도리어 기쁘다는 대답을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병사들은 "용감한 장군을 우리가 보호해야 하기에 우리는 더 열심히 할 것이다"라는 대답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베르나도트가 병사들을 다정하게만 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다정하지만, 군율에는 한없이 엄격하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도시를 공격하기 직전 병사들에게 보내는 훈령에서 "모든 것보다 우선적으로, 포위 공격 동안 엄격한 규율이 잘 지켜져야 한다. 나는 그대들에게 경고하건대, 일말의 불평이라도 곧 공화국에 대항하는 범죄로 간주될 것이다."라고 할 정도였다.


베르나도트는 점령한 주민들에 대해서 매우 너그럽게 대했는데, 그는 "자유를 알리기 위해 전쟁을 하는 것이지, 주민들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는 약간 고지식한 면과 소심한 면도 있었는데, 특히나 자신의 명예가 달린 문제에 대해서 민감했다. 베르나도트의 참모장은 주민들이 보낸 선물을 베르나도트가 거절하자, 자신이  대신받는다. 그는 이런 선물을 받지 않는 것은 주민들의 호의를 무시하는 처사라 여겼다. 하지만 이것을 안 베르나도트는 그를 바로 체포하기도 했다.그리고 엄격한 규율을 자랑하는 자신의 부대가 도시를 "약탈했다"라는 악의적인 기사가 파리에서 나오자, 그에 대해서 엄중하게 조사해달라고 했고, 정부가 이를 무시하자 사직하겠다는 이야기까지 했다.  


장 바티스트 베르나도트, 프랑스 장군



이때 경력이 정점에 이르렀지만, 베르나도트의 꿈은 소박했다. 그는 자신의 장교들에게 은퇴해서 장군 월급의 반인 연금을 받으며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이때 베르나도트는 용감한 군인이었지만, 민감한 정치 상황을 잘 파악하지 못했으며 권력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곧 자신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칠 "그시대 가장 위대한 인물"을 만나게 된다.

1797년 베르나도트는 후에 황제 나폴레옹이 되는 보나파르트 장군을 지원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간다.


그림출처

위키 피디어

Bernadotte : the first phase 1763-17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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