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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Nov 23. 2016

베르나도트 : 프랑스에서의 삶(8)

1798년 : 빈대사

베르나도트의 초기 경력 중 가장 이례적인 경력은 바로 빈 대사 경력일 것이다.  이것은 베르나도트에게 맞지 않는 경력이었는데 베르나도트는 외교관으로써의 경험이 전무한 전형적인 군인이었다. 그는 10대시절에 입대했으며 오래도록 하사관으로 지냈고, 프랑스 혁명전쟁이 일어나고서야 장교가 되었던 인물이었다. 그의 교육은 군에서 받은 것이 다였으며, 공화국에 과도하게 충성스러웠던 그를 프랑스 망명왕족과 귀족들 그리고 공화국에 적대적인 사람들이 있는 빈으로 보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기도 했다.


베르나도트


사실 베르나도트가 빈 대사로 간것은 순전히 베르나도트가 이탈리아 군 총사령관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나폴레옹의 뜻이었을 것이다. 후에 베르나도트가 빈에서 돌아오고 있었을때 나폴레옹과 탈레랑은 바라스에게 베르나도트의 실패에 대해서 지적하자, 바라스는 나폴레옹에게 "당신은 베르나도트를 이탈리아 군에서 떼놓으려는 것이었지 베르나도트의 외교행동이 우리에게 어떤 걱정을 초래할지는 고려하지 않았잖소?"라고 했었다.

적의 심장이나 다름없는 빈으로 공화국 대사가 가는 것은 사실 매우 위험하고 실패할 가능성이 큰 일이었다. 이런 일을 외교경험이 없는 장군에게 맡기는 것이야 말로 실패하겠다는 의미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외교부 수장이었던 탈레랑은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탈레랑은  나폴레옹의 뜻을 들어줬다.


이탈리아에서 나폴레옹


프랑스는 적의 심장부로 들어가는 공화국의 대사를 소홀히 할 생각은 없었다. 베르나도트에게 지급된 돈은 그가 장군으로 받던 돈에 비할가 아니었다. 베르나도트는 자신의 군 참모들과 함께 가길 원했지만 정부는 장군들을 전선에서 뺄수 없다고 거절한다. 대신 베르나도트는 젊은 장교들 몇명을 데리고 간다. 하지만 외교관으로써 관료로써의 경험없는 이들에 몇명의 관료들을 더해준다. 젊은 외교관들과 은퇴한 폴란드 출신의 외교관을 붙여줌으로써 어떻게든 군인이었던 대사가 좀더 부드러운 외교 관계와 인적 관계를 알길 바랬던듯하다.


이런 준비가 끝난뒤 베르나도트는 사람들과 함께 바로 빈으로 향해 떠나간다.  군인이었던 베르나도트는 마치 군 작전을 수행하듯이 쭈욱 빈을 향해 갔으며 국경에서는 큰소리 치면서 그냥 통과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은 빈 외교가에 당황스러운 일이었는데 베르나도트가 예상보다 너무 빨리 도착했었기 때문이었다.


빈에서 베르나도트는 공화국의 대사로써 무척 아이러니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빈에는 프랑스 망명 왕족들과 귀족들이 많이 살고 있었으며 이들은 베르나도트의 적이기도 했다. 빈에서 이들을 만나지 않기는 무척 힘든 일이었는데 베르나도트는 공화국에 충성하는 인물로써 이들과의 만남을 피했다. 이를테면 나사우 공비가 베르나도트의 참모들을 개인적으로 초대했는데, 공비의 손님들중에 프랑스 귀족들이 있는것을 알고 이를 거절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베르나도트의 옛 상관 역시 빈 근처에서 살았는데 이를 안 사람들이 베르나도트에게 그를 만나지 않겠냐고 했을때, 베르나도트는 공화국 대사로써의 지위를 가진 자신이 귀족인 옛 상관을 만나는 것은 안된다고 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그에 대해 "프랑스 기사의 정신을 가진 공화주의자"라고 언급했듯이, 베르나도트는 당대 빈의 귀족들이 수긍할만한 매너를 가지고 있기도 했다. 그는 잘생긴 외모와 뛰어난 언변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호감을 얻었으며,공화국의 공적인 업무가 아니라면 유연한 태도를 취하므로써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얻기도 했다.


당시 황제 프란츠 2세, 1792년 초상화


베르나도트는 외교관으로 빈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났지만 그는 늘 프랑스 공화국을 대표하는 것을 잊지 않았고 이것은 오스트리아 궁정에서 어느정도 문제가 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은 물론 참모들에게도 프랑스 공화국을 상징하는 삼색옷을 입으라 명했는데 공화주의자로써 프랑스 공화국을 위해 싸운 장군으로써는 적당한 행동이었지만 외교관으로써는 그다지 적절치 않은 행동이기도 했다. 이런 엄격함은 후에 위험한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빈의 소요 사태 이후, 황제에게 서신을 보내면서 그 서신을 가지고 가는 제랄(후에 루이 필리프 국왕 시절 프랑스 육군 원수였으며 프랑스 수상을 지내는 인물)에게 공화국을 상징하는 옷차림을 하고 가도록 명령했다.


1798년 4월 13일, 베르나도트는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공화국을 상징하는 삼색기를 대사관의 문앞에 달았다. 이날은 마침 부활절 기간이었기에 많은 이들이 밖으로 나와있었으며 빈의 사람들은 이 삼색기를 마주하게 된다. 빈의 사람들은 대사관 앞에서 몰려가게 되는데 삼색기를 거두라는 주변의 만류에도 베르나도트는 이를 거부했다. 격앙된 사람들은 결국 삼색기를 뺏아 태워버렸으며 프랑스 공화국 대사관 사람들의 목숨을 위협하게 된다. 이것은 로마에서 뒤포장군이 죽었던 상황과 비슷한 상황이기도 했었다. 결국 군중을 떼어놓기 위해 경찰과 군이 동원되었는데 이때 보고서에서 베르나도트에 대해서 "만약 자신들이 가지 않았다면 그가 여러명 죽였을것"이라는 언급이 있기도 했다.


베르나도트는 공화국의 상징을 불태운 것에 대해서 매우 화를 냈으며 더이상 대사직을 수행할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황제에게 다시 공화국기를 걸게 해주던가 아니면 자신이 프랑스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청원했으며 결국 베르나도트와 그의 참모들은 짐을 싸서 프랑스로 돌아가게 된다

프랑스 공화국의 상징, 삼색기, 프랑스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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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황은 프랑스 외교가에서도 매우 골치아픈 문제이기도 했다. 이런식으로 두 나라의 외교관계를 단절하는 것은 안될 말이긴했지만 공화국을 옹호하는 베르나도트의 행동 역시 질책할수만은 없는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모두 이 문제가 크게 발전하길 원치 않았다. 오스트리아와의 조약을 이끌어냈던 나폴레옹을 보내 다시 해결할수도 있었지만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와의 협정 대신에 이집트로 가려던 계획을 멈추지 않고 이집트로 갔다. 프랑스는 이 문제를 적당이 덮고 넘어가길 원했다. 이 문제로 전쟁을 할수도 있었지만 당시에는 나폴레옹을 멀리 보내버렸기에 전쟁을 시작하기 애매한 상황이기도 했었다. 결국 칠개월뒤의 선전포고문에 이 문제가 기록되기 전까지 이 문제는 적당히 얼버무려지게 된다.


탈레랑은 베르나도트가 수도로 오는것을 원치 않았으며 대신 다른 군의 지휘권을 제안했다 하지만 베르나도트는 이를 거절했다. 다음에는 다른 곳의 대사지위를 제안했는데 베르나도트는 이 역시 거절했다.


탈레랑, 19세기 작품


베르나도트는 파리로 돌아왔으며, 이때 그는 그의 삶에서 중요하게 될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 사람은 바로 그의 아내가 되는 데지레 클라리였다.


그림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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