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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Jan 10. 2017

베르나도트:프랑스에서의 삶(12)

1799년 :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

베르나도트의 삶에서 큰 전환점이 된 사건들이 몇개가 있었다. 가장 중요했던 것은 아마도 프랑스 대혁명이었을 것이고 그 다음은 스웨덴 왕위계승자로 선출된 것일 것이다. 하지만 이들 못지 않게 중요한 전환점이 바로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일것이다. 이 사건은 나폴레옹이 정권을 잡는 사건일 뿐만 아니라 베르나도트가 "공화주의자"로써 행동한 마지막 큰 사건이기 때문일 것이다. 브뤼메르 18일때까지 베르나도트는 자신의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는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적극적 행동"을 취하지 않았고 아마 그가 그럴것이라고 판단했던 나폴레옹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베르나도트가 훗날 공화국을 배신하고 나폴레옹의 제의를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


1799년 9월 전쟁 장관지위에서 물러난 베르나도트는 한가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는 갓 태어난 아들인 오스카르와 함께 지내는 것을 즐기면서 자신의 집에서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이런 행복한 가정생활은 얼마가지 못하는데 바로 보나파르트 장군이 이집트에서 그냥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당시 프랑스의 전선은 어느정도 안정되고 있었지만 이전의 위기는 "승전 장군"인 나폴레옹의 인기를 더 높이게 만들었다. 의회내에서 시에에스는 다시한번 쿠데타를 추진했는데 여기에 나폴레옹이 직접 관여하게 된다.


이 쿠데타에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군대였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군대 대부분은 이집트에 버려두고 왔다. 결국 이것은 그가 자신에게만 충성하는 부대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파리에 있던 부대들은 "공화국"에만 충성하는 경향이 더 강했기에 자신이 아니라 좀 더 공화주의자인 장군들을 따른 가능성이 있었다. 나폴레옹이 자신의 계획에 방해가 될 장군으로 모로와 베르나도트를 꼽았다. 돌아온 뒤 나폴레옹은 모로에게 선물을 보내는등의 행동을 했지만, 베르나도트는 좀 다르게 접근한다.


모로


사실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파의 내부 인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나폴레옹의 인척이었으며 나폴레옹의 형인 조제프는 자신의 동서를 매우 좋아했었다. 베르나도트 역시 나폴레옹이 이집트에서 그냥 돌아오기전까지는 매우 호의적이었다. 하지만 이집트에서 그냥 돌아오고 정치적 문제가 개입되면서 베르나도트는 늘 그랬듯이 나폴레옹의 뜻을 쉽게 따르지 않았다. 나폴레옹과 베르나도트는 가족모임에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에게 "프랑스가 위협에 처했고 우리가 힘을 합쳐야한다"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이 이집트에 두고 온 군대가 있었다면 훨씬더 도움이 되었을것이라 비판한다. 


물론 베르나도트가 나폴레옹의 쿠데타 계획을 전혀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그는 이 계획에 찬성하지 않았고 자신 주변의 장군들과 의견을 교환했을때 절대 이 쿠데타에 참여하지 말고 의회를 지지하자고 이야기한다. 베르나도트는 모로에게 쿠데타에 관여하지 말자고 이야기했었고 이에 동의했다. 그리고 자코뱅이었던 주르당이나 오주로 역시 이를 지지했다.


나폴레옹은 모로는 정치 권력보다 군대 지휘권을 선호하기에 그는 큰 문제가 되지 않을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베르나도트는 좀 다른 인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베르나도트를 계속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설득했지만 설득당하지 않았다. 대신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에게 스스로 행동하지 않을것이라는 약속을 했다. 사실 나폴레옹이 노린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베르나도트가 자신을 막기 위해 스스로 행동하지 않길 바랬던 것이다. 

베르나도트




브뤼메르 18일 아침,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를 불렀다. 나폴레옹의 집에는 군복을 입은 수많은 군인들이 있었고 거기에는 파리의 수비대장이었던 르페브르등이 합류했었으며 심지어 쿠데타에 관여하지 말자고 베르나도트와 약속했던 모로도 있었다. 물론 주르당이나 오주로 같은 인물은 없었다.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에게 왜 군복을 입고 오지 않았냐고 물었으며 베르나도트는 이것은 자신의 의무가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나폴레옹은 마지막까지 베르나도트에게 쿠데타에 참여하라고 권유했는데 아마도 이것은 베르나도트가 적어도 참여는 하지 않지만 스스로 행동하지 못하게 못박는 일이었을 것이다.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의 쿠데타에 부정적이었던 의원들이 가득한 의회를 나폴레옹이 장악하지 못 할 것이라 여겼지만, 베르나도트의 예측과 달리 나폴레옹은 쿠데타에 성공했다. 사실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켰을때 베르나도트가 파리에 있지 않고 의회가 열리는 생클로드에 있었다면 나폴레옹이 군대를 쉽게 장악하지는 못했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나폴레옹의 쿠데타는 성공했다.


나폴레옹, 제1통령시절


나폴레옹의 쿠데타가 성공한뒤 그의 정적들은 나폴레옹의 눈을 피해 도망가거나 그의 사면을 기다려야했다. 주르당은 몸을 피했고 오주로는 자신의 옛 총사령관에게 용서를 구했다.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의 인척으로 가족이나 마찬가지였으며 나폴레옹의 형인 조제프가 그를 옹호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그 역시 위협을 느껴서 아내와 함께 몸을 피신해야했다. 베르나도트의 참모장이었던 사라쟁 장군은 남장한 아내와 피신한 베르나도트가 숨어있을 곳을 제공했었다. 베르나도트가 사라쟁의 시골집에서 3일간 머물고 있는동안, 조제프는 동생에게 베르나도트를 불러들이라고 이야기했으며, 베르나도트의 아내인 데지레는 언니에게 편지를 보냈고 남편에게는 이제 그만 돌아가자고 이야기했다.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는 나폴레옹이 권력자로 부상하는 계기가 마련된 사건이었다. 이후 나폴레옹은 권력을 움켜쥐고 결국 "황제"가 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에서 베르나도트는 자신의 우유부단함이나 자신의 정치력이 나폴레옹보다 매우 못하다는 것을 다시한번 깨달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후에 "기회"가 주어지면 잡아야한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게 된다.


그림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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