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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Dec 30. 2016

베르나도트:프랑스에서의 삶(11)

1799 : 전쟁 장관

베르나도트는 1799년 7월 2일 전쟁장관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겨우 두달 정도 전쟁장관 지위에 머물렀었는데 이것은 복잡한 프랑스의 정치 상황 때문이었다. 

베르나도트가 전쟁장관이 된 것에 대해서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베르나도트에 호의적이었던 사람들은 그의 지위를 환영했지만, 반면 베르나도트와 사이가 나빴던 인물들은 그의 지위에 의문을 갖게 되었다.


당시 프랑스는 전쟁중이었고 전쟁 장관의 역할은 중요했다. 베르나도트 역시 물자와 병력을 확보하는 것이 절대적인것이라는 것을 알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각각의 전선 상황은 복잡하게 돌아갔다.

이탈리아 전선의 상황은 매우 나빴는데 이탈리아군의 총 사령관으로 프레리알 30일의 쿠데타의 주역이었던 주베르가 임명되었다. 주베르는 결혼한 직후 이탈리아로 갔으며 보급과 보충병을 받은뒤 용감하게 적과 싸우게 된다. 하지만 그의 적은 보통인물이 아니었다. 바로 러시아의 전설적 명장이었던 수보로프였다. 1799년 8월 15일 노비전투가 벌어졌고 여기서 프랑스군은 패배했을뿐만 아니라 주베르는 여기서 전사했다. 패배와 총사령관의 죽음은 이탈리아 전선에서 큰 타격이 되었다. 주베르의 후임으로 간 사람은 베르나도트의 오랜 동료였던 샹피오네였다. 하지만 그 역시 이탈리아 전선을 만회하지 못했고 이런 상황은 베르나도트에게 무거운 짐으로 작용했다.


노비전투(1799)


스위스쪽 총사령관은 마세나였다. 마세나는 베르나도트와 개인적으로 사이가 매우 나빴다. 물론 둘은 공적인 의무에서 서로에 대해 견제하지 않았지만 사적인 문제는 달랐다. 둘은 너무나도 성격이 달랐으며 입장도 달랐는데 베르나도트는 전쟁 장관으로 정치적 문제에 관여하지 않을수 없었지만 마세나는 군인으로써 정치따위는 안중에 없는 사람이었다.  사실 이전부터 둘의 사이는 더이상 나빠질 여지조차 없었다. 이런 상황은 마세나와 베르나도트의 견해차가 발생하자 서로를 비난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마세나는 베르나도트가 전쟁장관으로써 의무를 수행할 능력이 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표했으며, 베르나도트의 전략이나 명령을 무시했다. 마세나는 베르나도트가 야전 사령관으로써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전장에서 자신의 능력을 더 높게 평가했다. 그리고 결국 승리를 이끌어 냄으로써 이를 입증했었다. 


앙드레 마세나


홀란드쪽 총사령관이었던 브륀 장군과 베르나도트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 비록 브륀의 승리는 베르나도트가 전쟁장관직에서 물러난 뒤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브륀과 그의 장군들은 베르나도트가 병력과 물자를 보급해준 덕에 승리를 얻게 되었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브륀


전쟁 장관으로써 베르나도트는 정치와 연결되지 않을수 없었다. 이때 그는 자코뱅 당과 연결되기 시작했다. 사실 베르나도트가 자코뱅과 연결된것은 그의 사령관이었던 주르당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이때 자코뱅을 지지했던 주르당이나 오주로,마르모트 등은 원래 자코뱅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공포정치 시기를 겪은 장교들이라면 자코뱅과 "국민의 대표자"들 때문에 목숨의 위협을 느끼지 않은 인물이 없었기 때문일것이다. 하지만 시대는 바뀌었고 프랑스 의회에서 점차 왕당파가 힘을 얻는것에 대해 이들은 걱정하기 시작했다. 공화국이야 말라고 그들이 지키려했던 곳이고, 왕당파는 이런 공화국을 위협하고 있는 존재로 인식했다.

베르나도트 역시 공화국에 빚이 있는 사람이었으며 아마도 주르당의 이런 견해에 그 역시 동참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베르나도트가 자코뱅 당에 완전히 몸을 들이고 있었는가는 살짝 고민해봐야할 문제이기도 했다. 왜냐면 정부에서는 자코뱅을 견제하기 위해 파리의 사령관이었던 마르모트를 경질하고 그 자리에 르페브르를 앉혔었다. 이것은 베르나도트가 관여하지 않을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푸셰에 의하면 이것은 베르나도트 역시 알고 승인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주르당


베르나도트를 가장 견제한 인물들은 바로 시에예스와 보나파르트쪽 사람들이었다. 아마도 이들은 베르나도트가 자신들의 앞길을 막고 있다고 여겼었다. 조제프 보나파르트와 뤼시엥 보나파르트는 베르나도트를 좋아하긴 했지만 정치적인 상황에서는 달랐다. 그들은 베르나도트가 나폴레옹이 권력을 잡는데 방해가 될것이라고 여겼으며 특히 그가 전쟁장관으로 있는 것에 대해서 우려를 표했다. 특히 시에예스와 뤼시엥 보나파르트는 베르나도트가 자신들의 계획에 방해가 될것이라고 여겼었다. 결국 이런 정치적 상황은 베르나도트가 전쟁 장관직을 겨우 두달 정도만 하고 물러나게 만들었다. 


전쟁장관으로써 베르나도트에 대한 평가는 그리 좋지는 않았다. 겨우 두달 정도였으며 이긴 전선도 있었던 반면 이탈리아 전선은 거의 재앙 수준에 가까웠기때문이었다. 하지만 당대 베르나도트는 정치적으로 좀더 성공적인 모습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특히 자코뱅 당에 호의를 가지게 된것이 결정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그의 성공은 결국 다른 이들의 견제를 부르게 만들었을 것이다.


재미난 것은 베르나도트가 사임한 5일뒤, 프랑스에 있던 스웨덴의 대사였던 브린크만 남작의 보고서이다. 그는 본국에 보내는 보고서에서 베르나도트가 장관으로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으며, 베르나도트가 전쟁장관직에서 물러난 것은 총재들보다 인기가 더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림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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