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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Dec 20. 2016

베르나도트:프랑스에서의 삶(10)

1798-1799년 : 독일 전선 그리고 쿠데타

결혼후 베르나도트는 다시 군 지위에 복귀하게 된다. 1798년 10월 베르나도트는 주르당이 총사령관으로 있는 마인츠 군의 좌익 담당하게 되었다. 사실 베르나도트는 주르당과 그리 좋지 않게 헤어졌다. 상브르와 뫼즈군에서 이탈리아군으로 가기 직전, 베르나도트는 클레베르와 함께 주르당이 상브르와 뫼즈군의 총 사령관으로 있는 것을 거부했었으며, 심지어 베르나도트는 주르당에게 "분대 하나도 지휘하지 못할 인물"이라는 막말까지 했었다. 하지만 이것은 옛 일이었으며, 베르나도트는 다시 주르당과의 관계를 잘 회복했었으며 (대인) 주르당 역시 베르나도트를 환영했었다.


주르당


베르나도트가 마인츠 군으로 갈때쯤 프랑스는 다시 전쟁의 기운에 휩쌓이기 시작했다. 빈에서는 주전파들이 득세하기 시작했으며 아마도 프랑스에 나폴레옹이 없던 상황 역시 이런 주전파들이 힘을 얻는데 보탬이 되었을 것이다. 베르나도트는 아주 잠깐 빈 대사직을 수행했지만,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으며 사적으로 그들과 친분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이때문에 베르나도트는 영국과 러시아에 영향을 받아 전의에 불타오르는 빈의 상황을 빨리 알아챌수 있었으며, 주르당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전쟁에 대비해야한다고 언급하기도 한다.


마인츠 군의 좌익을 지휘하는 장군으로 베르나도트는 헤센-다름슈타트 지역에 머물렀었다. 그는 이전에 이미 이곳에서 매우 신망을 얻었었는데, 베르나도트의 행동에 감동받은 헤센-다름슈타트의 군주는 자신의 백성들에 해를 끼치지 않았던 베르나도트에게 자신의 말을 선물할 정도였었다. 그리고 베르나도트의 영향력은 헤센-다름슈타트 지역 사람들에 영향을 미쳐서 이들은 이후 프랑스와 평화협정을 맺고 오래도록 프랑스와의 동맹관계를 형성했었다.


1799년 2월 주베르의 사퇴로 이탈리아 군의 총사령관직이 공석이 되었을때, 바라스는 그 자리에 앉힐 인물로 베르나도트를 심각하게 고려한다. 맡을 만한 인물이 별로 없었는데 나폴레옹과 클레베르는 이집트에 있었고 오슈는 죽었으며, 마세나는 이미 다른 군을 맡고 있었으며 모로는 정치적 문제 때문에 발목이 잡혀있었다. 하지만 베르나도트는 이탈리아군의 총사령관직을 맡지 않았다. 당시 이탈리아군의위상은 매우 큰것으로 나폴레옹이 괜히 베르나도트를 이탈리아군 총사령관직을 맡는것을 방해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베르나도트는 현실적으로 보충병이 충원되지 않는 이탈리아군은 오스트리아와의 전투에서 쉽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 했다. 바라스는 베르나도트의 이야기를 당시 전쟁장관이었던 쉐레에게 전했는데, 쉐레는 베르나도트의 이야기는 정확하지만 뛰어난 장군이 맡는다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고 언급했으며, 결국 그 자신이 이탈리아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하지만 쉐레는 나폴레옹이 아니었으며 그의 실패는 이미 예견된것이기도 했다.


셰레


베르나도트는 이탈리아 군 대신 독일로 돌아갔으며 새로 편성된 군의 총사령관직에 올랐다. 하지만 사실상 이것은 이름뿐인 총사령관이었으며, 사실상 주르당의 "다뉴브 군"의 좌익이었다. 마세나 역시 "헬비티아 군"의 총사령관이긴했지만 정부에서는 마세나 역시 주르당의 휘하에 있는 우익정도로 여겼었다. 물론 마세나에게는 독립적 지위를 보장한다고 이야기했었지만 말이다. 


1799년 3월 1일 주르당의 공격이 시작되었을때 베르나도트는 자신의 병력이 거의 없었다. 정부에서는 그에게 보충병력을 약속했지만 보내주지 않았었다. 베르나도트는 부족한 병력을 이끌고 Philippsburg를 점령하러 갔었다. 이곳을 지키던 인물은 잘름의 라인그라프였다. 베르나도트는 부족한 병력을 들키지 않기위해 그를 위협했지만 라인그라프는 베르나도트가 민간인인 자신의 백성들을 해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수비대와 함께 전투를 각오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결국 베르나도트가 이곳의 점령을 포기하고 자신의 휘하 장군이었던 네가 점령한 만하임으로 갔었다. 베르나도트는 파리로 가서 자신의 병력을 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고 베르나도트는 건강상의 이유로 이름뿐인 총사령관직을 사임했다.  


베르나도트가 파리로 돌아온뒤, 그는 중요한 정치적 문제에 개입한다. 바로 혁명력 7월 프라리알 30일의 쿠데타이다.(1799년 6월 18일) 이날의 쿠데타는 훗날 나폴레옹이 정권을 장악하는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의 기반이 되는 것으로 훗날 나폴레옹에게 절대적 도움이 되는 시에예스가 바라스와 함께 정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의 발단은 프랑스가 다시 전쟁에 돌입하면서였다. 이전 전투와 달리 이탈리아 전선에서도 프랑스가 패배했었으며 그나마 자코뱅파소속으로 승전을 올리던 샹피오네가 파리로 소환되면서 500인회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이에 5명의 총재중 한명이었던 시에예스는 바라스와 손을 잡고 다른 세명의 총재를 몰아내므로써 불만을 타결하려했다. 하지만 이들을 몰아내는 것은 쉽지 않았으며 결국 "군대"의 힘을 빌리게 된다. 이때 파리에 있던 장군들중 군에 영향력을 행사 할수 있는 인물은 세명정도였는데 주베르와 주르당 그리고 베르나도트였다. 시에예스는 주베르와 손을 잡았으며 결국 주베르는 파리에 주둔중이던 부대 병력으로 위협을 가해서 버티고 있던 총재들을 사임하게 만들었다. 비록 이 쿠데타는 피를 흘리지는 않았으며 총재들이 사임을 했기에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었다고 하지만 군대의 힘으로 협박을 가했기에 쿠데타라고 일컬어지게 된다.

사실 바라스는 베르나도트를 더 신뢰했었으며 이때 군대의 지휘를 베르나도트에 맡기려했다고 한다. 하지만 베르나도트는 그의 참모들이었던 메종과 모랭에게 조언을 구했다. 이들은 베르나도트에게 이 일에 참여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조언했으며 결국 베르나도트는 이에 참여하지 않았다.


시에예스


하지만 바라스는 시에예스를 견제하려했으며 군과 자신의 연결고리로 베르나도트를 선택하게 된다.

프레리알 30일의 쿠데타이후 베르나도트는 그의 삶에서 새로운 두가지를 얻게 되었다. 하나는 아들 오스카르였으며 또하나는 전쟁 장관이라는 지위였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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