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여성들: 바이에른의 공작 알브레히트 3세와 아그네스 베르나우어
중세시대 신분차이가 나는 결혼으로 인해 가장 비극적 죽음을 맞이 한것으로 알려진 사람은 바로 아그네스 베르나우어였습니다. 1410년경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아그네스 베르나우어는 바이에른 평민 출신의 여성으로 매우 아름다운 여성이라고 알려져있습니다. 그녀의 삶의 비극은 그녀가 바이에른 공작의 후계자였던 알브레히트를 만나면서였습니다.
바이에른 공작 가문은 "비텔스바흐"가문이었습니다. 이 가문은 독일에서 매우 오래된 가문이었죠. 15세기 무렵 많은 독일의 왕가들처럼 바이에른 공작 가문역시 장자상속제를 채택하기 않았으며 이때문에 여러 분가로 나뉘어져있었습니다. 그리고 아그네스 베르나우어가 만난 바이에른 공작은 바이에른-뮌헨 공작의 후계자였습니다. 1428년경 알브레히트는 마상시합을 하러 가던 도중 아그네스 베르나우어를 만났으며, 아름다운 그녀에게 반해버렸고, 그녀를 자신의 궁정으로 데려옵니다. 아그네스 베르나우어는 알브레히트의 궁정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많은 이들이 알브레히트가 아름다운 아그네스를 자신의 정부로 삼았을 것이라 여겼으며 그녀에 대해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서 남성 왕족들에게는 정부가 있었으며, 이것은 비록 도덕적으로는 문제가 있는 행동이긴 했지만 용납받지 못할 행동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1430년대 초 알브레히트가 아그네스 베르나우어와 비밀리에 정식으로 결혼했을 수도 있다는 증거들이 나오게 됩니다. 이렇게 되자 공작 가문 사람들은 이 상황을 매우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죠.
알브레히트는 그의 아버지의 유일한 적자 아들이었습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알브레히트가 죽거나 계승 권리가 박탈된다면 그의 영지는 가까운 친척들에게 돌아간다는 의미였었습니다. 이때문에 알브레히트의 결혼은 매우 중요한 사항이었습니다. 독일에서는 "귀천상혼"이라는 개념이 존재했었는데, 동등한 지위의 남녀가 결혼하지 않을 경우 그 후손들은 계승권을 박탈당할수가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많은 남성 왕족들이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더라도 결국 후계자와 가문을 위해서 정략결혼해야했었죠. 게다가 당시에 바이에른 공작 가문에서는 상속문제를 두고 분가들끼리 분쟁이 있었으며 결국 전쟁을 치루고서야 상속 문제가 해결되었었습니다.이런 상황에서 알브레히트가 귀천상혼 했다면 다시 한번 상속문제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컸습니다.
결국 알브레히트의 아버지였던 공작은 근본적 문제를 일으킨 아그네스 베르나우어를 없애버리기로 결정합니다. 그녀가 죽는다면, 아들이 설령 그녀와 비밀결혼을 했었다고 하더라도 동등한 지위의 다른 여성과 결혼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었기 때문이었죠.
아마 이 문제에 대해서 알브레히트는 사랑하는 아그네스 베르나우어를 자신이 지킬수 있을 것이라 여겼던듯합니다. 하지만 아그네스는 자신의 죽음을 이미 예견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문제의 해결책은 자신의 죽음 밖에 없었으니까요.
1435년 바이에른 공작은 아들이 사촌과 사냥을 떠난 뒤, 아그네스 베르나우어를 마녀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체포합니다. 그리고 10월 2일 아그네스 베르나우어를 익사시킵니다. (이게 마녀 재판에서 물에서 익사하면 마녀가 아니고, 살아나면 마녀던가 그럴겁니다. 뭐 마녀가 아니고 도와줄 사람이 없었으니 죽을수 밖에요)
이 문제는 아들과 아버지의 불화로 치닿게 됩니다. 알브레히트는 아그네스의 죽음에 분노했고 아버지와 전쟁도 불사하려했습니다. 하지만 아들과 아버지의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알브레히트의 누이 동생중 한명은 첼레의 백작과 결혼했는데, 그의 형이 바로 첼레의 프리드리히 2세로 베로니카 데세니스카와 결혼했던 사람입니다. 베로니카가 죽은뒤 프리드리히는 아버지와 내내 분쟁을 했으며 이것은 첼레 가문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제국내의 불안 요소로 남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전례 때문에 부자간의 관계에 황제가 개입했으며 결국 부자는 화해하게 됩니다.
알브레히트는 아그네스 베르나우어를 위해 수도원을 지었으며, 바이에른 공작 역시 자신의 죄를 속죄하고 무고한 아그네스 베르나우어의 영혼을 위해 성당을 세웠습니다. 결국 아름다운 아그네스 베르나우어는 공작의 후계자와 결혼했을것이라는 이유만으로 살해당한것으로, 중세시대 신분이 얼마나 엄격했나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기도 합니다.
중세 시대의 이야기는 시간이 가면서 점차 잊혀지게 됩니다. 물론 아그네스 베르나우어를 위한 수도원과 성당이 있었기에 그녀의 이야기는 묻혀지지는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19세기에 아그네스 베르나우어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신분을 초월하는 사랑이야기는 신분제가 흔들리고 있던 19세기 매우 낭만적으로 보일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아그네스의 비극적 죽음 역시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었을 것이구요. 특히 당시 바이에른의 왕위계승자였던 루드비히(후에 바이에른의 국왕 루드비히 1세)가 아그네스 베르나우어 기념 성당을 방문해서 그녀에 대한 시를 쓰면서 아그네스 베르나우어와 알브레히트 공작과의 사랑이야기는 더욱더 유명해지게 됩니다.
사실 19세기 이후 아그네스 베르나우어와 알브레히트 공작의 사랑은 매우 낭만적으로 포장되었습니다. 하지만 아그네스 베르나우어는 결국 공작과 결혼했을 수도 있다는 이유만으로 살해당했습니다. 또 그녀의 왕자님은 사실 누이동생의 시댁이었던 첼레 가문의 비극을 통해서 이런 결과가 나올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았을 것이지만 자신의 뜻을 고집했습니다. 결국 그의 행동은 사랑하는 여인을 죽음으로 몰아갔죠.
결국 후대에 낭만적으로 포장된 이야기는 원래는 비극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독일에서 결혼을 통한 신분상승은 중세시대에 매우 힘들었다는 것 역시 알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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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그래서 신데렐라 작가가 프랑스 사람인 것인가?????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