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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Sep 05. 2015

베르나도트 : 프랑스에서의 삶(3)

1780-1792

베르나도트는 사병으로 입대하게 된다. 그는 르와얄 라 마린 소속으로 코르시카에 배속되었다. 프랑스는 코르시카를 제노바로부터 구입했었으며 코르시카 독립운동을 펼치던 이들은 처음에는 프랑스의 지배를 거부해서 전투를 하기도 했었지만 결국 프랑스의 지배를 받아들였고 프랑스 군이 코르시카에도 주둔하고 있었던 것이다. 재미난 것은 이때 나폴레옹과 형인 조제프는 프랑스 본토에 있었지만, 나머지 가족들은 코르시카에서 거주하고 있었기에 어쩌면 베르나도트와 보나파르트 가문 사람들은 프랑스에서 만나기 전에 이미 코르시카에서 마주쳤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동안 베르나도트는 심하게 아팠었는데 한 번은 그가 너무 심하게 앓아서 의사가 사망선고를 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어쨌든 베르나도트는 잠시 군을 떠나 집으로 돌아와서 병을 치료했었다. 하지만 이 동안 그는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었는데 장교와 결투를 하기도 했었다고 전해진다. 아마도 가스코뉴 사람 특유의 불같은 성미를 감추지 못했기에 그랬을 수도 있을 듯하다. 어쨌든 아픈 것과 문제를 일으킨 것 모두를 해결하는 좋은 방법은 잠시 떠나 있는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베르나도트는 남는 시간을 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는 많은 군인들에 대한 책을 읽었으며 자신의 삶에 큰 야망을 품게 되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당대 뛰어난 군인들로 평가받았던 여러 장군들의 글을 읽었는데 특히 법률가의 아들로 태어나 프랑스 장군이 된 카티나나 화가의 아들로 프랑스 육군 원수의 지위에 오르게 되는 파베르의 전기를 읽으면서 자신도 그들과 같이 될 수 있을 것이라 희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베르나도트가 그 책을 읽고 있던 시기에는 베르나도트에게는 장교가 될 수 있는 희망은 없었다. 프랑스는 신분제를 강화하기 위해 장교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을 귀족 출신으로 엄격히 제한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군으로 다시 복귀한 베르나도트는 1784년 그르노블에 있었다. 1784년 그르노블에서는 프랑스 대혁명의 전야를 알리는 사건이 있었다. 일명 "기왓장의 날"이라고 불리는 사건이 있었는데 이 사건은 이후 일어나는 프랑스 대혁명이 시작되는 것을 알리는 사건과 마찬가지였다. 도팽 지방의 주도였던 그르노블에서 과세가 옳은 것인가 에 대해서 회의를 개최했다. 프랑스 중앙 정부는 군대를 파견했는데 도착한 군대는 시민들을 거리에서 쫓아냈고 이 와중에 발포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결국 시민들은 인근 건물로 올라가서 군인들에게 기왓장을 던지면서 대항했고 결국 군대가 물러났으며 회의가 개최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사건이었다.

이런 대혁명의 중요한 사건에 베르나도트가 있었지만 그는 사실상 장교가 되는 1792년이 되어서야 "자유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으며 이전에는 그는 그냥 명령에 충실한 군인일 뿐이었다.


기왓장의 날


이후 베르나도트가 속한 연대는 혁명의 해인 1789년 마르세유로 옮겨가게 된다. 이때 베르나도트는 자신의 미래의 장인과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 숙박할 곳이 부족했기에 베르나도트의 연대장은 베르나도트에게 한 마르세유 상인의 집에서 머물라고 명령을 내리게 된다. 당시 이런 일은 흔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 집이 바로 프랑수아 클라리의 집으로 프랑수아 클라리는 베르나도트의 아내인 데지레 클라리의 아버지였다. 프랑수아 클라리는 귀찮아하면서 "차라리 장교를 보내 달라"라는 편지를 써서 그를 쫓아냈다고 한다. (데지레는 후에 스웨덴에서 자신의 시종장에게 "그때 쫓아낸 인물이 바로 내 남편이자 국왕이 되는 이였지"라고 이야기하고는 했다고 한다.)


이런 에피소드에서 보듯이 혁명이 일어나는 해에도 베르나도트는 동료를 제외한 다른 인물들에게는 그다지 뛰어나지 않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언변과 군인으로써의 능력을 발휘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때쯤 베르나도트는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아서 부사관으로써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계급까지 올랐다. 그는 장교와 병사를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잘 수행했으며 또 뛰어난 검술 실력으로 연대 검술 사범이 되기도 했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면서 프랑스는 혼돈에 휩싸이게 된다. 많은 이들이 공화국을 지지했는데 이런 상황은 군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하지만 베르나도트는 여전히 군인으로써 자신의 의무에 충실했다.

하루는 베르나도트가 다른 이들과 함께 길을 가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삼색기장을 군인들에게도 건네었다고 한다. 베르나도트는 그걸 자신의 칼에 달았다. 그러자 사람들은 베르나도트에게 그의 모자에 있던 흰색 기장을 떼내고 삼색기장으로 바꾸라고 이야기한다.(백색 기장은 국왕의 군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베르나도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고 전해진다.


안되오, 이 흰색기장은 내 사령관이 이것을 떼라고 명령할 때까지 여기에 달려 있어야만 하오. 군인은 당신들이 하는 것처럼 자신의 감정에 따라서는 안되오. 군인은 규율에 복종해야 하오.; 그렇지 않는다면 나라와 당신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소



많은 이들이 국왕의 군대인 정규군을 불신했고 시민들 스스로 참여해서 만든 국민병(la Garde nationale)에 들어가게 된다. 이들은 정규군과 다른 체계였기에 정규군과 마찰을 빚게 되는데 혁명의 와중에서  정규군과 마찰을 빚게 된다. 그리고 베르나도트의 연대장 역시 이런 마찰에 휘말리게 되는데 베르나도트는 이때 다른 부사관들과 함께 연대장이 감금된 시청으로 가서 분노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연대장을 옹호하면서 "법률에 의거한 정당한 재판을 받던지 아니면 자신들의 시신을 넘고 가라"라고 이야기했다. 그의 연설을 들은 사람들은 마음을 진정시켰고 연대장은 무사히 풀려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르세유 사람들의 의도대로 국왕의 군대는 마르세유를 떠나야 했으며 베르나도트 역시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게 된다.


베르나도트는 오래도록 이런 혁명의 개념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혁명이 일어나면서 많은 시스템들이 바뀌었으며 군대 역시 바뀌어가고 있었다. 베르나도트는 장교가 되길 매우 바랬지만 그는 사람들에 의해서 장교를 선출하는 것을 처음에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후에야 장교가 되는 선거에 나가게 되지만 장교로 선출되지 못했다. 장교가 되지 못한 베르나도트는 "삶은 끝났다"라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결국 1792년에서야 소위로 선출될 수 있었다. 하지만 베르나도트는 장교직을 승인받기 전, 전쟁장관에 의해서 다른 연대의 중위로 임명되게 된다. 프랑스는 이제 혁명을 반대하는 외국 세력과 전쟁을 하려 하고 있었고 귀족 출신의 장교들이 이탈한 자리에 많은 부사관들이 채워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베르나도트는 거의 11년간 사병으로 복무했으며, 사병으로 거칠 수 있는 거의 모든 계급을 다 거쳐서 부사관이 된 후 장교가 되었다. 많은 나폴레옹의 육군 원수들 중 베르나도트보다 오랜 기간 사병으로 복무했던 사람은 단지 두 사람 밖에 없었다.  그리고 베르나도트 역시 사병으로 시작한 자신의 군 생활에 대해서  자랑스러워했으며, 특히나 스웨덴의 국왕이 된 후에는 자주 사병이었을 때를 회상하는 것을 좋아했다.


1792년 4월 베르나도트는 제 36연대 (앙주 연대)의 중위가 되었고, 이것은 그의 화려한 경력의 출발점이 된다.


베르나도트 17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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