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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Sep 10. 2015

베르나도트 : 프랑스에서의 삶(4)

1792-1794

베르나도트가 36연대의 장교로 부임하게 된 것은 1792년 프랑스의 대 오스트리아 선전포고와 무관하지 않다. 이 선전포고야 말로 이후 나폴레옹 전쟁으로 이어지면서 20년 이상 유럽을 전쟁으로 몰고 가게 되는 프랑스 혁명 전쟁의 시작인 것이었다.


베르나도트 같은 군인들이 화려한 경력을 쌓으면서 출세할 기회를 제공한 이 전쟁의 배경은 대외적인 것뿐만 아니라 프랑스 국내 상황도 한몫했다. 프랑스는 혁명의 에너지를 국외로 돌리고 싶어 했고, 이에 프랑스의 천연경계론을 주장한다. 바다, 라인강, 피레네 산맥, 알프스 산맥으로 구성되는 천연경계야 말로 진정한 프랑스의 국경이며, 이 국경 안에 있는 외국 세력을 몰아내는 것은 프랑스의 주권을 수호하는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이 주장은 프랑스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고, 이후 벌어지는 전쟁에 대해서 프랑스 사람들은 "천박한"영토전쟁이 아닌 프랑스의 주권을 지키는 "명예로운 전쟁"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며 더 나아가서는 혁명을 수호하고 널리 퍼트리는 전쟁이라는 관념으로 발전하게 된다.

한편 유럽의 다른 군주들은 프랑스의 혁명 사상이 유럽으로 확산되어서 자신의 나라에서도 혁명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에 혁명 사상의 전파를 막기 위해 전쟁을 할 각오가 되어있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맞물리면서, 프랑스의 혁명 전쟁은 오래도록 지속되는 국제 전쟁이 된다.


전쟁 상황은 프랑스에 유리하게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파리와 가까운 북부전선은 오스테리아령 네덜란드로 알려지게 되는 지금의 벨기에 지방이었다. 수도의 안전을 위해 이곳을 가장 먼저 공격했지만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하지만 프로이센의 침공을 막아낸 발미전투 이후 프랑스는 다시 대외전쟁에 대한 힘을 얻게 된다.


베르나도트는 이 전쟁에서 하급 장교로 라인방면의 전투에 배속된다. 장교가 된 베르나도트의 첫 사령관은 라인군 총 사령관이었던 퀴스틴 장군이었다. 퀴스틴 장군은 귀족 출신으로 미국 독립전쟁에도 참가했었다. 그는 라인군의 총 사령관이 되었고, 천연경계가 되는 라인지방을 점령하려 하고 있었다.

퀴스틴의 첫 번째 전투는 처음에는 성공적이었다. 그는 슈파이어, 홀름스, 마인츠를 장악했고, 라인강의 경계까지 나갔다. 하지만 프랑크푸르트 기습공격에 실패했다. 하지만 의회는 그의 승리에 환호했으며, 그를 "게르마니쿠스"라고 부를 정도였다. 이때 베르나도트는 하급장교로 전투에 참가했고, 전투에 임하면서 늘 꿈꾸던 지휘권을 가지는 장교가 되는 열망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베르나도트는 빙엔의 수비대대 참모장교로 발령받았고 1793년 독일의 반격 전까지 그곳에서 임무를 수행했다.


1793년 초 국왕인 루이 16세가 길로틴에서 처형당했다. 하지만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 전선에서 하급장교로 생활하던 베르나도트에게는 큰 관심거리가 되지 못했다. 그에게는 당면한 전투가 더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르나도트는 이때쯤 자신의 지위를 제한하던 신분제를 풀어준 혁명에 고마워했으며, 혁명의 이념인 자유주의에 대해 새롭게 알고 이를 신봉하게 된다. 결국 베르나도트는 이런 기회를 준 공화국 자체를 지지했지만, 파리의 정치상황에는 무관심을 뿐 아니라 참여할 기회조차 없었다.


1793년 봄 독일은 프랑스에 반격을 시도했고, 프랑스는 다시 라인지방에서 후퇴해야 했다. 이전에 점령했던 도시들 중 두개는 다시 독일에 빼앗겼으며, 마인츠는 포위당한 채 농성 중이었다. 프랑스군은 이 마인츠를 구원하는 것이 가장 시급했다. 퀴스틴 장군은 마인츠를 구원하기 위해 5월 17일 기습공격을 감행하지만 실패했다. 이 전투에서 베르나도트는 처음으로 군대를 지휘할 기회를 얻었게 된다. 그리고 그는 형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때 상황을 적고 있다.


전장에서 다른 이들이 자신의 목숨을 구하려 하는 동안, 저는 이 굴욕적 광경에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군율을 바로잡으려는 어떤 장교도 찾아볼 수 없었기에, 저는 이 무질서한 대대 한복판으로 갔습니다. 저는 소리치고, 화를 내고, 애원하고, 지휘를 했습니다.  소란스러움과 혼란이 너무나 컸기에 병사들은 제 말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수많은 머스킷 총성을 들었고, 전 이중 일부라도 방향을 바꾸게 하려고 제 칼끝으로 방향을 가리켰습니다. 저는 이제 최전선이 되어버린 대대 뒤편으로 달려갔습니다. 제 말은 지쳐버렸지만, 전 제 위치를 유지했고, 병사들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여기가 재 집결지이다. 여러분은 스스로 이곳까지 도망쳤다. 하지만 더 이상 후퇴는 없다. 나는 여러분이 자기 위치를 지킬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여러분들의 방패는 어려 분의 총검과 용기이다.  다른 이들에게 전투에서 비겁하게 도망치면서 자유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라고 하자. 하지만 우리는, 가능하다면, 우리 위치에서 총을 쏘며 죽음을 택하자! "공화국만세(Vive la Republique), 프랑스 만세(vive la Nation)"  다시 모이자, 전우여, 그 용병들(hired slaves, 역자주 :아무래도 자기네는 공화국이라서 내가 주인인 나라를 지킨다는 의미고, 독일 병사들은 국왕에 고용된 병사라는 의미인듯해요.) 에 대항해서 앞으로 나가자. 정복자를 무너뜨리기 위해 우리가 나아간다면, 우리를 패배시키기는 힘들것이다."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한 것은 순식간이었습니다. 제 소리를 들은 병사 몇몇이 이렇게 외쳤습니다. '저 adjustant-major를 따라 적을 향해 돌진하자" 전 그들에게 전투명령을 내렸고, 혼란을 수습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제 뒤로 있던 다른 여섯 개의 대대에도 영향을 줬습니다. 저는 포병을 다시 자기 위치로 돌아오게 했고, 포를 쏘도록 명령을 했습니다. 적들은 감히 추격할 엄두를 못 냈고 고요가 찾아왔습니다. 실패가 예상된 반격이었지만, 저희는 전장에서 버텼습니다. 적들은 엄청난 손실을 입었고, 저희도 그랬습니다. 18개의 그룹이 분할 없이 바이센부르크로 회군했습니다. 모든 장교들이 제 용기와 성공에 축하해줬습니다. 병사들은 저에게 열성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여기서 끝입니다. 왜냐면 누구도 총사령관에게 제 행동을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급장교의 행동은 종종 알려지지 않는 반면, 지휘관들의 실수는 큰 공으로 무마됩니다. 하지만, 이 설명에서 처럼, 전 공화국에 대해서 여전히 헌신적으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공화국은 제가 헌신하는 곳이니까요. 안녕히 계십시오. 어머니께 포옹해주십시오.



그의 말처럼 공식문서에는 베르나도트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베르나도트는 이에 낙담하지만 그의 부대 사람들은 베르나도트의 능력을 잊지 않았고, 그를 대대를 지휘할 수 있는 대위 계급으로 선출해줌으로써 그의 행위에 보답했다.

이 전투의 실패로 퀴스틴 장군은 라인군에서 북부군으로 이동하게 된다. 당통이 그를 후원했기에 처음에는 무사했지만, 당통의 실각 후 퀴스틴 역시 체포되어 길로틴형을 받았다. 퀴스틴에 대한 사형 언도는 이후 계속 벌어지는 장군들에 대한 부당한 처형 중 하나일 뿐이었다.  


퀴스틴



퀴스틴의 후임으로 온 사람은 바로 알렉상드르 드 보아르네 장군이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다시피 그는 유명한 조제핀 드 보아르네의 첫 번째 남편이었다. 그 역시 귀족 출신으로 잘 교육받고 훈련받은 군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전장에 뛰어드는 열정이 없었으며, 모든 것을 한눈에 꿰뚫어보는 통찰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이었다. 마인츠를 구원하기 위한 그의 공격은 실패했고, 말을 잡아먹으면서까지 버티던 마인츠 수비대는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마인츠의 수비 사령관은 클레베르였다.) 알렉상드르 드 보아르네 역시 이 일을 용서받지 못했고, 후에 길로틴형을 받게 된다.  


알렉상드르 드 보아르네



보아르네 장군의 실패가 거의 확실해질 무렵, 베르나도트의 36연대는 북부군에 재배치된다. 이곳의 총사령관은 우샤르 장군이었다. 그는 평민 출신으로 장군이 된 입지적인 사람이었기에 수많은 이들이 그에게 열광했다. 이때 베르나도트는 연대 투표에 의해서 중령으로 선출되었다. 우샤르 장군은 됭케르크를 원조하기 위해 군대를 이동했고, 9월 4일 이제르강에서 적과 만난다. 이후 며칠 동안 전투가 계속되었고 프랑스는 승리를 거둔다. 이 전투가 바로 옹드스코트 전투였다. 베르나도트 역시 이 전투에 참여했다.

하지만 우샤르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동맹군이 세 곳의 수비대를 전멸시켰기 때문이었다. 우샤르는 이 때문에 소환되었고, 반역자라는 이름으로 길로틴 형을 당했다. 혁명재판소의 재판관 중 한 명이 우샤르에게 비겁자라고 하자, 우샤르는 칼에 베인 흉터 세개가 있는 가슴을 보이면서 "보시오 이것이 내 대답이오"라고 했다고 한다. 우샤르의 처형이야 말로 이 시기 가장 말도 안 되는 사건중 하나였다.  


우샤르, 그의 얼굴이 비대칭인것은 전투중 얼굴에 총상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북부군은 주르당이 맡게 되었다. 그는 장군보다 현장 지휘관이 더 맞다고 생각했지만 총 사령관직을 거절한다면 반역으로 여겨질 것이기에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1793년 10월 주르당은 와티니 전투에서 승리했고, 자신의 승리에 대해서 무척이나 겸손한 행동을 취했기에 길로틴형을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수도에서는 수많은 이들이 길로틴형을 피할 수 없었다. 불안정한 북부 전선 상황은 수도 파리가 공격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을 조성했으며 사람들은 국가의 적을 처단한다는 공포정치의 생각에 맹목적으로 따르게 된다. 10월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당했으며 11월에는 수많은 지롱드 당원과 귀족들이 처형당했다.

이런 끔찍한 프랑스 혁명의 범죄는 후에 혁명을 통해서 출세한 수많은 이들에 대한 편견을 심어주게 된다. 하지만  베르나도트와 같은 이들에게 공포정치기의 책임을 물을 수는 없을 것이다. 파리에서의 정치 상황은 멀리 떨어진 전선에서 복무 중인 군인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이었고, 그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명예롭게 싸운 것이지 권력을 위해 파리에서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길로틴으로 향하는 마리 앙투아네트


1794년이 되자 베르나도트는 드디어 원하던 연대를 지휘할 수 있는 계급이 된다. 혁명정부는 프랑스 군을 개편했으며, 이때 준 여단이라고 불리는 체제를 도입했다. 베르나도트는 이 새롭게 창설된 준여단들 중 제 71 준여단의 대령으로 승진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상브르 강을 장악하고 있던 아르덴 군과 합류하라는 명을 받았다.

이곳에서 베르나도트는 자신의 능력을 알아주는 두 명의 장군을 만나게 된다. 바로 클레베르와 마르소였다.


클레베르는 이전 마인츠를 수비하던 수비대 사령관이었다. 그는 마인츠가 함락당한 후, 방데 내전지역으로 배속받았었다. 그는 매우 뛰어난 군인으로 카리스마로 부하들을 사로 잡았고, 군의 영웅 역할에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후에 나폴레옹은 클레베르에 대해서 "군복을 입은 마르스신"이라고 부르며, "그가 전장에 있는 것보다 더 좋은 징조는 없다."라고 할 정도였다.  마르소는 방데 내전에서 이름을 날린 사람이었다. 그는 "오슈(역자주: 방데 내전에 이름을 날린 장군)와 함께 뛰어난 지휘관으로 명성이 높았고, 또 그는 명예롭고 관대한 사람으로 유명했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마르소와 클레베르는 방데 내전에 함께 싸웠지만, 둘은 기질과 나이차가 컸기에 처음에는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둘은 서로의 장점을 알게 되고 무척이나 친해졌다.

베르나도트는 이 두 명의 뛰어난 장군들과 친해졌고, 후에 이것은 우정으로 바뀌었다. 특히 클레베르는 베르나도트를 무척이나 신뢰했는데 베르나도트의 능력을 높게 평가했으며, 언제나 그를 선봉에 앞세웠다.  

클레베르, "군복을 입은 마르스"


프랑수아 세브앙 마르소-드그라비에, 마르소 장군


이 시기 베르나도트 역시 공포정치의 위험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베르나도트는 공안위원회의 하부기관인 국민의 대표자가 군에 머무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이 때문에 베르나도트는 자신의 지위를 잃을뻔한다. 파리에서 체포 명령이 내려졌지만,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이었기에 일단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전투에서 반란을 일으키려는 병사들을 진정시키고, 혼란에 빠진 군대를 재정비해서 무사히 퇴각시겼다. 이 때문에 그에 대한 체포 명령이 취소될 수 있었다.

베르나도트가 장군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프랑스 공화국에 영광을 가져다준 승리인 플뢰리스 전투였다. 여기서 베르나도트는 큰 활약을 했고, 베르나도트의 상관이었던 클레베르는 보고서에 베르나도트의 업적을 이야기하면서 그를 "장군"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보고서가 쓰인 3일 후 베르나도트는 장군이 된다.

국민 공회는 영광을 가져다준 플뢰리스 전투를 치른 상브르 근처의 아르덴과 북부군에게 "상브르와 뫼즈 군"이라는 칭호를 준다. 이 부대의 칭호는 프랑스 사람들에게 자부심을 갖게 만드는 것이었다.  

플뢰리스 전투


이제 베르나도트는 "상브르와 뫼즈 군"의 장군이 된다.


그림출처

위키 피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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