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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Jan 05. 2018

마리앙투아네트는 왜 죽음을 맞이했을까?프랑스대혁명(2)

혁명의 전개 : 공포정치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죽음

비록 혁명이 일어나긴 했지만, 이런 변화가 국민들의 경제적 문제까지 해결해주지는 못했다. 기댈 곳 없는 사람들은 국왕 루이 16세를 찾아갔다. 이들은 베르사유로 몰려가 국왕이 파리로 돌아가서 혼란을 수습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러나 자신들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베르사유궁전에 난입해 루이 16세와 그 가족들을 포위하고,파리로 데리고 갔다.   


국왕과 가족들을 향한 위협이 점점커지자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남편을 설득해 함께 프랑스를 빠져나가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국왕 일가는 새벽에 튈르리궁전Palais des Tuileries을 탈출해 마차를 타고 국경으로 달렸으나 불운하게도 국경 근방의 바렌에서 발각되고 말았다. 훗날 ‘바렌의 도주La fuite à Varennes’라고 알려지게 되는 이 사건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국왕 부부는 다시 잡혀서 파리로 돌아갔다. 이제 국민들은 왕에게 거의 등을 돌렸다. 


바렌에서 붙잡혀 파리로 되돌아 가고 있는 프랑스 왕실 가족들



‘바렌의 도주’ 사건으로 유럽의 여러 군주들은 친척인 프랑스 국왕 부부의 운명을 걱정함과 동시에, 혁명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갈까 두려워하게 되었다. 결국 1791년 8월 27일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Friedrich Wilhelm II와 신성로마제국의 국왕 레오폴트 2세의 이름으로 발표된 필니츠 선언Declaration of Pillnitz은 ‘두 국가가 프랑스에서의 상황을 우려하고 있으며 국왕 부부의 안전을 보장하기를 바란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위협적이기는 했지만 구체적인 선전포고는 아니었다. 하지만 격앙되어 있던 프랑스에서는 이것을 매우 심각한 일로 받아들였다. 


1792년 4월 20일, 프랑스는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국왕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당시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국왕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조카였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란츠 2세Franz II였다. 이후 4월 29일에는 현재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지역을 통치하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언니와 형부가, 7월 5일에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조카인 황제 프란츠 2세가 프랑스를 향해 선전포고를 하자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국민의 적개심은 더욱 불타올랐다. 프랑스의 적들 대부분이 왕비의 친척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랑스는 먼저 전쟁을 시작했음에도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지 못했으며, 도리어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전쟁을 하는 바람에 거듭 패배했다. 이런 상황은 국민들에게 실망과 분노를 안겨주었다. 게다가 이 전쟁으로 인해 프랑스의 경제적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인플레이션이 극심해졌고 이전에도 먹고살기 힘들었던 사람들이 벼랑 끝까지 몰렸다. 극도로 자극받은 국민들이 타깃으로 삼은 사람은 바로 국왕 부부였다. 군중들은 1792년 8월 10일, 튈르리궁으로 몰려갔다.   


루이 16세와 가족들은 간신히 목숨만 부지해 탈출했으나 곧 체포되었다. 한때 사람들이 우러러보던 국왕 루이 16세는 왕정 폐지 후 그저 루이 카페라는 사람이 되었고, 외국 세력과 내통했다는 죄목으로 재판정에 섰다. 그는 모든 상황을 부인했으나 표결 결과는 사형이었다. 1793년 1월 21일, 루이 16세는 단두대 앞에 섰다.  


그는 죽기 전 군중들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으며, 자신의 피가 프랑스에 되돌아가지 않기를 기도하겠다고 말했다. 비록 자신이 통치하던 백성들의 손에 죽음을 당하게 되었지만, 프랑스에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은 원치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루이 16세의 의연한 태도와 연설에 국민의 마음이 돌아설 것을 우려했던 국민방위대 장군은 드럼을 크게 쳐서 그의 말이 들리지 않게 했다고 전해진다. 프랑스 국민들은 루이 16세의 처형을 지켜보며 국왕이 더 이상 우러러보는 존재가 아니라 국민에 의해 심판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리고 왕정이 아닌 다른 정치 형태가 존재할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루이 16세의 처형


그렇다면 마리 앙투아네트는 어떻게 되었을까? 어떻게 보면 그녀는 프랑스 내부 파벌 간 권력 투쟁의 희생양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국왕의 처형 이후 공화정을 지지하는 자코뱅파Jacobins가 권력을 쥐게 되면서, 공화정을 정착시키기 위해 공포 정치라는 극단적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그들은 공포 정치의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해 외국인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를 처형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가능성 있는 죄명은 다 가져다 붙였고, 심지어 어린 아들 루이와 근친 관계를 맺었다는 죄목까지 덮어씌웠다. 이때 8살이었던 루이는 학대를 당한 채 법정에 서서 어머니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고 증언했다. 이런 죄목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매우 분개해서 자신에 대한 변호를 했으며, 법정에 있던 많은 여성들이 이 말도 안되는 죄목에 대해 마리 앙투아네트 편이 되었다. 하지만 이미 판결이 결정된것이나 다름 없었기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했다. 


단두대로 향하는 마리 앙투아네트


마리 앙투아네트는 결국 정치적인 목적으로 희생된 것이었다. 하지만 혁명의 혼란한 상황에서 정치적 목적으로 희생된 사람이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음이 아니었으며 끝도 아니었다.

마리 앙투아네트, 모슬린 천으로 된 옷을 입은 모습,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런 소박한 옷을 더 좋아했는데 궁정에서는 이런 왕비의 모습을 보고 왕비가 속옷만 입었다고 쑥덕댔다고 ...


그림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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