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실리아 구스타프스도테르 바사의 스캔들
구스타프 바사에게는 살아서 성인으로 성장한 자녀들이 모두 아홉 명이 있었습니다. 그중 아들은 넷이었고 딸이 다섯이었죠. 이렇게 자녀들이 많다 보니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날 없다"라는 속담처럼 속 썩이는 자식들이 나오게 되죠.
먼저 장남인 에릭과 차남인 요한이 서로 앙숙이 되면서 구스타프 바사의 머리를 아프게 합니다.
하지만 지금 이야기할 것은 이 두 이복형제의 이야기가 아니라 구스타프 바사의 자녀 중 가장 문제아였던 세실리아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세실리아 구스타프스도테르 바사는 구스타프 1세와 그의 두 번째 부인인 마르가레타의 둘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매우 허약했었지만 자라면서 건강해졌고 매우 아름다워졌으며 활달한 성격을 가지게 됩니다. 아마도 세실리아의 성격은 매우 독립적이었을 것 같습니다. 왜냐면 가족들은 그녀를 "검은 양"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왜냐면 세실리아가 다른 사람의 주장에 자주 반대되는 의견을 이야기했기 때문이었죠. 다시 말해서 집안에 사고 치는 딸이었던 것이죠. 그리고 세실리아는 대형 사고를 치게 됩니다.
구스타프 1세는 스웨덴을 위해 자녀들을 정략 결혼시키려 합니다. 그래서 이리저리 동맹이 될만한 사윗감들을 물색하게 되죠. 게다가 구스타프 1세에게는 다섯 명이나 되는 딸이 있었으니 동맹자만 찾는다면 결혼동맹은 쉽사리 이뤄질 것이었습니다. 구스타프 1세는 딸들을 시집 보내기 위해 딸들에게 혼수로 엄청난 재산을 줬으며 또 수많은 왕가에 딸들의 초상화를 보냈었죠. 이런 행동은 대부분 딸들을 좋은 조건에 시집 보내기 위해서 하는 전통적 행동이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스웨덴이 당시에는 강대국이 아니었으며 바사가문의 여성들이 스웨덴 공주라는 지위만으로 좋은 동맹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의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곧 스웨덴의 공주들과 그녀들의 지참금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결혼 협상의 결과 1558년 오스트프리슬란트 백작인 에드자르트 2세가 스웨덴으로 오게 되죠. 오스트프리슬란트는 대충 현재 니더작센의 해안지방이라고 합니다. 에드자르트는 구스타프 1세의 큰딸인 카타리나와 결혼하기로 결정합니다. 에드자르트의 어머니는 오스트프리슬란트에 스웨덴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했습니다만 어쨌든 엄청난 지참금은 그것을 만회할만한 것이었던듯합니다.
1559년 10월 오스트프리슬란트 백작과 구스타프의 큰딸인 카타리나의 결혼식이 스톡홀름에서 열렸습니다. 결혼식 후 카타리나는 남편과 함께 스웨덴을 관통하는 육로로 오스트프리슬란트를 향해 떠나게 되죠. 이때 카타리나는 바로 밑의 여동생인 세실리아를 데리고 갔고, 에드자르트는 결혼식에 참석했었던 동생 요한을 데리고 가고 있었죠.
그리고 사건이 터지게 됩니다.
부부가 오스트프리슬란트로 돌아가던 중 카타리나의 동생인 망누스의 궁전이었던 바드스테나 궁전(vadstena slott)에 머물렀습니다. 이때 구스타프 1세는 세실리아와 팔츠-벨덴츠의 게오르그 요한의 결혼협상을 진행 중이었기에 세실리아가 빨리 돌아오길 바랬죠. 또 딸 부부에게 추운 겨울 동안 여행하지 말고 잠시 스웨덴에 머물라고 이야기했고 망누스에게 잠시 둘의 출발을 지연시키라고 이야기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와중에 사건이 터지게 되죠.
이 며칠 동안 궁전의 경비원이 한 남자가 세실리아의 방 창문을 통해 벽을 기어오르는 것을 목격합니다. 몇 번 더 목격한 뒤 결국 카타리나와 세실리아의 오빠인 에릭 왕자에게 이 사실을 보고합니다. 에릭은 동생인 망누스와 궁정 조신들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물었으며 결국 그들은 그 남자를 현장에서 잡기로 하죠.
또 남자가 세실리아의 방으로 간 것을 목격한 뒤 에릭은 신하에게 세실리아의 방으로 들어가 그 남자를 체포하게 합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이 밝혀지죠. 세실리아의 방에서 발견된 남자는 카타리나의 시동생인 오스트프리슬란트의 요한이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요한은 바지를 입고 있지 않았었죠. 미혼의 남녀가 한밤중에 은밀히 단둘이 있는 것 자체로도 문제였는데 남자가 바지까지 입고 있지 않았으니 대형 스캔들이었죠. 이 사건은 "바드스테나 날벼락 Vadstenabullret"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에릭은 요한을 일단 감금하고 곧 아버지인 구스타프 1세에게 보냅니다. 구스타프 1세는 요한을 감옥에 가둡니다. 그리고 딸 부부를 다른 성으로 보서네 가택연금시킵니다. 그리고 에릭과 세실리아는 스톡홀름으로 소환됩니다.
스톡홀름에 돌아온 세실리아는 아버지가 자신을 때리고 머리를 밀어버렸다고 아버지를 비난합니다. 구스타프 1세는 이 사건에 매우 큰 충격을 받았는데 왕비인 카타리나 스텐보크에게 이 이야기를 말하면서 울었다고 합니다. 국왕은 이 사건에 대해서 동생을 잘 돌보지 않은 장남 에릭과 장녀 카타리나를 비난했습니다. 또 스캔들 내용 전체가 공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요한을 체포한 신하를 감옥에 가두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은 해결되는데 오래 걸리게 되는데 가장 큰 문제는 구스타프 1세가 매우 강경하게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는 큰딸 부부를 6개월이나 가택 연금시킨 후에야 풀어줬고 오스트프리슬란트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이동안 카타리나는 일을 원만하게 해결하기 위해 새어머니이자 사촌이었던 카타리나 스텐보크에게 중재를 요청했었다고 합니다. 또 카타리나의 시어머니이자 요한의 어머니는 매우 강인한 인물로 아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노력했었죠. 에릭은 세실리아와 요한이 결혼하는 것만이 최선의 길이라고 이야기합니다만 구스타프 1세는 둘의 결혼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사실 원만한 해결은 사고 친 두 남녀가 결혼하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방법이었는데. 구스타프 1세가 왜 이 방법을 거부했는지는 잘 모른다고 합니다. 아마도 어쩌면 둘을 결혼시키 것이야말로 스캔들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일 수도 있을듯합니다.
결국 요한은 풀려나게 됩니다만, 스웨덴 국왕과 왕실 가족 그리고 의회가 보는 앞에서 자신과 세실리아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맹세하도록 강요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왕자들은 성경에 나오는 "목욕하는 수산나"의 이미지를 새긴 동전을 배포함으로써 세실리아가 결백하다는 것을 널리 알리려 했다고 합니다.
이 사건으로 세실리아는 원래 진행하던 혼담이 깨지게 됩니다. 세실리아와 결혼하려던 벨덴츠 백작은 세실리아의 스캔들을 알고는 그녀가 아닌 세실리아의 여동생과 결혼한 것이었죠.
아마도 늙은 구스타프 1세에게 둘째 딸의 스캔들은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스캔들이 해결된 것이 1560년 6월 무렵이었는데 구스타프 1세는 1560년 9월에 사망하게 되죠.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