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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May 15. 2019

벨라스케스가 그린 사람들(11)

벨라스케스의 초상화 : 에스파냐의 펠리페 4세(1605-1665)

벨라스케스가 그린 인물로 빼놓은 수 없는 인물은 바로 벨라스케스를 가장 총애했던 국왕이었던 에스파냐의 국왕 펠리페 4세입니다. 그는 벨라스케스에게 왕실 가족들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을 뿐만 아니라 외교관으로도 활동할수 있게 했던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펠리페 4세는 에스파냐의 펠리페 3세와 그의 아내인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펠리페 4세가 에스파냐를 통치한 시기는 사실 유럽의 다른 나라들 특히 경쟁관계였던 프랑스에 비해서 좀더 쇠락하는 분위기 였습니다. 프랑스가 30년 전쟁을 통해서 이득을 봤다면 에스파냐는 30년 전쟁을 통해서 결국 네덜란드쪽을 완전히 상실했으며 또 포르투갈 역시 독립을 했던 시기였습니다. 물론 에스파냐는 오래도록 강대국에 거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기에 여전히 버틸 여력이 있었습니다. 그결과 펠리페 4세는 그의 정책보다는 예술의 후원자로 더 유명하게 됩니다. 벨라스케스를 비롯한 많은 화가들을 후원해서 수많은 그림들을 그리게 했으며 수많은 왕궁과 수도원 교회등을 수리하고 보수하고 증축하는 일을 했었습니다.


펠리페 4세, 1623년, 디에고 벨라스케스


펠리페 4세는 두번의 결혼을 했습니다. 첫번째 결혼은 프랑스와의 평화를 위해서 결혼한것으로 그의 누나인 아나는 프랑스의 루이 13세와 결혼했으며, 펠리페 4세는 루이 13세의 여동생이었던 프랑스의 엘리자베트와결혼한 것이었죠. 엘리자베스와의 관계는 그리 가까운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아마도 그와 엘리자베트의 관계는 그의 누나인 아나와 루이 13세와의 관계와 비슷했을 듯합니다. 


갑옷을 입은 펠리페 4세, 1628년, 디에고 벨라스케스
 펠리페 4세, 1628년, 디에고 벨라스케스


프랑스의 엘리자베트와의 사이에서 여러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아들인 발타자르 카를로스와 딸인 마리아 테레사 둘만이 살아남게 됩니다. 그리고 펠리페 4세는 자상한 아버지였기에 아이들에게 잘 대해줬었는데 후계자인 아들 발타자르 카를로스가 사망했을때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펠리페 4세의 기마 초상화, 1635년, 디에고 벨라스케스, 이 초상화는 다섯개의 시리즈 초상화중 하나였습니다.


아들이 죽고 아내마저 사망했기에 그는 다시 결혼하게 됩니다. 서둘러 결혼한 이유는 아마도 후계자 문제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가 된 사람은 그의 조카였던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였습니다. 원래 마리아나는 발타자르 카를로스와 결혼할 예정이었지만 그가 갑작스럽게 죽었으며, 펠리페 4세 역시 아내를 잃게되자 에스파냐와 오스트리아간의 동맹을 더욱더 확고히 하기 위해서 마리아나는 외삼촌인 펠리페 4세와 결혼한 것이었습니다. 


갈색과 은색을 입은 펠리페 4세, 1635년, 디에고 벨라스케스


펠리페 4세는 마리아나와의 사이에서 여러 아이를 낳았는데 영유아기를 넘긴 자녀는 딸인 마르가리타 테레사와 아들인 카를로스 둘밖에 없었습니다. 마르가리타 테레사는 후에 자신의 외삼촌인 황제 레오폴트 1세와 결혼했으며 카를로스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에스파냐의 국왕 카를로스 2세가 됩니다. 펠리페 4세는 카를로스가 4살때 사망했으며 그의 왕비였던 마리아나는 아들의 섭정이 되었다고 합니다. 

펠리페 4세의 아들인 카를로스 2세는 후손을 얻지 못했으며, 결국 에스파냐 왕위는 프랑스로 시집간 딸 마리아 테레사의 손자인 앙주 공작 필리프(에스파냐의 국왕 펠리페 5세)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프라가에서의 펠리페 4세, 1644년, 디에고 벨라스케스

그림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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