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역사 이야기 : 팔츠의 조피와 팔츠-지메른의 베네딕트 앙리에트
후에 영국의 조지 1세의 어머니가 되는 팔츠의 조피는 팔츠의 선제후이자 후에 잠시 보헤미아의 국왕이 되는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와 그의 아내이자 영국의 공주였던 엘리자베스 스튜어트의 막내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부모는 30년 전쟁의 시작이 되는 사건중 하나인 보헤미아 문제에 관여했다가 영지를 잃고 쫓겨나서 오래도록 네덜란드에서 망명생활을 해야했었습니다. 그리고 조피의 오빠인 카를 1세 루드비히는 30년 전쟁이 끝나고 나서 팔츠 선제후령의 일부라도 다시 되찾을수 있었습니다.
조피는 한때 사촌인 찰스 2세의 신붓감으로 여겨지기도 했었지만 혼담은 곧 깨졌으며 집으로 돌아가 이혼한 오빠의 자녀들을 돌봐주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대에는 노처녀라고 여겨질만한 나이였던 26살에 혼담이 들어오게 됩니다. 상대는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 게오르그 빌헬름으로 조피보다 여섯살이 많은 나이였는데 그의 형이자 후계자였던 크리스티안 루드비히가 결혼후에도 자녀를 얻지 못햇기에 결혼하라는 압박을 받고서 적당한 혼처를 찾은 것일 듯합니다. 하지만 조피와 게오르그 빌헬름의 결혼은 성사되지 않습니다. 왜냐면 게오르그 빌헬름이 조피와 결혼하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이미 나라간의 혼담이 성사된 문제였기에 결국 게오르그 빌헬름은 막내동생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에게 조피와 결혼하라고 이야기하죠. 대신 그는 미혼으로 남아서 그의 재산을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와 조피의 자녀들에게 물려주겠다는 서약을 합니다. 그러면 조피는 손해나는 것이 없으며 막내아들이었던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역시 자녀들에게 물려줄 영지와 재산을 갖게 되는 것이었죠. 이렇게 조피는 원래 남편감이 아니라 시동생이 될수도 있었던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와 결혼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조피의 시아주버니들은 남성후계자를 얻지 못합니다. 반면 조피와 결혼했던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아내와의 사이에서 많은 아들들을 얻고 있었습니다. 이때문에 누가 봐도 그가 결국 가문의 영지를 이어받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의 큰형이자 아버지의 주된 영지를 물려받았던 크리스티안 루드비히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상황은 점차 더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에게 유리하게 됩니다. 크리스티안 루드비히 다음으로 영지를 물려받을 인물이 바로 조피와 결혼을 깼던 게오르그 빌헬름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게오르그 빌헬름의 영지는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의 후손이 물려받을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게오르그 빌헬름의 동생이자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의 형이었던 요한 프리드리히는 순순히 이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형의 영지를 자신도 나눠서 물려받아야한다고 주장하게 되죠. 결국 형제들간에 또 영지를 조정해서 상속하게 됩니다. 하지만 40살이 되도록 요한 루드비히는 미혼이었기에 그가 계속 결혼하지 않고 있는다면 결국 그 영지 역시 다시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와 그 후손들에게 돌아갈 것이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서 당연히 이익을 위해 개입하는 사람들이 있게 됩니다. 바로 안나 곤차가였습니다. 안나 곤차가는 조피의 오빠였던 팔츠-지메른의 에두아르트의 아내였습니다. 에두아르트는 가족이 망명하고 힘들게 살던 시절 프랑스로 갔으며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프랑스 궁정에서 영향력 있던 여성이었던 안나 곤차가와 결혼햇었습니다. (아들이 개종했다는 소식에 조피의 어머니였던 엘리자베스 스튜어트는 매우 화를 냈다고 합니다.)
안나 곤차가는 막내딸인 베네딕트 앙리에트를 요한 프리드리히의 신붓감으로 밀게 됩니다. 아마도 딸이 요한 루드비히와 결혼해서 후계자를 낳는다면 그의 영지를 이어받을수 있을 것이라 여겼을 것입니다. 게다가 딸이 군주의 아내가 되는 것이니 더할수 없이 좋은 일이기도 했죠. ( 안나가 관여한 또 다른 결혼은 루이 14세의 동생이었던 오를레앙 공작의 재혼문제였습니다. 여기서도 그녀는 자신의 시조카였던 팔츠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테-리젤로트-를 신붓감으로 추천합니다. 이것 역시 가문의 이익이 될 것임을 설득시켜서 결혼시킨것이라고 합니다.)
결국 1668년 16살의 팔츠의 베네딕트 앙리에트는 아버지 또래였던 43살의 요한 프리드리히와 결혼했습니다. 이렇게 조피는 조카였던 베네딕트 앙리에트를 손윗동서로 맞이해야했습니다.
뒷이야기
베네딕트 앙리에트는 요한 프리드리히와의 사이에서 네명의 아이를 낳았습니다만 아이들 모두 딸이었으며 결국 1679년 요한 프리드리히가 죽은뒤 그의 영지는 조피의 남편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에게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전의 서약때문에 또다른 형인 게오르그 빌헬름의 영지도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에게 돌아가게 되죠. 그리고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었기에 "하노버의 선제후"지위를 부여받았습니다.
뒷이야기 하나더
베네딕트 앙리에트 역시 제임스 1세의 후손중 하나였으며 심지어 고모인 조키보다도 영국의 왕위계승서열이 높았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가톨릭교도였으며 남편 역시 가톨릭교도였죠. 당시 가톨릭교도나 가톨릭교도와 결혼한 사람들은 왕위계승에서 배제된다는 영국 법률이 있었기에 베네딕트 앙리에트 역시 왕위계승권리를 얻지 못했었습니다. (물론 가톨릭교도들을 넣어서 치면 베네딕트 앙리에트는 한 40번째 정도의 순위긴 했습니다.)
뒷이야기 또 하나더
베네딕트 앙리에트는 남편이 죽은뒤 프랑스로 돌아가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네딸중 세딸이 성인으로 성장했는데 그중 막내딸인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 빌헬미네 아말리는 황제 요제프 1세와 결혼해서 신성로마제국의 황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남편과의 사이에서 남성후계자를 얻지 못했고 황위는 시동생인 카를 6세에게 돌아갑니다만 카를 6세 역시 남성후계자를 두지 못했기에 결국 자신의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모든것을 물려줬습니다. 그리고 빌헬미네 아말리는 이에 대해서 반발했었다고 합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