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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Oct 07. 2019

남편을 죽였지만 무죄판결을 받아내다! 어떻게??

가벼운 역사이야기 : 마르거리트 마리 알리베르 - 완전범죄를 꿈꿨나?

1923년 7월 10일 새벽, 런던의 사보이 호텔에서는 세발의 총성이 울려퍼지게 됩니다. 이집트 출신의 사업가였던 알리 파흐미(Ali Fahmy)는 세발의 총알을 맞고서 자신의 침실에 쓰러져있었으며, 그를 쏜 사람은 프랑스 출신의 그의 아내로 파흐미 공비(Princess Fahmy)라고 불렸던 마르거리트였습니다.


파흐미 공비


알리 파흐미는 매우 부유한 사업가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그의 집안은 면화를 수출하는 일을 해서 엄청난 돈을 벌었으며 그의 아버지는 관직에 있는 인물이 아님에도 Bey라는 칭호를 쓸 정도로 이집트에서 영향력있는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알피 파흐미 역시 엄청난 재산을 가진 인물이기도 했었습니다. 그는 프랑스 출신의 이혼녀였던 마담 로랑과 만나서 사랑에 빠졌고 1922년 12월 그녀와 결혼을 합니다. 그리고 마담 로랑은 알리의 종교인 이슬람교로 개종해서 1923년 1월 둘은 이슬람식으로도 결혼식을 올렸엇습니다. 하지만 결혼한지 1년도 되지 않는 시점에서 알리는 아내의 손에 살해당한것입니다.


마르거리트가 남편을 죽인지 2달후인 1923년 9월 10일 마르거리트는 재판정에 서게 됩니다. 그녀는 영국 최고의 변호사를 선임했으며 자신의 행동은 정당방위였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자신을 학대하는 남편에게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그녀의 변호인은 이 사건은 동양인 남편이 이해할수 없을 정도로 서양인인 아내를 학대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게 됩니다. 동시에 알리 파흐미가 괴물이었다는 이야기들이 퍼져나가게 되죠. 결국 재판관은 검찰이 주장한 마르거리트의 죄목에 대해서 모두 무죄를 선고했으며 마르거리트는 석방되었고 파리로 갈수 있었다고 합니다. 무죄로 석방된후 마르거리트는 죽은 남편의 재산을 자신이 상속해야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알리는 유언장을 작성하지 않았고, 또 이집트에 있던 알리의 가족들은 알리를 죽인 그녀가 재산까지 차지하는것을 두고보지만은 않았었습니다.


그녀가 남편을 죽이고 무죄로 석방될수 있었던 것은 변호사가 너무나 뛰어났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녀에게는 비밀의 무기가 있었습니다. 바로 당시 웨일스 공이었던 에드워드 8세와 주고 받은 열정적 편지가 있었죠.


파흐미 공비, 마담 로랑등으로 알려졌으며 웨일스 공 에드워드에게는 "메기 밀러"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었던 마르거리트 마리 알리베르는 프랑스 출신의 코르티잔이었습니다. 코르티잔이라는 것은 일종의 고위층이나 재산이 많은 남성들을 상대하는 여성들을 말했는데 이런 남성들과 다양한 일들을 했었으며 여기에는 매춘등도 포함되어있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매춘만을 하는 여성은 아니기도 했습니다. 이런 여성들과 함께 지내기 위해서는 엄청난 돈이 필요했고 코르티잔들은 이렇게 남성들로부터 수입을 얻어서 돈을 벌었습니다. 그리고 특히 프랑스에서는 이런 코르티잔들이 부를 얻는데 대해서 다른곳에 비해서 관대했었습니다.


마르거리트 마리 알리베르


1차대전이 끝나갈 무렵 웨일스 공은 왕가의 일원으로 파리에 머물고 있었죠. 그리고 이런 그에게 "특별한 선물"을 보낸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선물은 바로 매기 밀러- 마르거리트 알리베르였다. 웨일스 공은 마르거리트에게 곧 빠져들었으며 그는 그녀에게 열렬한 편지들을 보냈었습니다. 둘의 관계는 1920년 경에 끝나지만 마르거리트는 웨일스 공의 열정적 편지를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1923년의 재판에서 마르거리트가 코르티잔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면 아마 그녀가 학대하는 남편을 피하기 위해 정당방위로 그를 죽였다는 이야기의 신뢰도가 떨어질수 있었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졌다면 사람들은 코르티잔이었던 마르거리트가 알리와 결혼한 이유가 돈때문이라고 여겼을 가능성이 있고 그렇다면 그녀가 남편을 죽인 이유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했을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코르티잔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아마도 그녀는 자신이 특별히 간직했던 웨일스 공과의 편지를 공개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웨일스 공에게 치명적인 일이 될것이었습니다. 결국 이런 사정으로 인해서 마르거리트가 코르티잔이라는 사실은 묻히게 되었으며 그녀가 무죄 판결을 받는데 지장이 없게 되었죠.


1차 대전때의 웨일스 공 에드워드 (후에 에드워드 8세)


마르거리트 마리 알리베르는 아마도 알리 파흐미와 돈때문에 결혼한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녀는 이전에 역시 부유한 인물이었던 샤를 로랑이라는 인물과 결혼했었는데 그녀는 결혼생활보다 결혼생활을 정리하는데 더 관심이 많았으며 애초에 그녀와의 결혼을 반대햇던 로랑의 집안에서는 그녀에게 엄청난 위자료를 지급하고 둘이 헤어지도록 했었습니다. 그리고 아마 마르거리트는 알리와의 결혼도 그렇게 끝내고 싶어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알리는 그녀와 이혼하려는 생각이 없었죠. 결국 마르거리트는 이혼해주지 않는 알리에게 불만이 있었고 알리는 아내로써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마르거리트에 불만이 있었을것입니다. 그리고 둘의 불만은 부부싸움으로 이어졌으며 결국은 사보이 호텔의 비극으로 끝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웨일스 공의 편지로 웨일스 공을 협박해서 재판에서 자신의 불리한 증거를 감출후 있었으며,나중에 알리의 유산을 달라고 소송까지 했었죠. 이것은 어쩌면 그녀가 이 모든것을 꾸몄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수 있게 합니다. 그녀는 이혼후 위자료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혼해주지 않는 남편에 화가났고 결국은 이런 남편을 없애고 돈을 차지하겠다는 생각을 한것일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마르거리트는 1977년까지 살다가 사망했습니다. 그녀의 외손자는 마르거리트에 대해서 "적어도 (남편을 죽인것에 대해서) 자랑스러워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남편을 죽인것이 아니냐"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림출처

1. Edward VIII's Murderous Mistress - Marguerite Marie Alibert https://youtu.be/-Rw0t9JrVkI 중 캡쳐

2. 위키 미디어 커먼스


더하기

https://youtu.be/-Rw0t9JrVkI

마르거리트 마리 알리베르에 대한 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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