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역사 이야기 : 루이 르 피우스와 아들들
현재 유럽의 여러 나라들 중 특히 큰 나라들인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는 아주 오래전에 나뉘게 됩니다. 그 근간은 아마도 843년에 맺어진 베르됭 조약일 것입니다. 이 베르됭 조약이 맺어진것에는 복잡한 집안 사정이 있었습니다.
8세기말 현재 서유럽과 중앙유럽 대부분의 지역은 프랑크 왕국으로 묶여있었으며 이곳을 통치한 가문은 바로 카롤링거 왕가였습니다. 특히 9세기 무렵에는 샤를마뉴(카롤루스 대제)가 서로마 황제의 관을 받아서 황제의 칭호를 쓰기도 했었습니다.
샤를마뉴에게는 여러 아들들이 있었으며 그는 당대 전통대로 아들들에게 영지를 분배해주려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들들은 막내인 루이(루도비쿠스)를 제외하고 모두 샤를마뉴보다 일찍 사망합니다. 그래서 샤를마뉴는 막내아들에게 영지 모두를 물려주게 됩니다.
루이 르 피우스(루도비쿠스 피우스)는 아내와의 사이에서 세명의 아들들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는 당연히 이 아아들들에게 영지를 분배해줄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817년 사건이 하나 발생하면서 그 생각을 더욱더 굳게 만듭니다. 817년 루이는 신하들과 함께 건물안에 있었는데 그 건물의 지붕이 무너지게 됩니다. 루이는 죽지 않았지만 이 사고 때문에 자신이 죽은 뒤의 상황에 대해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는 생전에 자녀들에게 제국을 분할해주기로 합니다.
루이는 장남인 로타르(로타리우스)에게는 자신과 함께 "공동황제"지위를 부여했으며 제국의 수도인 아헨을 비롯해서 이탈리아 왕국까지지 제국의 중부 지역을 부여했습니다. 둘째아들인 피핀(파피누스)에게는 아키텐 지역을 줬으며 막내아들인 루이(루도비쿠스)에게는 바이에른 지역을 부여합니다. 이 시점에서 루이는 아마 모든 것이 평온하게 돌아갈것이라 여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삶은 그렇지 않죠.
818년 루이의 아내인 에멩가르드가 사망합니다. 그리고 다음해에 루이는 바이에른의 유디트라는 여성과 재혼합니다. 루이보다 20살 정도 어렸던 그녀는 결혼후 두 아이를 낳았으며 둘째아이는 바로 아들인 샤를(카롤루스)였습니다.
막내아들이 태어나자 상속문제가 좀 복잡해지게 됩니다. 루이는 당연히 막내아들에게도 영지를 주고 싶어했죠. 하지만 이미 영지는 이미 다른 아들들에게 분배해둔 상황이었습니다. 이것은 당연히 갈등의 요인이 됩니다. 게다가 루이의 두번째 아내였던 유디트는 당연히 남편보다 오래살것이었고, 살아있을때는 황후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수 있었지만 남편이 죽고 나면 아무런 힘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죠. 게다가 아들의 나이 역시 이복 형들보다 한참 어렸기에 경쟁할수 없을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유디트는 남편이 살아있을때 자신이 황후일때 자신의 아들의 지위를 확고히 하고 싶어했습니다.
이런 상황은 당연히 위의 다른 아들들이 반발하는 상황으로 발전해서 결국 내전까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아버지인 루이가 미리 상속을 정하지 않았다면 아버지가 막내동생에게 영지를 다시 분배해주려한다고 해도 이렇게 반발했을까? 라는 생각이 살짝 들었습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