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국왕 루이-필리프 도를레앙
프랑스의 국왕이 되는 루이-필리프 도를레앙은 원래 프랑스의 왕가인 부르봉 가문의 분가중 하나인 오를레앙 공작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그의 선조는 루이 13세의 아들이자 루이 14세의 동생이었던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였죠. 오를레앙 가문은 오래도록 프랑스 왕가의 제 1분가 가문으로 프랑스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루이-필리프의 아버지로 혁명을 지지했던 인물로 알려진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에갈리테는 결국 프랑스 대혁명중 처형당했었으며 당시 샤르트르 공작이었던 루이 필리프는 프랑스 혁명전쟁에 참전했었지만 결국 망명해야했었습니다.
망명후 루이 필리프의 지위는 애매했는데 다른 많은이들이 왕당파였던것과 달리 샤르트르 공작과 그의 아버지는 혁명을 지지했었던 인물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동안 루이 필리프는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었으며 여러가지 경험을 합니다. 그는 가명으로 남자아이들의 기숙학교에서 역사 지리학등을 가르치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처형당한 소식을 들은뒤 역시 여기저기를 떠돌게 됩니다. 북쪽의 스칸디나비아반도 지방을 돌아다녔을뿐만 아니라 미국에도 갔었죠. 이후 영국에서 머무는데 그는 영국의 왕자였던 켄트 공작 에드워드와 친분을 쌓기도 했었습니다.
1809년 루이 필리프는 양시칠리의 공주였던 마리아 아말리아와 결혼합니다. 마리아 아말리아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조카였었습니다. 둘의 결혼에 대해서 처음에 마리아 아말리아의 어머니는 반대했었지만 결국 결혼을 허락하게 됩니다.
1815년 부르봉 왕가가 복귀한 뒤 루이 필리프 역시 오를레앙 공작으로 프랑스로 돌아옵니다. 그는 왕가의 제1분가의 수장이긴했었지만 루이 18세나 샤를 10세와는 그리 가깝지는 않았었습니다. 게다가 샤를 10세의 절대왕정으로 회귀하려는 정책에 반대하는 입장이기도 했었죠.
1830년 7월혁명이 일어나면서 샤를 10세와 그 가족들은 쫓겨나게 되었으며, 루이 필리프는 선거로 프랑스의 국왕이 됩니다. 그는 "프랑스인들의 국왕"이라는 칭호를 써서 그가 프랑스 인들의 지지를 받는 입장임을 강조합니다. 루이 필리프는 부루주아의 지지를 받았었는데 사실 이것은 빈부격차가 심해지면서 그에 대한 불만이 더 커지는 계기가 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루이 필리프도 점차 더 보수적인 정책으로 바뀌어갔죠. 이것은 결국 1848년 2월에 2월 혁명이 일어나는 계기가 됩니다. 루이필리프는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망명했었으며 그곳에서 사망합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