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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Jul 24. 2020

프란츠 빈터할터가 그린 사람들...(7)

양시칠리의 마리아 아말리아, 프랑스의 마리 아멜리 왕비

양시칠리의 마리아 아말리아, 마리 아멜리 왕비, 빈터할터(1842)


양시칠리의 마리아 아말리아Maria Amalia Teresa of Naples and Sicily (26 April 1782 – 24 March 1866) 는 양시칠리의국왕이었던 페르디난도 1세와 그의 아내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카롤리나 여대공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마리아 아말리아의 아버지인 페르디난도 1세는 에스파냐의 국왕 카를로스 3세의 아들로 그는 루이 14세의 후손중 한명이기도 했었습니다.

마리아 아말리아의 아버지, 양시칠리의 국왕 페르디난도 1세

마리아 아말리아의 어머니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카롤리나 여대공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로 마리아 테레지아를 가장 많이 닮은 딸이라고 알려져있습니다. 마리아 카롤리나의 여동생은 바로 프랑스의 왕비였던 마리 앙투아네트였습니다. 특히 마리아 카롤리나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매우 친했었기도 하죠.


마리아 아말리아의 어머니,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카롤리나 여대공


마리아 아말리아는 어린시절부터 사촌인 도팽과 혼담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실 어머니들끼리 매우 친했기에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촌은 어린시절 사망했으며 또 혁명으로 인해서 모든 것이 바뀌게 되죠. 프랑스 대혁명이후 유럽은 혼란한 상황이 되었으며 마리아 아말리아의 가족들 역시 프랑스군에 쫓겨서 이리저리 떠돌아야했었습니다.


마리아 아말리아는 1806년 오를레앙 공작이었던 루이 필리프 도를레앙을 만나게 됩니다. 이후 마리아 아말리아는 그와 결혼하길 바라게 되죠. 하지만 마리아 아말리아의 어머니인 마리아 카롤리나는 동생인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에 찬성한 남자의 아들과 딸을 결혼시킬수 없다고 반대했었다고 합니다만 결국 딸과 오를레앙 공작과의 결혼을 허락하게 됩니다.


마리아 아말리아, 오를레앙 공작부인 시절


나폴레옹이 몰락한뒤 마리아 아말리아는 남편과 함께 프랑스로 갔으며 이곳에서 오를레앙 공작부인 마리 아멜리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녀는 자녀들을 많이 낳았으며 앞으로 나서지 않는 조용한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1830년 남편이 국왕이 되면서 그녀 역시 왕비가 되죠. 하지만 마리 아멜리는 남편이 국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합니다. 왜냐면 남편이 국왕이 되는 것이 그녀의 행복한 가족적인 삶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 이모인 마리 앙투아네트의 운명 역시 그녀에게 큰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마리아 아말리아


왕비로써 마리 아멜리는 정치적으로는 조용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녀는 주로 자선활동에 집중했었습니다. 또 왕비로써 궁정의 격식을 대부분 없애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비록 정치적으로 조용한 삶을 살았지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것에는 절대로 양보하지 않기도 했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 가족과 루이 필리프의 가족들, 빈터할터(1845)


2월혁명이 일어났을때 마리 아멜리는 남편에게 왕위를 지켜야한다고 주장했었습니다. 그녀는 비록 남편이 왕위를 받아들인것에 대해서는 탐탁치 않아했지만 어쨌든 남편이 국왕이 되었으니 왕위를 지켜야한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국 루이 필리프 도를레앙은 퇴위했고 나라는 공화국이 되었으며 가족은 영국으로 망명해야했었죠. 마리 아멜리는 역시 영국에서 사망했었습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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