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식 테클은 가문의 전통

가벼운 역사이야기 : 조지 1세와 조지 2세의 다툼

by 엘아라

빅토리아 여왕의 세례식때 여왕의 백부였던 웨일스 공 조지가 조카의 이름을 가지고 테클을 걸어서 결국 빅토리아 여왕의 세례명이 알렉산드린 빅토리아로 결정나게 됩니다. 하지만 이 가문에서는 이전에도 세례식때 테클을 걸어서 가족간에 다툼이 커진적이 있었습니다.


하노버의 선제후였던 게오르그 루드비히는 어머니인 팔츠의 조피의 권리를 통해서 영국의 왕위를 이어받게 됩니다. 그는 영국의 조지 1세로 즉위했었는데 그에게는 후계자가 될 아들이 단 한명 게오르그 아우구스트(후에 영국의 조지 2세)밖에 없었습니다.


423px-King_George_I_by_Sir_Godfrey_Kneller%2C_Bt_%283%29.jpg?20090329152417 영국의 조지 1세,빅토리아여왕의 5대조,하노버 가문 출신의 첫번째 영국 국왕


조지 1세는 하노버의 선제후령은 물론 영국의 왕위까지 물려받을 아들 조지 2세에게 매우 엄하게 대했었습니다. 그가 아들에게 엄격하게 대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기본적으로는 기대가 큰 아들이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하나는 조지 2세의 어머니이자 조지 1세의 이혼한 아내인 첼레의 조피 도로테아 때문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조지 1세는 부정행위는 물론 심지어 남자와 야반도주하려고까지해서 자신을 망신 시켰던 첼레의 조피 도로테아를 절대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전처와 관련된 어떤 것도 언급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안그래도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강제로 떨어지게 된 조지 2세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부자간의 갈등으로 이어지게 된 것일듯합니다.


부자간의 갈등은 매우 컸는데 문제는 조지 1세는 하노버 선제후시절부터 아들을 매우 억아했다는 것입니다. 아들이 성인으로 군인으로 두각을 나타낼 기회를 전혀주지 않았으며 기회를 얻었을때조차도 아들에게 그 기회를 포기하도록 강요하기도 했었습니다. 결국 이런 문제는 영국에서 부자간의 정치 갈등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하노버에서는 선제후인 아버지의 말이 절대적이었지만, 영국에서는 국왕인 아버지의 말이 절대적이지는 않았습니다. 국왕과 갈등을 빚는 정치인들은 아버지와 사이가 나쁜 당시 웨일스 공이었던 조지 2세와 친하게 지냈으며, 이것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반항할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471px-Kneller_-_George_II_when_Prince_of_Wales.png 웨일스 공 시절의 조지 2세, 1716년


1717년 당시 웨일스 공 부부에게는 아들인 조지 윌리엄이 태어나게 됩니다. 그동안 장남인 프레드릭을 제외하고는 아들을 얻지 못했었던 웨일스 공 부부는 둘째아들이 태어나자 매우 기뻐하게 됩니다. 게다가 이 아이는 영국에서 오랫만에 태어난 왕자로 매우 영국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여겼었습니다.


아이에게 윌리엄(빌헬름)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싶었던 아이의 부모는 조지라는 이름을 넣고 싶어하는 아이 할아버지의 뜻을 수용했으며 아이의 이름은 조지 윌리엄이 됩니다. 그리고 아이의 대부모는 웨일스 공비의 남동생이었던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의 마르크그라프 빌헬름 프리드리히와 웨일스 공의 여동생인 프로이센의 왕비인 조피 도로테아가 선택됩니다. 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어보였습니다. 하지만 아이의 세례식에 대부모를 대신해서 참석하는 사람을 두고 조지 1세와 웨일스 공이 서로 다투게 됩니다.


조지 1세는 자신의 측근이자 자신의 시종무관이었던 뉴캐슬 공작을 안스바흐의 마르크그라프 대리로 보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와 사이가 나빳던 웨일스 공은 아버지 측근들에 대해서도 좋지 않게 여겻으며 당연히 뉴캐슬공작에 대해서도 호의적으로 대접하지 않습니다. 사실 조지 1세 역시 아들이 뉴캐슬 공작과 사이가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신경쓰지 않고 그를 보냈던 것입니다. 세례식에 뉴캐슬 공작이 오자 웨일스 공은 그에 대해서 비아냥댔으며 이것은 곧 소란으로 발전하는데 심지어 웨일스 공과 뉴캐슬 공작이 결투하기 직전까지 이르게 됩니다. 주변 사람들이 간신히 뜯어말려서 결투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조지 1세가 이 상황에 대해서 알게 되자 아들에게 불같이 화를 내게 됩니다.


484px-1stDukeOfNewcastleYoung.jpg?20080617211220 뉴캐슬 공작, 재미난 것은 이렇게 치고받고 싸우기까지 했지만, 조지 2세는 즉위한뒤 정치적으로 뉴캐슬 공작과 협력관계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조지 1세는 안그래도 못마땅해하던 아들 웨일스 공을 궁전밖으로쫓아내게 됩니다. 웨일스 공은 궁전을 떠나서 런던에 있던 레스터 하우스에 가서 살게 됩니다. 조지 1세는 아들은 쫓아냈지만 며느리에게는 안나가도 된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하지만 웨일스 공비는 시아버지의 제안을 거절하고 남편을 따라 가겠다고 했습니다. 조지 1세는 며느리가 남편을 따라가는 것을 막지는 않았습니다만 손자손녀들을 데려가는 것은 막았습니다. 쫓아낸 것은 아들이지 손자손녀들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이들을 사랑했던 웨일스 공비 캐롤라인은 남편과 아이들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했고 결국 그녀는 남편을 따라갔습니다.,


479px-Caroline_Wilhelmina_of_Brandenburg-Ansbach_by_Sir_Godfrey_Kneller%2C_Bt.jpg 안스바흐의 카롤리네, 영국의 캐롤라인 왕비, 조지 2세의 왕비, 웨일스 공비 시절,1716년


이렇게 조지 1세와 웨일스 공은 서로 떨어져 지냈고 대놓고 서로 적대적인 모습을 보여줬습다. 그리고 당연히 국왕에게 호의를 얻지 못한 정치가들은 서둘러 웨일스 공 주변으로 몰려들었으며 이것은 정치적인 문제로 발전하기까지 합니다.


이 문제는 꽤 오래도록 지속이 되는데, 아이들을 사랑하던 캐롤라인은 아이들과 함께 지내길 원했으며 이를 실현시켜줄 인물인 로버트 월폴을 지원해주게 됩니다. 그리고 로버트 월폴은 결국 부자간의 화해하는 모습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했습니다. 물론 조지 1세는 자코바이트들의 반란에 직면해서 후계자와의 좋은 모습을 보여줘야한다는 정치적인 의도가 있었고, 웨일스 공은 쫓겨나서 살면서 부채가 많이 늘었기에 이를 해결해야하는 경제적 의도가 있었으며 부자간의 화해는 단지 보여주기식의 화해였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웨일스 공비는 다시 아이들과 함께 살수 있었으며 이후로도 웨일스 공비는 로버트 월폴의 정치적 지지자로 남았습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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