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역사이야기 : 마이센의 마르크그라프 프리드리히 1세
마이센의 마르크그라프령은 현재 작센 지방에 있는 지역으로 10세기무렵 형성된 곳으로 11세기 베틴 가문이 이곳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13세기 말 무렵 마이센을 통치했던 인물은 베틴 가문 출신의 프리드리히 1세였습니다. 프리드리히 1세의 개인사는 매우 불행했는데 이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아버지 알브레히트 2세 때문이었습니다.
알브레히트 2세는 그의 아버지인 하인리히 3세가 죽기전 이미 아버지로부터 가문의 여러 영지의 통치권리를 물려받았었습니다. 마이센은 아버지 하인리히 3세가 통치했지만 루지츠 지역과 튀링겐 지역은 알브레히트 2세가 아버지로부터 미리 통치권을 넘겨받았었습니다. 아마 이것은 그가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사위였기에 아들에게 힘을 실어주려는 것이었을수 있습니다.
알브레히트 2세의 아내이자 프리드리히 1세의 어머니였던 시칠리아의 마르가레테는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 그의 아내였던 잉글랜드의 이사벨라의 딸이었습니다. 알브레히트와 마르가레테가 결혼한 뒤 바르트부르크에서 살았으며 둘 사이에서는 세명의 아들과 두명의 딸이 태어납니다.
하지만 알브레히트 2세는 성실한 남성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내의 시녀였던 아이센부르크의 쿠니쿤데라는 여성과 바람을 피우게 됩니다. 아이센부르크의 쿠니쿤데는 매우 아름다운 여성으로 알브레히트 2세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그와의 사이에서 두명의 아이를 낳았습니다.
당연히 아내인 마르가레테 역시 남편의 부정을 알아채게 됩니다. 언제 알아챘는지는 알수 없지만 남편이 정부와의 사이에서 두번째 아이가 생긴 뒤인 1270년 남편을 떠나버리게 됩니다. 아마 남편의 부정을 알자마자 떠났다가 보다는 어느정도 남편이 돌아오길 바랬을 듯합니다만 결국 남편이 정리할 마음이 없는 것을 알고서 떠나버린듯합니다. 하지만 남편을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마르가레테의 아들들은 아버지를 떠나서 숙부인 란트스베르크의 디트리히가 돌보게 됩니다.
알브레히트 2세는 1274년 쿠니쿤데와 재혼했으며 둘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적자로 인정하게 됩니다. 문제는 알브레히트 2세가 재혼한뒤 쿠니쿤데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알브레히트를 위해서 튀링겐의 영지를 그에게 물려주려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알브레히트 2세의 아들들은 아버지에게 반발했으며 결국 아버지와 전쟁을 시작합니다. 게다가 알브레히트 2세의 동생과 조카 그리고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이들의 영지에 대한 권리 문제도 발생했기에 알브레히트 2세와 그의 아들들인 프리드리히와 디트리히는 계속해서 전쟁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알브레히트 2세는 아들들에 대해서 승기를 잡기도 했지만 결국 1288년 프리드리히는 아버지를 사로잡았으며 결국 알브레히트 2세는 아들들에게 상당수 권리를 넘기고 풀려났었습니다.
알브레히트 2세는 비록 첫번째 아내의 아들들인 프리드리히와 디트리히에게 권리를 넘겼지만 여전히 쿠니쿤데의 아들이었던 알브레히트를 좋아했으며 튀링겐을 그에게 넘기고 싶어했습니다. 당연히 프리드리히와 디트리히는 이에 대해서 반발했으며 부자 사이는 여전히 사이가 나빴었습니다.
알브레히트 2세의 두번째 아내이자 이런 혼란의 중심 인물중 하나였던 쿠니쿤데는 1286년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알브레히트 2세는 1290년 세번째 결혼을 합니다. 결혼 상대는 엘리자베트 폰 오를라뮌데라는 여성이었습니다. 엘리자베트는 알브레히트 2세보다 20살 이상 어렸지만 그녀 역시 과부로 첫번째 결혼에서 엘리자베트 폰 롭데부르크-아른스샤우크라는 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엘리자베트 폰 롭데부르크-아른샤우크는 알브레히트 2세와 프리드리히 1세 사이의 관계를 바꾸게 되는 원인이 됩니다.
프리드리히 1세는 1286년 카린시아 공작의 딸과 결혼했었지만 그녀는 1293년 아들을 낳은 뒤 사망합니다. 프리드리히 1세는 홀아비가 되었으며 재혼 상대를 찾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자신에게 이익이 될만한 결혼 상대를 찾았을것입니다만 1299년 한 여성에게 반해버렸다고 알려지게 됩니다. 바로 자신의 의붓여동생인 엘리자베트였습니다. 어린시절에 대해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연대기에 따르면 이때 15살 정도의 엘리자베트는 너무나 아름다웠기에 프리드리히 1세는 29살이나 어린 의붓여동생에게 반해버렸고 결국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다른 기록에서는 프리드리히 1세는 엘리자베트와 결혼하기 위해서 미리 그녀를 데려온뒤 새어머니에게 딸을 달라고 요청했었다고도 합니다. 어쨌든 둘은 1300년 결혼했었습니다.
프리드리히 1세와 엘리자베트가 결혼한 뒤 부자간의 사이는 좀 더 나아지게 됩니다. 특히 알브레히트 2세의 세번째 아내이자 프리드리히 1세의 장모였던 엘리자베트 폰 오를라뮌데는 알브레히트 2세와 프리드리히 1세 사이를 중재했었는데 이것은 당연히 딸과 사위를 위해서 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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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1세와 엘리자베트의 결혼은 사실 정치적으로 매우 이익이 되는 결혼이었습니다. 프리드리히 1세는 엘리자베트와 결혼하면서 아버지와 화해를 했으며 영지에 대한 권리를 완전히 물려받을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반대로 엘리자베트 입장에서는 아버지쪽 영지의 상속에 대해서 친척들과 갈등을 빚었을때 강력한 마이센의 마르크그라프들의 지지를 받을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