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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May 31. 2024

대관하지 않은 레지나 :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

잉글랜드의 여성 왕위 계승자들..네번째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는 서머셋 공작 존 보퍼트와 그의 아내인 마거릿 보챔프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레이디 마거릿의 아버지는 랭카스터 가문의 방계 가문인 보퍼트 가문 출신으로 국왕 헨리 5세와 사촌관계였습니다.      

보퍼트 가문은 랭카스터 공작 곤트의 존과 그의 오랜 정부이자 결국 세 번째 아내가 되는 캐서린 드 로에(일반적으로는 캐서린 스윈포드라는 이름으로 더 잘알려짐)의 후손들이었습니다. 캐서린 스윈포드는 원래 랭카스터 공작 부인이었던 랭카스터의 블랑쉬의 시녀로 랭카스터 공작의 기사였던 휴 스윈포드와 결혼했었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죽은뒤 공작의 정부가 되었고 공작과의 사이에서 네명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랭카스터 공작은 정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에게 프랑스에 있는 보퍼트 영지를 줬으며 이 때문에 자녀들은 모두 “보퍼트”라는 성을 쓰게 됩니다. 이후 부모가 정식 결혼하면서 아이들은 모두 적자로 인정되었습니다.   


랭카스터 공작 곤트의 존,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의 증조할아버지


보퍼트 가문은 왕가의 가까운 친척이었는데 헨리 4세의 이복 동생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헨리 4세는 보퍼트 가문의 왕위계승 권리를 인정하는 것을 꺼려했는데 아무래도 “사생아”였기에 비록 적자로 인정받는다고 하더라도 사생아는 여전히 사생아였고 계승권리 역시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아마 헨리 4세 역시 같은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정치적으로 보퍼트 가문은 헨리 4세와 그 이후 랭카스터 국왕들의 측근들이었으며 헨리 4세 역시 이 이복 동생들을 중용했기에 왕위계승권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헨리 5세 시기 보퍼트 가문은 국왕의 가장 가까운 친척으로 권력을 잡게 됩니다. 보퍼트 가문은 헨리 4세와 헨리 5세가 갈등을 빚던 시기 헨리 5세를 지지했었으며 결국 보퍼트 가문은 권력의 핵심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그리고 헨리 6세 시절이 되면서도 여전히 그 권력을 누리게 됩니다.     


존 보퍼트, 서머셋 백작,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의 할아버지


레이디 마거릿의 아버지인 서머셋 공작 존 보퍼트는 랭카스터 공작의 둘째아들이자 보퍼트 가문의 첫째아들인 서머셋 백작 존 보퍼트의 아들이었습니다. 서머셋 공작의 어머니인 마거릿 홀랜드는 리처드 2세의 조카였을뿐만 아니라 첫 번째 남편이 죽은 뒤 헨리 4세의 아들인 클라렌스 공작 랭카스터의 토마스와 결혼했었기에 존 보퍼트는 왕가의 핵심 친척중 한명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의붓아버지와 함께 백년전쟁에 참전했었지만 1421년 전투에서 의붓아버지는 전사하고 그는 포로로 잡히게 됩니다. 그리고 17년동안이나 포로로 살았었습니다. 귀국 후 국왕 헨리 6세의 가까운 친척이었던 존 보러트는 서머셋 공작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1443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패배했으며 이것은 그에게 큰 절망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1444년 서머셋 공작이 갑자기 사망했을 때 그가 자살했다는 소문이 매우 파다했다고도 합니다. 서머셋 공작은 1439년 블렛소의 마거릿 보챔프와 결혼했고 1443년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를 얻었습니다.      


존 보퍼트, 서머셋 공작, 레이디 마거릿 보러트의 아버지


레이디 마거릿은 태어난 직후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평생 평온과 거리가 멀었던 레이디 마거릿의 삶의 폭풍우의 시작이었습니다. 레이디 마거릿은 딸이었기에 아버지의 서머셋 공작 지위를 이어받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엄청난 영지를 그대로 상속받았으며 이 때문에 당대 잉글랜드 최고의 상속녀중 한명이 됩니다. (레이디 마거릿과 비슷한 상속녀는 바로 워릭 공작의 딸이었던 15대 워릭 여백작 앤 보챔프였고 앤 보챔프의 고모가 바로 16대 워릭 여백작이자 “킹 메이커”리처드 네빌의 아내였던 앤 보챔프였습니다.)     

레이디 마거릿은 엄청난 재산을 가진 상속녀였기에 당연히 레이디 마거릿의 후견인이 되는 것은 엄청난 이익을 얻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서머셋 공작은 죽기전 국왕 헨리 6세에게 딸인 레이디 마거릿의 양육과 후견 그리고 결혼 선택권을 아내에게 달라고 요청했고 승낙했었습니다. 하지만 헨리 6세는 공작이 죽고 난 뒤 엄청난 이익이 되는 마거릿의 후견을 자신의 최측근이었던 서퍽 공작 윌리엄 드 라폴에게 줍니다. 그리고 서퍽 공작 윌리엄 드 라폴은 후견인으로 레이디 마거릿의 결혼 문제를 결정할수 있었는데, 그는 레이디 마거릿을 자신의 아들과 결혼시키기로 결정합니다. 둘의 결혼이 이루어진 것은 아마도 1450년 경으로 추정되는데 윌리엄 드 라폴은 이전에 레이디 마거릿보다 워릭 여백작 앤 보챔프와 아들을 결혼시키려 생각했었습니다만 1449년 레이디 앤이 사망하면서 레이디 마거릿과 아들의 결혼을 추진했던듯합니다.      


레이디 마거릿의 첫번재 남편인 2대 서퍽 공작 존 드 라폴과 그의 두번째 아내인 요크의 엘리자베스(에드워드 4세의 여동생)의 묘


레이디 마거릿은 비록 서퍽 공작이 후견인이 되었지만, 서퍽 공작이 레이디 마거릿을 돌보지는 않았습니다. 레이디 마거릿은 후견인이 지정된 후에도 어머니 곁에서 성장했었으며 아마 결혼한 뒤에도 어머니 곁에 있었을 것입니다. 레이디 마거릿은 비록 아버지의 외동딸이었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서머셋 공작과 결혼하기전 한번 결혼했었고 첫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일곱명의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후에 세 번째 결혼한뒤 1450년 아들 한명을 더 낳았습니다. 그렇기에 레이디 마거릿은 엄청난 상속녀로 아기때부터 이리저리 정치적으로 휘둘렸지만, 어린시절은 수많은 형제 자매들과 평온하게 지냈었으며 아마도 이것은 그녀가 친척들과 가족들에 대해서 늘 신경쓰는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레이디 마거릿의 첫 번째 결혼은 애매한 상황으로 사실 결혼을 했다고 하더라도 남편과 함께 살지도 않았으며 교회에서 정한 최소 결혼 연령인 12살이 안되는 나이였기에 결혼 자체도 무효화될 가능성이 컸습니다. 게다가 성적 결합이 결혼의 중요한 요소중 하나였는데 너무 어렸기에 결혼 생활 자체가 불가능했었고 이것은 결혼 무효화될 중요한 요인이 됩니다. 그리고 3년후인 1453년 이 결혼은 끝나게 되는데 정치적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레이디 마거릿은 훗날 정치적 문제 때문에 스스로 이 첫 번째 결혼을 결혼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최소 결혼 연령인 12살 이전에 한 결혼이기에 무효이기도 했습니다.      


레이디 마거릿의 마거릿의 두 번째 결혼은 역시 정치적 문제였습니다. 1450년대가 되면서 헨리 6세의 정신상태가 서서히 발생하기 시작했으며 헨리 6세의 후계자 문제 역시 악화됩니다. 헨리 6세와 국왕의 측근들은 후계자가 필요했었는데 1453년 마거릿 왕비가 아들을 낳기 전까지 국왕에게는 후계자가 없었고, 만약 국왕이 죽는다면 계승권리는 애매해지게 됩니다. 이에 국왕 측근들은 국왕의 이부동생인 에드먼드 튜더를 왕위계승권리를 가진 여성과 결혼시키려했습니다. 그리고 이에 적합했던 사람이 바로 레이디 마거릿이었습니다. 레이디 마거릿은 보퍼트 가문의 가장 연장자 가문의 상속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헨리 6세는 1453년 레이디 마거릿의 후견권을 이부동생들인 리치몬드 백작 에드먼드 튜더와 그의 동생인 펌브로크 백작 재스퍼 튜더에게 줬으며, 이후 레이디 마거릿이 최소 결혼 적령기가 된 후인 1455년 11월 1일 리치몬드 백작 에드먼드 튜더와 결혼합니다. 이 결혼에 대해서 훗날  레이디 마거릿은 결혼이 자신의 뜻이었다고 이야기하는데, 이 결혼을 제의받았을 때 고민했고 어떤 귀부인이 기도를 하면 응답해줄것이라고 했기에 기도했고 응답을 받아서 결혼했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아마도 이것은 레이디 마거릿이 국왕이 된 아들에게 명분을 더 부여하려한 것이었을 듯합니다. 12살의 어린 소녀였던 레이디 마거릿이 정치적 목적으로 이루어진 결혼에서 거부할 권한이 없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후견권 역시 이미 남편에게 넘어간 상황이었기에 더욱더 그랬을 것입니다.     


레이디 마거릿의 두번째 남편 에드먼드 튜더의 무덤 조상


아마 결혼 무효를 우려했기에 결혼은 바로 완성되었을 것이며 레이디 마거릿은 13살에 임신하게 됩니다. 레이디 마거릿과 남편인 리치몬드 백작은 웨일스 지방으로 갔습니다만, 이미 장미전쟁이 시작된 상황이었고 레이디 마거릿의 남편은 요크 가문쪽 사람에게 잡히고 감옥에서 사망합니다. 남편이 죽었을 때 레이디 마거릿은 겨우 13살에 임신중이었습니다. 게다가 레이디 마거릿은 남편없는 상속녀에 랭카스터 가문쪽의 높은 사람이었기에 납치당할 우려가 있었습니다. 이런 혼란한 상황에서 레이디 마거릿의 시동생이었던 재스퍼 튜더는 임신한 어린 형수를 자신의 펌브로크 성으로 데려왔으며 마거릿의 아들인 헨리 튜더는 1457념 1월 28일 이곳에서 태어나게 됩니다. 매우 어린 나이에 임신했기에 출산도 매우 어려웠고 레이디 마거릿이 이후 아이를 가질수 없었던 것 역시 이때문이었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레이디 마거릿 역시 어린 나이에 아이를 낳은 것에 대해서 너무나 힘들었기에 후에 손녀가 결혼할 때 너무 어리다고 반대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펌브로크 성의 정경, 19세기


재스퍼 튜더는 조카와 형수를 보호해야했고 아마 형수가 보호받을수 있는 사람과 재혼하도록 주선하게 됩니다. 그리고 선택된 사람은 1대 버킹엄 공작 험프리 스태포드의 아들이었던 헨리 스태포드였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태어난 1년후인 1458년 1월 14살이 레이디 마거릿은 헨리 스태포드와 재혼합니다. 레이디 마거릿은 결혼을 했지만 아들을 데려가 키울수는 없었습니다. 레이디 마거릿에게 그나마 다행하게도 헨리 튜더는 숙부인 재스퍼 튜더의 보호아래있었고, 레이디 마거릿은 아들을 만나러 갈수 있었습니다. 레이디 마거릿과 헨리 스태포드는 매우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비록 이 결혼 역시 정치적 목적으로 이루어진 결혼이었지만, 레이디 마거릿의 남편은 아내와 아내의 재산을 보호하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으며 레이디 마거릿 역시 병약하지만 다정한 남편과 함께 어느정도 평온하게 살수 있었습니다.


이런 평온함은 장미전쟁이 격화되면서 깨지게 됩니다. 에드워드 4세가 왕위에 오르고 난뒤 정치적으로 혼란했으며 결국 재스퍼 튜더는 망명해야했고, 헨리 튜더는 요크 가문 쪽 사람들에게 후견권이 넘어가게 됩니다. 레이디 마거릿은 아들의 후견권을 자신이 갖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헨리 튜더는 어머니의 유일한 상속자로 엄청난 재산뿐만 아니라 랭카스터 가문쪽 왕위계승권리마저 있었기에 쉽게 내줄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젊은 시절 레이디 마거릿으로도 추정되는 그림

     

1470년 헨리 6세가 잠시 복위하자, 레이디 마거릿은 이 틈을 타서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곁에 두려했습니다만, 결국 에드워드 4세가 다시 왕위를 되찾게 됩니다. 특히 1471년 5월 튜크스버리 전투에서 살아남은 보퍼트 가문을 비롯한 랭카스터 계열의 모든 남성 직계 후손이 살해당하게 되자, 레이디 마거릿은 아들의 안위를 걱정합니다. 랭카스터 계열의 모든 남성 직계가 사라지면, 보퍼트 가문의 가장 연장자의 상속녀였던 레이디 마거릿에게 왕위계승권리가 이어지고 레이디 마거릿의 아들인 헨리 튜더가 어머니의 권리를 통해서 잉글랜드 왕위계승을 주장할 권리를 가질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레이디 마거릿은 서둘러 아들을 시동생인 재스퍼 튜더에게 보냈고 재스퍼 튜더는 조카와 함께 프랑스로 망명을 떠나게 됩니다.     


레이디 마거릿의 아들 헨리 튜더


이런 혼란한 상황에서 레이디 마거릿은 또 한번 과부가 됩니다. 레이디 마거릿의 남편인 헨리 스태포드는 랭카스터와 요크 가문 사이에서 편을 정해야했을 때, 재스퍼 튜더의 권유를 물리치고 자신의 병력을 데리고 사촌인 에드워드 4세쪽에 합류했습니다. 아마 이런 그의 결정은 레이디 마거릿이 자신의 재산과 아들의 목숨을 지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을 듯합니다만, 그는 전투중 부상을 입었으며 레이디 마거릿은 남편을 간호했지만 결국 1471년 10월 사망합니다.      


레이디 마거릿은 다시 한번 과부가 되었으며 늘 종교에 헌신적이었던 레이디 마거릿은 이제 결혼하지 않고 수녀원으로 들어가고 싶었을수 있습니다. 하지만 레이디 마거릿에게는 아직 지켜야할 것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아들인 헨리 튜더였습니다. 헨리 튜더가 잉글랜드로 돌아와서 살수 있게 하고 싶었으며 그럴려면 레이디 마거릿은 자신의 재산과 지위를 지켜주고 궁정에서 지위를 줄 수 있는 남편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레이디 마거릿이 선택한 인물은 바로 토마스 스탠리였습니다. 토마스 스탠리와 그의 형제들은 장미전쟁중 랭카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 사이에서 편을 바꿔가면서 세력을 키웠습니다. 레이디 마거릿은 1472년 6월 토마스 스탠리와 결혼했으며 에드워드 4세 궁정의 높은 지위의 조신이었던 남편의 지위 덕분에 에드워드 4세의 궁정에 출입할수 있게 됩니다.      


에드워드 4세


이때 레이디 마거릿은 아마도 그저 아들이 잉글랜드로 돌아와서 자신의 재산(일부라도) 상속받아서 평온하게 살길 원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에드워드 4세의 궁정에 가서 왕비인 엘리자베스 우드빌과의 교분을 쌓고 엘리자베스 우드빌을 통해서 에드워드 4세가 아들에게 좀 더 호의적이 되길 원했었습니다. 아마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레이디 마거릿에게 좀 더 호의적이 되었을 것인데,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가문 역시 사실 랭카스터 가문의 신하였으며 엘리자베스의 어머니인 룩셈부르크의 자퀘타는 헨리 6세의 숙모이기도 했었습니다. 그렇기에 엘리자베스 우드빌이 요크 가문의 왕비가 되었을때 요크 가문과 요크 가문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엘리자베스 우드빌에 대해서 매우 나쁘게 평가했으며 또한 온통 왕가와 혈연관계로 이어진 궁정의 사람들이 혈연적으로 왕가 접점이 없는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그녀의 가족들을 무시했었습니다. 아마 이것은 엘리자베스 우드빌이 요크 가문 궁정에서 랭카스터 가문의 상속녀이자 상속권을 주장할 수 있는 헨리 튜더의 어머니인 레이디 마거릿에게 동병상련을 느끼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레이디 마거릿은 자신의 의도를 갖고 왕비와 가깝게 지냈었긴합니다만, 궁정에서 따돌림 당하는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왕비의 처지에 공감을 가졌으며 이 때문에 왕비는 물론 왕비의 자녀들에게도 잘 대해주는 이유가 되었을 것입니다.      


엘리자베스 우드빌, 에드워드 4세의 왕비


에드워드 4세는 승리자였고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의 왕조가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잉글랜드 내에서 어느 누구도 그의 왕권에 도전하지 못했으며 그의 후계자가 될 아들들 역시 잘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에드워드 4세가 이제 너그러움을 보여줄 때라고 생각했었으며 레이디 마거릿의 아들인 헨리 튜더의 잉글랜드 내 상속에 대해서 조금씩 인정해주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마도 레이디 마거릿이 늘 떨어져 살았던 아들과 함께 살수 있는 기회가 될것이라고 기대하게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1483년 4월 에드워드 4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모든 상황이 바뀌게 됩니다. 에드워드 4세가 죽은뒤 자연스럽게 그의 아들인 에드워드가 국왕이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에드워드와 그의 동생인 리처드는 즉위식을 기다리던 런던탑에서 갑자기 사라졌으며, 이후 에드워드 4세의 동생이었던 리처드가 형과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결혼이 적법하지 않다고 문제를 삼았고 둘의 자녀들이 왕위계승권리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스스로 잉글랜드의 국왕 리처드 3세로 즉위합니다.      


리처드 3세


이런 상황에서 레이디 마거릿은 아들과 함께 사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됩니다. 레이디 마거릿의 아들은 여전히 랭카스터 가문의 상속권리를 주장할수 있는 인물이었으며 명분이 애매했던 리처드 3세가 경계할 대상이기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마 정치적 상황이 이렇게 변하면서 레이디 마거릿은 큰 결심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바로 아들의 왕위계승권리를 주장하기로 결정한 것이었습니다.     


먼저 레이디 마거릿은 아들의 명분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장녀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아들의 결혼을 성사시키려합니다. 에드워드 4세의 아들들이 모두 사라졌기에 그 다음으로 강한 계승권리를 주장할수 있었던 인물이 요크의 엘리자베스였습니다. 비록 리처드 3세가 이런 명분을 제거하기 위해서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에드워드 4세간의 결혼이 적법하지 않다고 선언했지만, 여전히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명분 역시 무시하지 못했었습니다. 레이디 마거릿은 이전부터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잘 알고 지냈었으며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딸들과도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그렇기에 레이디 마거릿이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성역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피신한 엘리자베스 우드빌에게 접근해서 결혼 승낙을 받게 됩니다.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딸들


다음으로 레이디 마거릿은 아들을 지지해줄 동맹을 구하게 됩니다. 그 대상이 바로 2대 버킹엄 공작이자 리처드 3세의 측근이었던 헨리 스태포드였습니다. 헨리 스태포드는 레이디 마거릿의 두 번째 남편의 조카였을뿐만 아니라 레이디 마거릿의 사촌이었던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사촌간에 이름이 같습니다. 버킹엄 공작의 어머니는 레이디 마거릿의 숙부이자 요크 공작 리처드의 정적이었던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의 딸이었습니다.) 레이디 마거릿은 헨리 스태포드를 설득하는데 사실 헨리 스태포드 역시 따지자면 헨리 튜더처럼 어머니를 통해서 랭카스터 가문의 왕위계승권리를 주장할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레이디 마거릿의 아들인 헨리 튜더보다는 명분이 약했습니다. 그렇기에 레이디 마거릿은 리처드 3세와 틈이 생긴 버킹엄 공작에게 접근해서 아들을 도와준다면 왕가의 친척으로 국왕 다음의 권력을 주겠다고 약속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역시 버킹엄 공작 역시 이에 동의합니다.      


1483년 버킹엄 공작은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합니다. 레이디 마거릿의 아들인 헨리 튜더가 잉글랜드에 상륙하기도 전에 버킹엄 공작의 군대는 패배했고 헨리 튜더는 다시 돌아가야했습니다. 리처드 3세는 이 반란 이후 관련자를 처벌합니다. 버킹엄 공작은 처형당했으며,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딸들을 리처드에게 보내고 자신은 성역에서 나와야했고 왕비가 아니라 레이디 엘리자베스 그레이라는 이름으로 연금당한채 살 것을 강요당합니다. 레이디 마거릿 역시 반역죄를 피할수 없었습니다. 리처드 3세는 레이디 마거릿의 재산과 모든 권리를 박탈합니다. 하지만 그는 레이디 마거릿에 대한 감시와 재산을 모두 레이디 마거릿의 남편이었던 토마스 스탠리에게 맡겼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에게 치명적인 실수가 됩니다. 레이디 마거릿은 계속해서 아들과 연락을 했으며 세력을 모았고 남편인 토마스 스탠리는 적당히 이를 눈감아줬기 때문이었습니다.     


상황은 레이디 마거릿과 헨리 튜더에게 불리하게 되는듯했습니다만, 1485년 리처드 3세의 아내인 앤 네빌의 병세가 악화되면서 다시 기회를 얻게 됩니다. 궁정에서는 앤 네빌이 죽은뒤 리처드 3세가 조카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재혼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집니다. 물론 이 소문은 사실이 아니었으며 리처드 3세는 조카를 자신의 동맹이 될만한 유럽의 다른 왕가로 시집보내려 알아보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런 소문을 듣게 되자, 조카를 자신과 멀리 떼어놓기까지 했었습니다. 하지만 레이디 마거릿과 헨리 튜더쪽 사람들은 왕위계승의 명분에 달린 문제였습니다. 결국 앤 네빌은 1485년 3월 사망했으며 이후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갑니다. 헨리 튜더는 군대를 이끌고 1485년 8월 잉글랜드에 상륙했으며 8월 22일 보스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를 물리치고 승리를 거두면서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7세가 됩니다.     

헨리 7세, 레이디 마거릿의 아


아들이 왕위에 오른뒤 레이디 마거릿의 삶을 확 바뀌게 됩니다. 헨리 7세는 자신을 지지했던 의붓아버지 토마스 스탠리에게 “더비 백작”지위를 부여했고 이제 레이디 마거릿은 첫 번째 남편의 지위와 두 번째 남편의 지위에 따라가 “리치몬드와 더비의 백작부인”이라고 알려집니다. 하지만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데 엄청나게 기여했었으며, 또한 늘 어머니를 존경햇다고 알려진 헨리 7세는 어머니에게 수많은 권한을 부여했습니다. 레이디 마거릿은 궁정에서 My Lady the King’s Mother이라고 불렸으며, 또한 아들로부터 독립적으로 재산권을 소유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습니다.이것은 중세시대 여성들이 일반적으로 독립적으로 활동할수 없고 남성보호자가 필요했던 것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특히 레이디 마거릿은 궁정에서 매우 높은 신분으로 심지어 왕비인 며느리보다도 더 높은 지위를 유지했었습니다. 그렇기에 레이디 마거릿이 훗날 자신의 서명을 M.Richmond에서 Margaret R.로 바꾼것에 대해서 R이 regina(여왕을 의미하는 라틴어)라고 추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은 레이디 마거릿이 국왕이 된 후에도 여전히 명분 때문에 곤란한 일을 겪었던 아들의 왕위계승권리를 더욱더 강화하기 위해서 스스로가 레지나이기에 아들이 국왕이 된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라고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물론 레이디 마거릿은 리치몬드 백작부인이었기에 R이 리치몬드의 약자라고 추정하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만, 학식이 매우 높았던 레이디 마거릿은 아마도 중의적 표현으로 썼을 가능성도 커보입니다.     


요크의 엘리자베스, 헨리 7세의 왕비


레이디 마거릿은 아들이 왕위에 오른뒤 남편인 토마스 스탠리와 더 이상 함께 살지 않습니다. 이것은 정치적 목적으로 결혼했던 레이디 마거릿이 이제 정치적 목적을 이뤘기에 토마스 스탠리와 더 함께 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후 레이디 마거릿은 아들이 준 특권에 따라서 독립적으로 살았으며 수많은 친척들을 돌보는데 집중했다고도 합니다. 물론 남편과 함께 살지는 않았지만 남편과는 우호적인 관계로 자주 만났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레이디 마거릿은 아들이 통치하는 잉글랜드가 점차 안정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비록 아들인 헨리 7세는 레이디 마거릿보다 미리 사망했지만, 레이디 마거릿은 죽기전 손자 헨리 8세가 안정적으로 왕위를 이어받는 것을 보았으며 아마 이제 아들의 후손들이 계속해서 왕위를 이어받을 것이라고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레이디 마거릿도 증손녀가 단독으로 왕위에 오를것이라고는 생각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 젊은 시절 레이디 마거릿으로 추정되는 그림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A_young_woman,_believed_by_some_to_be_a_young_Margaret_Beaufort.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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