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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Jun 14. 2024

잉글랜드의 첫 번째 여왕? : 레이디 제인 그레이

잉글랜드의 여성 왕위 계승자들...여섯번째

유럽에서 여성의 왕위 계승권리가 인정되는 것과 여성이 왕위에 오르는 것은 다른 문제였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헨리 7세와 그의 어머니인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 일것입니다. 헨리 7세는 보퍼트 가문의 장자 가문의 상속녀였던 어머니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를 통해서 랭카스터 가문의 왕위계승권리를 이어받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때 그의 어머니가 생존해 있었지만, 어머니가 여왕이 되어야한다고 한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권리를 자신이 이어받았다고 주장한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튜더 가문이 되면서 여성 후계자밖에 안남는 시점이 이르게 되면서 여성도 왕위계승을 해야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경우를 대비한 인물이 바로 헨리 8세였습니다. 헨리 8세는 오래도록 아들을 얻기 위해 노력했었고 결국 아들인 에드워드를 얻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오래도록 딸밖에 없었었으며 아들이 하나밖에 없었고 살아남은 자녀는 메리와 엘리자베스 그리고 에드워드 밖에 없었기에 만약 에드워드가 일찍 죽을 경우를 대비해야했습니다. 그렇기에 헨리 8세는 죽기전 자녀들과 튜더 가문의 후손들의 계승권리를 명확히 했습니다. 아들인 에드워드가 가장 우선 순위의 상속자였으며 그 다음이 장녀인 메리 그리고 그 다음이 엘리자베스였습니다. 만약 이 자녀들에게도 후손이 없을 경우에는 그 다음 권리로 동생인 메리 튜더의 후손들을 왕위계승자로 지정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재미난 것은 스코틀랜드 왕비가 된 누나 마거릿 튜더의 후손들은 언급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스코틀랜드 왕가쪽 사람이었던 마거릿 튜더의 후손들이 잉글랜드를 장악하게 두려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물론 후대의 결과는 헨리 8세의 예상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헨리 8세와 제인 시무어 그리고 아들인 에드워드 6세 그리고 헨리 8세의 두 딸들인 메리와 엘리자베스


이렇게 정치적으로 명확히 왕위계승순서가 정해져있었지만, 정치적으로 혼란한 상황에서 메리 튜더의 후손중 한명이었던 레이디 제인 그레이가 잉글랜드의 왕위를 이어받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물론 이것은 아주 잠시간이었으며 정치적 음모였습니다. 그리고 끝도 매우 나쁘게 끝나게 됩니다. 하지만 레이디 제인 그레이는 잠시만이라도 잉글랜드의 여왕이라고 주장했었고 이것은 레이디 제인 그레이를 잉글랜드의 첫 번째 여왕으로 봐야하는 지에 대한 논란을 낳게 됩니다.     


결혼후 레이디 제인 더들리로도 알려지게 되지만 결혼 전 이름이 더 잘 알려진 레이디 제인 그레이는 서퍽 공작 헨리 그레이와 그의 아내인 레이디 프랜시스 브랜든의 첫 번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헨리 그레이는 도싯 후작 토마스 그레이의 아들로, 그의 증조할머니는 바로 엘리자베스 우드빌이었습니다.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그녀의 첫 번째 남편인 존 그레이 경 사이에서 태어난 도싯 후작 토마스 그레이가 바로 헨리 그레이의 할아버지였습니다.      


헨리 그레이, 제인 그레이의 아버지


하지만 레이디 제인 그레이의 어머니는 헨리 7세의 외손녀이자 헨리 8세의 조카였던 레이디 프랜시스 브랜든이었습니다. 레이디 프랜시스의 어머니였던 메리 튜더는 정치적 목적으로 늙은 프랑스의 국왕이었던 루이 12세와 젊은 나이에 결혼했었습니다. 루이 12세는 아들을 얻을 목적으로 재혼했지만 결국 메리 튜더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얻지 못하고 사망했습니다. 메리 튜더는 첫 번째 남편이 죽은뒤 자신이 원하는 남자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으며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던 찰스 브랜든과 결혼했었습니다. 물론 복잡한 정치적 문제가 있긴 했지만, 결혼은 정식으로 승인 받았었습니다. 이 메리 튜더와 서퍽 공작 찰스 브랜든의 첫 번째 딸이 바로 레이디 프랜시스 브랜든으로 레이디 제인 그레이의 어머니였습니다.     



제인 그레이의 가계도


레이디 제인 그레이는 어린시절부터 교육을 잘 받았는데 튜더 가문은 자녀들 모두에게 훌륭한 교육을 했었으며 이것은 튜더 가문의 후손이기도 한 제인 그레이에게도 영향을 줬을 것입니다. 특히 10살 무렵이었던 1547년 2월 레이디 제인은 과부가 된 왕비 캐서린 파의 집으로 보내져서 교육을 받게 됩니다. 왕비의 궁정에서 교육을 받는 것은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었을뿐만 아니라 캐서린 파는 헨리 8세의 딸이었던 레이디 엘리자베스도 데리고 있었기에 아마 제인은 엘리자베스와도 친분을 쌓았을 것입니다.      


캐서린 파, 헨리 8세의 여섯번째 아내


캐서린 파는 1547년 5월 에드워드 6세의 외삼촌이었던 토마스 시무어와 재혼했지만 1548년 9월 아이를 낳다가 사망합니다. 이때까지도 제인은 캐서린 파 곁에 있었으며 캐서린 파의 장례식에 참석했었습니다. 하지만 이때부터 제인은 정치적 음모에 휘말리는데, 야심가였던 토마스 시무어는 결국 형인 호국경 서머셋 공작 에드워드 시무어와 대립했었고, 토마스 시무어는 레이디 제인을 에드워드 6세의 왕비로 제안했다는 혐의를 받게 됩니다. 이것은 비록 어린 레이디 제인이 스스로 결정한 문제는 아니었지만, 어른들에 휘둘리더라도 정치적으로 심각한 문제였고, 결국 레이디 제인의 아버지는 레이디 제인을 서머셋 공작의 장남인 허드포드 경과 결혼시키기로 제안하면서 정치적 문제를 피해가려했습니다. 하지만 이 결혼은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아마 1552년 서머셋 공작이 죽고 이후 다른 인물이었던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가 권력을 잡았기 때문일 듯 합니다.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


1553년 봄 레이디 제인은 노섬벌랜드 공작의 아들인 길포드 더들리와 약혼을 하게 됩니다. (참고로 엘리자베스1세가 좋아했던 로버트 더들리는 이 길포드 더들리의 형입니다.) 그리고 1553년 5월 25일 길포드 더들리와 레이디 제인 그레이는 결혼식을 올립니다. 둘의 결혼식과 동시에 레이디 제인의 여동생이었던 레이디 캐서린 그레이는 펌브로크 백작의 아들이자 후계자였던 허버트 경과 결혼했으며, 길포드 더들리의 여동생이었던 캐서린 더들리는 헌팅던 백작의 후계자인 헨리 헤이스팅스와 결혼했습니다.      


이 결혼식 직후, 노섬벌랜드 공작과 다른 내각의 인물들은 건강이 점차 더 나빠지고 있던 에드워드 6세에게 왕위계승자에 대한 조언을 하게 됩니다. 에드워드 6세는 아버지인 헨리 8세가 정한 왕위계승순서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후손없이 죽는다면, 왕위는 그의 이복누나인 메리에게 돌아갈 예정이었습니다. 문제는 에드워드 6세는 철저한 가톨릭 신자로 개신교에 엄청난 반감을 가지고 있던 누나 메리를 너무나 싫어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메리가 왕위를 잇는 것을 원치 않고 있었습니다. 이런 에드워드 6세에게 신하들은 조언을 했는데 누나들 모두를 왕위계승에서 배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에드워드 6세는 메리는 싫어했지만 또 다른 누나이자 같은 개신교도였던 엘리자베스에게는 호의적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마 엘리자베스의 권리를 인정하려한다면 메리의 권리를 무시할수 없었기에 아예 두 누나의 계승 권리를 배제하고 레이디 제인 그레이와 그녀의 후손을 자신의 계승자로 지목하는 유언장을 작성합니다. 1553년 6월 에드워드 6세는 레이디 제인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는 유언장을 작성해서 모두에게 알리도록 명령합니다. 그리고 이 유언장이 정식으로 의회에서 통과된다면 에드워드 6세의 후계자는 이제 레이디 제인이 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1553년 7월 6일 에드워드 6세가 사망하면서 상황은 복잡해집니다. 국왕의 죽음은 잠시 비밀로 묻혔으며 누가 왕위에 올라야하나에 대한 논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노섬벌랜드 공작을 중심으로하는 신하들은 레이디 제인을 왕위에 올리기로 결심합니다. 7월 9일 레이디 제인은 왕위를 받아들였으며(물론 후에 강요받은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10일날 대관식을 위해 런던탑으로 갔으며 잉글랜드와 프랑스(상징적인 의미입니다) 와 아일랜드의 여왕으로 선포됩니다.      


남편과 시아버지에게서 왕위를 제안 받는 제인 그레이, 후대 역사화



레이디 제인을 여왕으로 선포한 그날, 에드워드 6세의 누나이자 헨리 8세의 장녀였던 메리의 편지가 의회에 도착합니다. 국왕이 죽었으니 정당한 왕위계승자로 자신이 왕위에 올라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메리는 지지세력을 모으게 됩니다. 메리의 이복동생인 엘리자베스는 이미 이때 언니인 메리와 껄끄러운 사이가 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언니인 메리를 지지했는데 왜냐면 언니의 권리를 지지하는 것이 자신의 계승 권리를 지키는 길이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7월 19일 의회는 레이디 제인이 아닌 메리를 잉글랜드의 왕위계승자이자 정당한 여왕으로 인정하고 메리를 여왕으로 선포했습니다. 물론 노섬벌랜드 공작은 이를 두고만 보지 않았으며 무력으로 이를 저지하려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노섬벌랜드 공작은 물론 그의 가족들과 레이디 제인등이 체포되었으며, 메리는 동생인 엘리자베스를 비롯한 자신을 지지하는 많은 귀족들과 함께 8월 3일 런던으로 입성했고 이렇게 잉글랜드의 여왕이 됩니다.     


메리 1세 "블리디 메리"


메리 여왕이 즉위 한뒤, 레이디 제인은 남편과 다른 지지자들과 반역죄로 체포되었으며,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게 됩니다. 비록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레이디 제인은 왕가의 친척이었으며, 특히 메리 여왕은 레이디 제인에게 매우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이혼당한뒤 자신이 어려운 처지가 되었을 때 레이디 제인의 어머니인 레이디 프랜시스가 메리와 메리의 어머니를 옹호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메리 여왕은 레이디 제인이 그저 아버지와 시아버지에 휘둘린 불쌍한 여성이라고만 생각했었고 레이디 제인과 그녀의 남편을 살려두었습니다. 하지만 1554년 1월 메리와 펠리페 2세의 결혼 계획에 반대해서 일어난 와이어트의 반란으로 레이디 제인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레이디 제인의 아버지와 남편의 형제들이 이 반란에 동참했었고 이것은 메리 여왕이나 다른 신하들이 레이디 제인을 위협적 존재로 받아들이는 계기가 됩니다. 사실 와이어트의 반란 계획은 메리의 여동생이자 후계자였던 엘리자베스에게도 위협이 되었기에 당연히 이미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은 레이디 제인의 목숨을 건질 방법은 없었을 것입니다. 1554년 2월 12일 길포드 더들리는 참수형에 처해졌으며, 이후 레이디 제인 역시 참수형에 처해지게 됩니다.

      

레이디 제인 그레이의 처형, 19세기 작품


레이디 제인은 정치적으로 애매한 상황에 왕위에 올랐고 그 결과 그녀가 여왕이었는지 아닌지에 대한 의문마저 있습니다. 의회에서 선언한 여왕이었던 제인을 여왕으로 인정해야한다는 사람과 정당한 계승자인 메리의 권리를 가로챈 인물이라는 관점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실 메리가 즉위할 무렵 메리의 정당성을 신뢰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기에 레이디 제인에 대한 안타까움은 덜했었습니다. 하지만 메리의 치세가 잉글랜드에서 엄청난 불만을 가져왔으며 또한 잉글랜드 내에서의 가톨릭에 대한 반감을 더욱더 고조시키게 되면서 상대적으로 레이디 제인에 대한 동정심이 점차 더 커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레이디 제인은 비참하게 죽었지만, 레이디 제인의 어머니는 평온한 삶을 살았으며 동생들도 적어도 반역죄로 처형당하거나 비난받는일 없이 살았기에 더욱더 레이디 제인에 대한 동정심이 커져갔으며, 특히 스튜어트 가문 이후 반 가톨릭 정서가 기본이 된 잉글랜드에서 레이디 제인에 대한 안타까움은 더욱더 커져갔습니다.


레이디 제인 그레이로 추정되는 초상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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