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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Jun 21. 2024

잉글랜드의 첫 여왕 : 메리 1세

잉글랜드의 여성 왕위 계승자들...일곱번째

현재 영국에서 메리 여왕이라고 하면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 1세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사실 잉글랜드에서 메리 1세는 “블러디 메리”라는 무시무시한 별명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종교개혁을 극렬히 반대해서였습니다. 그렇기에 잉글랜드 내에서 가톨릭에 대한 반감이 극심해지면질수록 메리 1세에 대한 평가는 더욱더 나빠졌으며 결국 사람들에게 그다지 기억되고 싶지 않은 여왕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메리 1세가 왕위에 올랐을 때 모든 잉글랜드 사람들이 이 잉글랜드의 첫 여왕에 대해서 엄청나게 기대했다고 합니다.


메리 1세


메리 1세는 잉글랜드의 헨리 8세와 그의 첫 번째 아내인 아라곤의 카타리나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메리 부모의 결혼 생활은  영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이야기로, 처음에는 모두가 만족해하는 멋진 이야기였지만 결국은 진흙탕 싸움으로 끝나는 이야기입니다.


메리의 어머니인 아라곤의 카타리나는 원래 헨리 8세의 형인 아서와 결혼해서 잉글랜드에 왔었습니다. 하지만 결혼한 다음해에 카나리나의 남편인 아서가 사망합니다. 카타리나와 잉글랜드 왕위계승자의 결혼은 외교문제였으며 헨리 7세는 카타리나를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기에 카타리나는 잉글랜드에 애매하게 남아있게 됩니다. 결국 헨리 7세는 아서의 동생이자 이제 후계자가 된 헨리와 카타리나를 결혼시키기로 결정했으며 카타리나의 부모도 이에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카타리나는 헨리의 형수였고 형수와 결혼하는 것은 교회법상 어긋나기에 교회의 동의가 필요한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이 문제는 오래도록 질질 끌었으며 결국은 헨리 7세 생전에는 해결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헨리 8세는 즉위한 직후 카타리나와 정식으로 결혼합니다. 헨리는 어린시절부터 카타리나를 잘 알고 지냈으며 특히 카타리나는 헨리 8세가 어머니를 잃었을 때 무척이나 잘 대해줬었다고 합니다. 아마 젊고 자신감 가득했던 헨리 8세는 어려움에 처한 귀부인인 카타리나를 아내로 맞아서 돕는 멋진 기사님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결혼은 처음에는 행복한 듯 보였습니다. 물론 헨리는 아주 성실한 남편은 아니었지만, 당대 대부분의 왕족들은 정부들이 있었기에 카타리나 역시 남편이 한눈을 파는 것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인내했을 것입니다.


아라곤의 카타리나, 캐서린 왕비, 메리의 어머니


하지만 곧 부부사이에 문제가 발전합니다. 바로 자녀와 후계자 문제였습니다. 카타리나는 결혼 이후 지속적으로 아이들을 낳았습니다만, 살아남은 아이는 딸인 메리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헨리 8세가 아내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얻을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점차 헨리 8세는 조급해지게 됩니다. 특히 그는 자신과 아내 사이에 아들이 없는 것은 그가 형수와 결혼했고 이것은 성경에서 금지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특히 앤 불린이 등장하면서 헨리 8세는 이제 카타리나와 헤어지고 앤 불린과 결혼해서 아들을 얻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전에 교회에서 승인했던 결혼을 다시 같은 이유로 무효로 돌리는 작업은 까다로웠습니다. 게다가 카타리나의 조카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에스파냐의 카를로스 1세)였습니다. 교황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수 있었던 황제는 이모가 이혼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고 당연히 이혼을 못하게 압력을 넣게 됩니다. 결국 이런 상황은 잉글랜드와 로마 교황청 사이의 갈등으로 이어졌으며 헨리 8세는 결국 가톨릭과 헤어지기로 결정하기까지 했습니다.


헨리 8세, 메리의 아버지


이런 상황에서 카타리나는 절대 이혼을 받아들이길 거부했으며 헨리 8세는 카타리나의 의견따위는 무시하고 자신과 카타리나의 결혼을 무효로 돌렸으며, 카타리나를 고립시켰습니다. 하지만 카타리나는  1536년 죽을때까지 이혼을 받아들이길 거부했습니다.


이런 상황은 메리의 삶을 아주 복잡하고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아주 어린 시절 메리는 헨리 8세의 유일한 적자 자녀였으며 이 때문에 잉글랜드의 상속녀가 될 가능성이 컸으며 결혼 시장에서 매우 가치가 컸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어머니와의 결혼을 무효로 주장하면서 메리의 처지 역시 애매해지게 됩니다. 아마 카타리나가 이혼을 받아들이고 둘이 우호적으로 헤어졌다면 메리의 적자 신분은 유지했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았기에 메리는 이제 잉글랜드의 공주가 아닌 그저 사생아로 신분이 추락했으며 “레이디 메리”라고 불리게 됩니다. 게다가 앤 불린은 자신의 지위를 과시 하기 위해서 딸인 엘리자베스의 시녀로 메리를 불러들였고 아마 이것은 메리에게 매우 굴욕적인 일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왕위에 오르기 전의 메리



메리의 어머니가 죽은 해 앤 불린 역시 간통죄로 처형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헨리 8세의 아내가 된 인물은 카타리나와 메리에게 호의적이었던 제인 시모어였습니다. 제인 시모어는 헨리 8세와 메리 사이를 중재했으며 비록 메리는 어머니의 결혼 무효를 인정해야했지만 궁정으로 되돌아올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1537년 제인 시모어가 아들 에드워드를 낳고 사망하면서 궁정은 다시 혼란스럽게 됩니다. 메리는 궁정에서 머물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했기에 궁정에 자주 갔었으며 공식 석상에 참석했었으며 심지어 1542년 크리스마스 축제때에 궁정에 간 메리는 당시 왕비가 없었기에 궁정에서 가장 높은 신분의 여성으로 파티를 주관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헨리 8세와 제인 시모어, 그리고 아들 에드워드와 두 딸들인 메리와 엘리자베스


1547년 헨리 8세가 사망하고 동생인 에드워드 6세가 즉위한뒤 메리는 아버지로부터 많은 영지를 물려받아서 풍족한 삶을 영위합니다. 헨리 8세는 법적으로 에드워드 6세가 그 후손이 없다면 다음 계승자로 이전에 사생아로 만들었던 딸들인 메리와 엘리자베스를 지명했었습니다. 그렇기에 메리는 당연히 왕위계승자중 한명으로 좋은 대우를 받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메리는 동생의 궁정에 거의 가지 않는데 가장 큰 이유는 종교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에드워드 6세는 개신교를 널리 퍼트리고 확립했지만, 메리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기에 신교를 믿는 에드워드 6세의 궁정에 가는 것은 껄끄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에드워드 6세 역시 가톨릭에 헌신하는 누나 메리를 껄끄럽게 여겼으며 이 때문에 누나가 자신의 뒤를 이어 왕위계승을 하는 것을 탐탁치 않아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상황은 1553년 7월 에드워드 6세가 사망했을 때 그가 왕위계승자로 누나들이 아닌 오촌인 레이디 제인 그레이를 선택하는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에드워드 6세 , 메리의 이복 동


레이디 제인이 국왕으로 선포된 직후 메리는 자신의 지지자들을 모으게 됩니다. 여기에는 역시나 종교 문제 때문에 사이가 멀어진 동생 엘리자베스도 있었습니다. 엘리자베스 역시 아마 가톨릭에 헌신하는 언니 메리가 왕위에 오르는 것에 불만이 있었을수 있습니다. 하지만 레이디 제인 그레이가 왕위에 오른 것은 언니 메리의 권리를 무시한것뿐만 아니라 엘리자베스 자신의 권리도 무시한 것이었기에 당연히 언니를 지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메리와 메리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세력이 더 컸으며 메리가 런던으로 입성하기전 이미 의회에서는 메리가 여왕임을 선언했고 메리는 당당하게 이제 잉글랜드의 첫 여왕으로 런던으로 입성했습니다. 그리고 1553년 10월 1일 대관식을 통해서 잉글랜드의 첫 여왕으로 공식적으로 승인받게 됩니다.


메리 1세


메리가 여왕으로 즉위했을 때 사람들은 사실 기대감이 컸었습니다. 첫 여왕이었을뿐만 아니라 이전의 잠시간의 혼란을 잠재울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메리는 첫 번째 정치적 시도부터 이미 잉글랜드 사람들에게 실망감을 주게 됩니다. 왕위에 올랐을 때 메리는 이미 37살의 나이로 당대에는 매우 나이가 많은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자녀를 얻을 가능성이 있긴 했지만 점차 희박해지고 있었기에 서둘러 결혼을 해야했습니다. 잉글랜드에서는 당연히 여왕이 잉글랜드 귀족과 결혼하길 원했습니다. 왜냐면 잉글랜드에서는 남편이 아내의 권리를 통해서 영지를 통치할수 있었고, 이 때문에 여왕이 다른 나라 왕족과 결혼한다면 잉글랜드가 그 다른 나라에 간섭을 받을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메리가 선택한 사람은 바로 사촌 황제 카를 5세의 아들이었던 펠리페 2세였습니다. 아마도 메리는 가톨릭의 수호자 칭호를 받는 황제의 가문인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이었던 펠리페 2세와 결혼하는 것에 대해서 마음에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잉글랜드 내에서는 이것이 프랑스와 갈등을 빚던 에스파냐 합스부르크에 휘말리는 원인이 될 것을 우려했었습니다만 결국 결혼을 강행됩니다. 이 결혼은 매우 인기가 없었는데 여왕은 펠리페가 잉글랜드 정책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결국 남편에게 애정을 가졌던 메리는 남편을 위해서 잉글랜드가 에스파냐의 대 프랑스 정책에 묶이도록 했었고 결국 잉글랜드의 마지막 대륙 영지였던 칼레를 뺏기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메리와 펠리페


메리는 즉위한 뒤 개신교가 자리잡은 잉글랜드에서 강제로 사람들을 가톨릭으로 바꾸려했습니다. 당연히 이런 정책은 반발을 불러일으켰지만 메리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가톨릭으로 개종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처형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수많은 개신교 부유층과 지식인들이 잉글랜드를 떠나 망명해야했었고 망명하지 않은 이들은 화형을 당하기까지 했습니다. 아마 이런 강압적인 메리의 종교 정책은 잉글랜드에서 메리에 대한 극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후대에 “블러디 메리”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후 잉글랜드내에서 가톨릭에 대한 혐오가 극에 달하게 되는 원인 역시 어쩌면 이런 메리의 이전의 강압적 정책 때문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종교나 남편 문제는 나라가 평화롭고 잘 산다면 어느정도 용인 될수 있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메리의 통치기에 잉글랜드의 경제 상황 역시 매우 좋지 않았는데 당대에 기후이상으로 기근이 발생했으며 무역 역시 좋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정부의 재정 역시 좋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은 당연히 흉흉한 분위기와 함께 먹고 살기마저 힘들었기에 더욱더 사람들에게 나쁜기억으로 남게 됩니다.


메리는 자신이 아이를 낳지 못한다면 동생인 엘리자베스가 왕위를 이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다른 사람으로도 바꿀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메리는 아마 개신교도인 엘리자베스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이 때문에 자신의 아이를 너무나 갖고 싶어했습니다. 메리는 몇 번이고 임신했다고 알려졌지만 사실 임신한 것이 아니었고 병이었습니다. 메리의 남편인 펠리페는 아내가 엘리자베스가 후계자가 된다는 것을 싫어만 할 뿐 정치적으로 엘리자베스를 엮거나 영향을 줄 어떤 장치도 마련하지 않는것에 화를 냅니다. 사실 메리는 남편이 엘리자베스의 신랑감으로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을 추천했을 때 도리어 훼방을 놓을 정도였는데 어쩌면 메리는 그때까지도 자신이 아이를 낳을수 있다고 생각했거나 아니면 엘리자베스를 왕위계승에서 배제할수 있다고 생각했어서 그랬을수도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1546년


1557년 말 남편인 펠리페가 잉글랜드에 방문한 뒤 메리는 다시 한번 임신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임신이 아니었습니다. 메리의 건강은 점차 악화되었으며 결국 1558년 11월 17일 사망합니다. 메리는 어머니 곁에 묻히고 싶어했지만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게 됩니다. 그리고 재미난 것은 그렇게나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하지 않았던 여동생 엘리자베스가 죽은뒤 메리와 함께 묻혔다는 것입니다.


메리 1세


메리가 죽은 뒤 자연스럽게 왕위는 여동생인 엘리자베스에게 돌아갔으며 엘리자베스는 자연스럽게 언니의 뒤를 이어서 잉글랜드의 여왕이 되었습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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