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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Jun 28. 2024

사생아에서 위대한 여왕으로: 엘리자베스 1세

잉글랜드의 여성 왕위계승자들...여덟번째

사실 잉글랜드의 첫 여왕인 메리 1세나 그녀의 동생인 엘리자베스 1세는 모두 아버지 헨리 8세에 의해서 어머니들이 결혼무효로 선언되었기에 오래도록 법적으로 “사생아”였으며 왕위계승권리마저 인정받지 못했었습니다. 메리의 경우는 그래도 공주로 오래도록 궁정에 남아있었으며 또한 캐서린 왕비와 더불어 궁정에서 동정을 받았었습니다만, 엘리자베스는 언니인 메리보다 사실 더욱더 혹독한 환경에서 성장했습니다. 엘리자베스의 어머니는 앤 불린으로 많은 이들이 국왕을 “꼬셔서” 정당한 왕비인 캐서린을 쫓아내고 왕비자리에 오른 인물이라고 여겨졌습니다. 특히 헨리 8세는 캐서린과의 결혼을 무효화하고 앤 불린과의 결혼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가톨릭 교회와 결별하고 수장령을 발표했었고, 당연히 잉글랜드 내 가톨릭은 앤 불린을 극도로 싫어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물론 잉글랜드에서 종교 개혁은 당시 시대의 흐름이기도 했습니다. 오래된 가톨릭 교회는 부패해가고 있었으며 이런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서 전 유럽에서 종교개혁운동이 전개되고 있었으며 잉글랜드 역시 이런 분위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점차적으로 종교개혁을 확대했던 다른 유럽 지역과 달리 헨리 8세는 한번에 나라 전체의 종교를 바꿔버렸으며 이런 상황은 기존의 수많은 사람들이 불만을 품게 되는 원인이 되었으며, 당연히 이 개혁의 중심에 있던 앤 불린 역시 엄청나게 미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앤 불린이 처형당한 뒤 엘리자베스가 매우 힘든 처지에 놓이는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앤 불린, 엘리자베스 1세의 어머니


엘리자베스는 1533년 9월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8세와 그의 두 번째 아내인 앤 불린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은 친할머니와 외할머니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레이디 엘리자베스 하워드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기도 했습니다. 엘리자베스가 태어난 해 헨리 8세는 첫 번째 아내인 캐서린 왕비와의 결혼을 무효로하고 앤 불린과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헨리 8세는 후계자가 될 아들을 원했기에 정치적,외교적으로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음에도 캐서린과 이혼을 감행하고 앤 불린과 결혼했었습니다. 하지만 첫 아이가 딸인 엘리자베스라서 실망스러웠을 것입니다. 물론 이후 아이들이 태어날 가능성이 더 컸기에 첫 딸이지만 실망감보다는 기대감이 더 컸을 것입니다.


헨리 8세는 캐서린 왕비와 결혼을 무효로 하면서 딸인 메리의 적자 지위를 박탈했었습니다. 이 때문에 당연히 엘리자베스가 태어났을 때 헨리 8세의 유일한 적자였으며 궁정내에서 관심을 많이 받았습니다. 물론 헨리 8세는 아들이 태어날것이라 굳게 믿었기에 딸인 엘리자베스가 상속녀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다리던 아들은 태어나지 않았으며 헨리 8세는 조바심을 내게 됩니다. 특히 엘리자베스가 태어난 뒤 앤 불린은 유산을 계속했을뿐이었고 이미 아들이 없다는 이유로 첫 번째 아내와 이혼을 했던 헨리 8세는 두 번째 이혼을 못할 것도 없었기에 앤 불린 역시 조바심을 냈었습니다. 하지만 1536년 앤 불린이 다시 한번 아들을 유산하자 헨리 8세는 이제 더 이상 앤 불린을 용납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1536년 9월 간통죄와 반역죄로 앤 불린을 참수형에 처하고 앤 불린과의 결혼을 무효로 돌리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왕비의 시녀이자 캐서린 왕비에게 호의적이었던 제인 시모어와 결혼해버립니다.


제인 시모어와 아들 에드워드 6세와 함께 있는 헨리 8세


어머니가 죽었을 때 겨우 3살도 되지 않았던 엘리자베스는 공주에서 바로 사생아 딸로 신분이 추락하게 됩니다. 게다가 헨리 8세의 다음 아내였던 제인 시모어는 캐서린 왕비와 메리에게는 호의적이었지만 앤 불린에게는 그렇지 않았었고 당연히 앤 불린의 딸인 엘리자베스에게도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물론 엘리자베스가 헨리 8세의 딸인 것은 변함이 없었으며, 신분이 하락했다고 하더라도 헨리 8세는 딸의 양육과 교육을 외면하지는 않았었습니다만 사생아 딸이 된 엘리자베스를 특별히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엘리자베스의 처지가 좀 나아진 것은 1543년 헨리 8세가 여섯 번째 아내인 캐서린 파와 결혼한 뒤 였습니다. 캐서린 파는 헨리 8세에게 후계자가 될 아들뿐만 아니라 딸들에게도 신경쓰도록 했으며 결국 헨리 8세는 딸들인 메리와 엘리자베스의 상속권리를 인정해주게 됩니다. 이것은 비록 공주라는 신분을 회복한 것은 아니었지만, 권리를 회복한 것으로 메리는 물론 엘리자베스의 신분도 크게 바뀐 것으로 언젠가 잉글랜드의 상속녀가 될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했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열정적이었고 상대적으로 다른 이들보다 훨씬 더 지식이 풍부했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딸들의 교육에 열을 올렸던 튜더 가문의 특징이기도 했었습니다.


1547년 헨리 8세가 죽고 엘리자베스의 동생인 에드워드 6세가 즉위하면서 엘리자베스는 부각됩니다. 에드워드 6세는 허약했기에 누나들이자 공식적으로 왕위계승권리를 가진 메리와 엘리자베스의 왕위계승권리가 부각되었던 것입니다. 특히 엘리자베스는 이 이복동생과 괜찮은 사이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의 왕위계승권리는 이후 그녀가 왕위에 오를때까지 힘든 삶을 사는 원인이 됩니다.


1540년대 엘리자베스 1세


아버지가 죽은 뒤 엘리자베스는 계모인 캐서린 파의 보호아래 있었습니다. 캐서린 파는 “야심이 컸다”라고 알려진 에드워드 6세의 외삼촌이었던 토마스 시모어와 재혼했었습니다. 문제는 토마스 시모어가 이제 최소 결혼 적령기를 넘긴 엘리자베스에게 부적절한 행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캐서린 파는 처음에는 이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이후 상황이 심각해지는 것을 인식하고는 추문으로 발전하기 전에 엘리자베스를 다른 곳으로 보냈습니다. 하지만 캐서린 파는 1548년 아이를 낳은 뒤 사망하자, 토마스 시모어는 이제 왕위계승권리를 가진 엘리자베스를 신붓감으로 고려했으며 엘리자베스의 측근이 시모어와 엘리자베스를 연결시키려고도 했습니다. 특히 토마스 시모어가 1549년 1월 반역죄로 체포되자, 엘리자베스는 토마스 시모어와 결혼하려했냐고 공식적으로 심문을 받아야했고 엘리자베스는 끝까지 이를 부인했지만 심문관은 이를 믿지 않으려했다고도 합니다.


토마스 시모어


이런 위기를 넘긴 엘리자베스는 이후 더 신중하고 조용하게 살게 됩니다. 아마 동생인 에드워드 6세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었지만, 도리어 언니인 메리와는 점차 사이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메리와 엘리자베스가 사이가 벌어진 가장 큰 이유는 아마 종교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메리는 엘리자베스의 어머니인 앤 불린에게 큰 원한을 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린 동생인 엘리자베스에게는 오래도록 호의를 가졌는데 아마 엘리자베스는 일단 죄가 없는 아이였을뿐만 아니라 자신과 같은 처지가 되어서 오래도록 홀대 받았기에 동병상련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메리가 완고하게 개신교를 받아들이길 거부하고, 에드워드 6세와의 관계가 악화될 정도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개신교를 받아들인 엘리자베스와의 관계가 멀어졌을 것입니다.


엘리자베스의 언니 메리, 1540년대


1553년 7월 에드워드 6세가 사망하면서 왕위계승에 문제가 생깁니다. 에드워드 6세는 개신교를 받아들이길 거부한 누나 메리가 왕위를 잇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이에 친척이었던 레이디 제인 그레이를 왕위계승자로 만들기로 합니다. 이것은 메리 뿐만 아니라 엘리자베스의 권리를 무시한 것으로, 메리가 동생이 죽은 뒤 지지세력을 모아 런던으로 향했을 때 엘리자베스 역시 언니 편에 섰습니다. 하지만 이런 좋은 관계는 오래가지 못하는데 바로 종교문제 때문이었습니다. 메리는 여왕이 된뒤 다시 잉글랜드를 가톨릭 국가로 만들려했습니다. 그리고 엄청나게 종교적 탄압을 시행하게 됩니다. 당연히 자신의 후계자인 엘리자베스가 신교도임을 못마땅해했으며 엘리자베스에게도 가톨릭을 강요했습니다. 특히 종교 탄압에 불만을 품은 반란 사건이 일어나자, 메리는 엘리자베스도 여기에 가담한 것이 아닌지 의심을 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스스로 자신의 심문을 받길 자처하면서 자신은 관련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메리는 동생을 런던탑에 가두었으며 메리의 측근들중 강경파들은 엘리자베스를 처형하라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메리의 후계자로 엘리자베스를 지지하는 사람들 역시 많았습니다. 이들은 메리 여왕에게 엘리자베스가 죄가 없다는 것을 계속 주장했고 결국 메리 여왕은 엘리자베스를 런던탑에서 풀어주게 됩니다만, 이후 가택 연금을 시키게 됩니다.


잉글랜드의 메리 1세, 엘리자베스의 언니


메리는 지속적으로 엘리자베스를 왕위계승에서 제외시키려고 했습니다. 물론 법적으로 계승권리를 박탈할수 없었지만 자신이 아이를 낳는다면 엘리자베스가 계승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아이를 열렬히 바라게 됩니다. 하지만 메리는 끝내 임신할수 없었으며 특히 1555년 이후 메리가 임신할 가능성이 더욱더 희박해지면서 점차 사람들은 엘리자베스를 왕위계승자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렇게 엘리자베스의 세력이 커지게 되면서 메리와 메리의 남편인 펠리페 2세는 위기감을 느끼게 됩니다. 특히 펠리페 2세는 이제 후계자인 엘리자베스를 좀 더 정치적으로 엮어야한다고 생각했으며 자신의 친척들인 오스트리아 대공이나 사보이 공작 같은 인물들을 엘리자베스의 신랑감으로 추천합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엘리자베스 뿐만 아니라 메리도 싫어했는데 메리는 어쩌면 여전히 엘리자베스를 왕위계승자로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였을 듯합니다. 1558년 메리 여왕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엘리자베스의 계승은 더욱더 명확해졌으며 결국 메리 여왕은 1558년 11월 죽기 직전에 동생인 엘리자베스를 왕위계승자로 인정했으며, 1558년 11월 17일 메리 여왕이 사망하면서 엘리자베스는 이제 언니의 뒤를 이어서 잉글랜드의 여왕이 됩니다.


대관식 복장의 엘리자베스 1세


엘리자베스는 잉글랜드 여왕으로 환영받았지만, 수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종교문제였습니다. 잉글랜드는 헨리8세와 에드워드 6세 시절 개신교의 기틀을 이미 마련했었습니다. 하지만 메리 1세 시절 강제로 가톨릭으로 회귀시키려했었고 이런 상황은 잉글랜드내 복잡한 정치적 갈등을 초래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에스파냐나 프랑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같이 외교적으로 중요한 나라들이 가톨릭을 믿고 있었기에 잉글랜드가 강경한 개신교뢰 회귀할 경우 외교적으로도 문제가 될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엘리자베스와 그의 측근들은 종교적으로 절충안을 찾아서 개신교도와 가톨릭교도 모두가 크게 반발하지 않을 접점을 찾으려 노력했었고 이것은 아마 엘리자베스 시기에 종교 갈등이 어느정도 억누를수 있는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교회의 어머니"  엘리자베스 1세


엘리자베스 시대에는 국내 정치는 안정적이었는데 튜더 가문 통치기 잉글랜드는 국내적으로는 대부분 큰 투쟁이 없었으며 특히 엘리자베스는 잉글랜드 대부분이 인정하는 통치자였기에 내분이 일어날 여지가 별로 없었습니다. 하지만 대외정책은 다른 문제였는데 기본적으로 잉글랜드는 개신교 국가였기에 가톨릭 국가들과 마찰을 피할수 없었으며 또한 섬나라였던 잉글랜드는 해상 무역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고 이것 역시 다른 나라들과의 갈등에 휩쓸리는 원인이 됩니다. 기본적으로 잉글랜드의 대외정책은 방어적이었습니다. 잉글랜드의 위협이 될수 있는 프랑스나 에스파냐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군사작전을 펼치기 보다는 이들 나라와 적대하고 있던 다른 나라 특히 네덜란드에 경제적 지원을 하는 방향으로 나갔었습니다. 하지만 네덜란드 상황이 악화되면서 결국 잉글랜드는 전쟁에 개입하게 되었고 이것은 결국 잉글랜드-에스파냐 간의 전쟁으로 확대되게 됩니다. 특히 잉글랜드에서는 정규군보다는 사략선단을 이용했었습니다. 사략선단은 강력한 힘을 보여줬지만, 잉글랜드 정부에서 완전히 통제할수 없었고 이것은 결국 펠리페 2세가 당대 최강의 함대로 일명 무적함대라고 알려진 에스파냐 함대로 잉글랜드를 직접 공격하기로 결정하는 원인이 됩니다. 1588년 에스파냐의 무적함대가 병력을 이끌고 잉글랜드로 오고 있다는 소식에 모두가 긴장합니다. 하지만 무적함대는 여러 가지 오판을 했으며 이후 잉글랜드 배들의 공격을 받고 결국 함대 전체가 흩어지게 됩니다. 이것은 엘리자베스 시대의 최고의 승리로 자리잡는데 특히 함대가 흩어졌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에스파냐 군의 상륙에 대비하고 있었던 잉글랜드의 모든 이들에게 기쁨을 줬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잉글랜드가 에스파냐에 완전한 승리를 거둔 것은 아니었으며 이후 치러진 해전에서 도리어 잉글랜드가 패배하면서 에스파냐에게 다시 기회를 주는 등의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전쟁은 서로에게 소모적 전쟁으로 흘렀으며 결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은 뒤에 잉글랜드와 에스파냐는 평화협정을 체결하게 됩니다.


무적함대를 물리친 뒤 엘리자베스 1세


엘리자베스 치세의 가장 큰 약점은 바로 후계자 문제였습니다. 엘리자베스가 왕위에 오르자 자연스럽게 결혼 이야기가 나오게 됩니다. 군주의 가장 큰 의무는 후계자를 낳는 일이었으며 엘리자베스 역시 후계자를 낳아야할 의무가 있었으며 그렇기 위해서는 결혼을 해야했습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통치기간 내내 결혼 이야기가 오갔지만 정작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엘리자베스가 왜 결혼하지 않았는가에 대해서는 수많은 이야기만 있을뿐 정확히 확인된 바는 없습니다. 몇몇 학자들은 엘리자베스가 토마스 시무어의 어린시절 행동에 충격을 받아서 성적 행동에 거부감을 느끼게 되었다거나 아이를 낳다가 죽은 계모 캐서린 파를 보면서 아이를 낳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확실한 점은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결혼이 정치적으로 큰 문제를 야기할수 있을 것이며, 그렇기에 엘리자베스는 치세 내내 결혼 문제를 정치적 외교적 수단으로 이용했었습니다.


아마 엘리자베스가 진심으로 결혼하고 싶었던 사람은 바로 로버트 더들리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로버트 더들리와 엘리자베스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였는데, 더들리 가문은 반역자 가문으로 레이디 제인 그레이의 남편이 로버트 더들리의 동생이기도 했습니다. 이후 더들리 가문은 메리 1세 시기 반란에도 가담했는데, 이 때문에 엘리자베스 1세가 로버트 더들리를 만난 것이 런던탑에서 처음 만났다고도 합니다. 물론 이런 것들은 정치적 문제였고 해결할수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로버트 더들리의 아내인 에이미 더들리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결혼은 이루어질수 없게 됩니다. 아마 에이미 더들리는 병으로 사망했을 듯합니다만, 에이미가 죽자 궁정에서는 로버트 더들리가 여왕과 결혼하기 위해서 아내를 죽였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으며 만약 여왕이 정말 로버트 더들리와 결혼한다면 이 소문은 확정적이 될 것이며 엘리자베스에게는 정치적으로 치명적이 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엘리자베스는 로버트 더들리를 총신으로 평생 곁에 두는 것으로 만족해야했습니다.


로버트 더들리


엘리자베스는 외교관계를 위해서 여러 유럽 왕족들과 혼담이 오가게 됩니다. 신교국가들인 스웨덴이나 덴마크의 왕자들과 혼담이 오갔을뿐만 아니라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이나 프랑스 왕자들과도 혼담을 진행했습니다. 이것은 완전히 정치적인 문제로 구혼자들에 대해서 엘리자베스늘 늘 희망을 주는 행동을 했지만, 더 이상 진전이 없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결혼 문제에 대해서 늘 회피하는 반응을 보였는데 이것은 사실 군주로 무책임한 행동이기도 했었습니다. 결국 여왕이 나이가 들면서 여왕이 결혼을 안할 것이라는 것을 모두가 받아들였고, 이후 이런 상황은 잉글랜드 왕위계승을 위한 여러 결혼 이야기로 이어지는데, 특히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허락하지 않은 왕위계승자의 결혼에 대해서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기도 했습니다.


앙주 공작 프랑수아, 엘리자베스 1세의 구혼자중 한명


엘리자베스에게 결혼문제를 제외하고 가장 고민거리였던 것은 바로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였을 것입니다. 메리는 오래도록 엘리자베스의 라이벌로 메리가 프랑스의 도핀느로 있을 때 메리의 시아버지였던 앙리 4세는 엘리자베스가 사생아이기에 왕위계승권리가 없고, 엘리자베스의 고모인 마거릿 튜더의 직계 후손인 며느리 메리가 적법한 잉글랜드의 왕위계승자로 주장했었습니다. 이것은 잉글랜드를 견제하기 위한 프랑스의 명분이었지만, 늘 출생이 약점이었던 엘리자베스에게는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여졌을수 있습니다. 이후 메리가 스코틀랜드로 돌아와서 여왕으로 군림했을 때 엘리자베스는 이웃나라의 여왕으로 그리 나쁘지 않게 봤었습니다. 하지만 메리가 대놓고 잉글랜드 왕위계승권을 위해서 단리경 헨리 스튜어트와 결혼했을 때 엘리자베스는 기분이 상했을 것입니다. 이후 메리는 복잡한 정치 상황 때문에 결국 잉글랜드로 망명생활을 해야했습니다. 메리의 존재는 엘리자베스에게 걸림돌로 작용했는데 특히 메리가 잉글랜드에 있는 동안 잉글랜드의 적들인 프랑스와 에스파냐등과 메리가 연결되고 또 가톨릭들의 중심이 될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으며 실제로 여러 음모에 연루된 것이 밝혀졌습니다. 당연히 메리의 존재는 정치적으로 엘리자베스에게 매우 큰 부담이었고 엘리자베스의 조언자들은 메리를 처형하라고 촉구했다고 합니다. 엘리자베스는 메리의 처형을 늘 거부했었지만 결국 1587년 엘리자베스는 메리를 참수형에 처하게 됩니다. 사실 엘리자베스는 늘 메리의 처형문서에 서명하고는 집행하기전에 이 문서를 찢어버리는 행동을 반복했었는데 엘리자베스는 메리가 정적으로 부담이 되었지만 적어도 한 나라의 군주인 메리는 오직 신만에 목숨을 뺏을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의 이런 반복적 행동에 대해서 메리의 처형을 지지했던 인물들은 여왕이 서명하자 여왕이 다시 번복할 시간을 주지 않고 바로 메리를 처형해버렸고 엘리자베스 여왕은 처형 소식을 뒤에 듣고는 화를 냈다고 합니다.


메리 스튜어트, 프랑스의 왕비, 스코틀랜드의 여왕, 제임스 6세&1세의 어머니


엘리자베스 치세 후반기가 되면서 이제 서서히 엘리자베스 시대에 억눌러왔던 다양한 문제점들이 부각되기 시작합니다. 치세 후반기에 전쟁 때문에 재정이 악화되었으며 또한 총신에 대한 여왕의 과도한 은혜는 권력 다툼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특히 로버트 더들리의 의붓아들로 로버트 더들리 사후 여왕이 총애했던 에식스 백작 로버트 데버루와 여왕의 강력한 조언자였던 윌리엄 세실의 아들로 아버지 사후 힘을 얻게 된 로버트 세실의 정치적 갈등은 여왕 치세 마지막에 혼란을 더해주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에식스 백작 로버트 데버루


1600년대 되면서 엘리자베스의 건강은 서서히 악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여왕의 후계자가 될 인물은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의 아들이었던 제임스 6세였습니다. 잉글랜드에서는 이제 왕위계승자를 준비해야했고 스코틀랜드와 비밀리에 협상을 시작했습니다. 제임스 6세 역시 자신이 유력한 잉글랜드 왕위계승자임을 알고서는 이전부터 잉글랜드의 귀족들에게 호의적인 체스쳐를 취하고 있었는데 이를테면 자신의 첫 번째 딸이 태어났을 때 잉글랜드 여왕을 대모로 삼았으며 이 딸의 이름은 여왕의 이름을 따서 엘리자베스라고 이름붙였습니다. (이 엘리자베스 스튜어트가 바로 조지 1세의 외할머니로 조지 1세에게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리를 가져다준 사람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


결국 1603년 3월 엘리자베스 1세는 사망했고, 바로 스코틀랜드의 국왕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국왕으로 선포되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죽은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있는 언니 메리 1세의 무덤에 함께 묻혔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죽기전 자신의 치세가 언니 메리의 치세처럼 완전히 묻히고 후손조차없는 자신도 잊혀진 여왕이 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의 치세에는 셰익스피어 같은 뛰어난 문학가등이 나왔고 연극등 예술 분야의 전성기를 이루었고 이것 하나만으로도 엘리자베스 시대를 기억할만 했습니다. 이런 문화적 전성기는 엘리자베스 치세를 후대에 좋게 보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스튜어트 시대에 잉글랜드는 내전등으로 매우 혼란한 상황이 되었으며 이것은 스튜어트 시대 이전에 내전이 없었던 평화로운 시기인 엘리자베스 시대를 더욱더 좋게 기억하는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엘리자베스 1세에 대해서 후계자를 두지 않은 무책임한 군주이자 실패한 전쟁의 책임자라고 이야기하기 보다는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막아서 잉글랜드를 보호했으며 잉글랜드의 문화를 꽃피우게한 위대한 군주로 더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엘리자베스 1세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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