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의 여성 왕위 계승자들....아홉번째
스튜어트 가문이 잉글랜드 왕위를 물려받으면서 사실상 현재 영국 지역을 한 왕가가 통치하게 됩니다. 하지만 스튜어트 가문 통치기의 브리튼 섬은 혼란한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찰스 1세 시기 갈등이 커지는데 스코틀랜드의 전통과 잉글랜드의 전통이 달랐을뿐만 아니라 종교적 문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것은 아마 더 강력한 잉글랜드쪽에서 스코틀랜드의 국왕이 잉글랜드의 국왕이 되면서 스코틀랜드에 흡수될 것을 걱정했을 것이며, 반면 스코틀랜드에서는 오래도록 잉글랜드에 대항해서 독립을 유지했었는데 잉글랜드 식으로 통합될 것을 우려한 것이 내전의 기본적 배경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찰스 1세 시기 국왕과 국왕에 반대하는 세력이 내전을 치루게 되는데 승리한 쪽은 반 국왕파였습니다. 결국 찰스 1세는 참수형에 처해지고, 잉글랜드는 올리버 크롬웰을 “호국경”으로 만들어서 통치하는 공화국이 됩니다.
하지만 올리버 크롬웰을 중심으로하는 “공화국”은 결국 올리버 크롬웰이 죽으면서 무너졌으며, 찰스 1세의 아들이었던 찰스 2세가 1660년 다시 잉글랜드의 국왕이 되면서 스튜어트 왕가가 다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로 돌아왔고 왕정이 재개됩니다. 찰스 2세는 의회에 많은 것을 양보하면서 왕정을 유지했었습니다만, 동생이자 후계자였던 제임스 7세&2세 시기가 되면서 다시 한번 갈등이 커지게 됩니다. 특히 가톨릭과 개신교간의 갈등이 극에 달하게 되었는데 가톨릭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치적 문제로 인정하길 거부했던 찰스 2세와 달리 제임스 7세&2세는 가톨릭 종교를 대놓고 인정했으며 이것은 결국 겨우 평화를 유지하고 있던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다시 붙였고, 결국 다시 국왕을 다시 쫓아내고 다른 국왕을 모셔오게 됩니다. 사람들이 모셔온 사람이 바로 메리 2세였습니다.
메리 2세는 1662년 당시 요크 공작이었던 제임스 7세&2세와 그의 아내인 앤 하이드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메리의 어머니였던 앤 하이드는 찰스 1세의 신하로 찰스 1세가 참수형당한뒤 네덜란드로 망명한 찰스 2세를 따라 네덜란드로 갔었습니다. 그리고 앤 하이드 역시 네덜란드로 갔으며, 찰스 2세의 누나이자 오라녜 공비였던 프린세스 로열 메리의 시녀가 됩니다. 그후 앤 하이드는 찰스 2세의 동생인 요크 공작 제임스를 만나 사랑에 빠졌으며 모두의 반대에도 제임스는 앤과 결혼을 하기로 결정합니다. 앤의 아버지 마저 이 결혼에 반대했지만, 찰스 2세는 의지가 강한 앤 하이드가 동생에게 도움이 될것이라고 찬성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왕정이 복고된 뒤 앤 하이드는 임신해서 배가 불러왔기에 제임스와 앤은 1660년 9월 둘은 정식으로 결혼을 하게 됩니다. 둘 사이에서는 여덟아이가 태어났지만 딸인 메리와 앤 외에는 모두 유아기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습니다.
메리는 태어나면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제2왕위계승자로 오래도록 지냈었는데, 사실 메리의 부모는 모두 가톨릭을 믿었고 정식으로 가톨릭 신앙을 인정했지만, 메리의 백부였던 찰스 2세는 정치적 이유로 왕위계승자가 되는 메리와 동생인 앤을 개신교도로 성장하도록 했습니다. 메리와 앤은 당대 많은 왕가의 아이들처럼 부모와 따로 떨어져 살았습니다. 메리의 어머니인 앤 하이드는 1671년 사망하는데, 아버지인 요크 공작은 1674년 메리보다 겨우 4살 많았던 모데나의 마리와 재혼했습니다.
메리의 아버지가 재혼한뒤 메리의 새어머니는 아이들을 낳기 시작했습니다만, 아이들은 오래 살지 못했으며 메리는 여전히 중요한 왕위계승자였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메리 역시 정략결혼의 대상이 됩니다. 메리의 백부였던 찰스 2세는 조카를 사촌인 루이 14세의 아들인 도팽 루이와 결혼시키고 싶어했습니다. 아마 찰스 2세는 외가인 프랑스와의 관계를 강화하길 원했고 아마 이를 통해서 잉글랜드 내 가톨릭 세력을 좀 더 강화해서 자신은 물론 가족들의 가톨릭 종교를 인정받는 것을 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의회는 또다른 프랑스와의 관계를 반대했으며, 대신 메리의 사촌이자 신교도였던 오라녜공 빌렘과 결혼하는 것을 선호하게 됩니다. 찰스 2세는 처음에 이를 원치 않았지만 의회의 강력한 지지와 또한 정치적 상황이 만약 메리가 신교도와 결혼한다면, 가톨릭을 인정해서 인기가 떨어진 메리의 아버지이자 후계자인 동생 요크 공작 제임스의 인기가 올라갈수 도 있다고 생각했었다고 합니다.
메리는 처음에 사촌과 결혼해야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계속해서 그저 울기만 했다고 합니다. 아마 메리는 고향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가야했을뿐만 아니라 전혀 모르는 남자와 결혼해야한다는 사실에 힘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략결혼이었기에 1677년 11월 4일 메리는 런던에서 사촌인 오라녜공 빌렘과 결혼식을 올렸으며, 오라녜 공비로 12월에 네덜란드로 가게 됩니다.
메리의 남편이 된 오라녜 공 빌렘 3세는 오라녜 공 빌렘 2세와 메리의 고모였던 찰스 1세의 장녀인 프린세스 로열 메리의 아들이었습니다. 빌렘 3세는 1650년 아버지가 죽은 8일 뒤에 태어났는데, 이 때문에 그는 어린시절부터 아버지의 영지를 세습 받긴 했지만 네덜란드 지방에 대한 통치 권리를 행사할 수 없었습니다. 특히 잉글랜드와 네덜란드와의 관계에서 올리버 크롬웰이 영향력을 행사했고 찰스 1세의 외손자인 빌렘 3세가 네덜란드에서 정권을 잡는다면 문제가 될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적극적으로 빌렘 3세의 통치를 가로 막았다고도 합니다. 1660년 잉글랜드에서 왕정이 복고된 그해 빌렘의 어머니인 프린세스 로열 메리가 사망했는데 메리는 죽기전 오빠인 찰스에게 아들을 부탁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빌렘 3세는 여전히 네덜란드의 통치권자인 슈타트하우더 지위를 얻지 못했고, 이것은 네덜란드의 정책에 크게 관여할수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했습니다. 1670년대가 되면서 네덜란드의 상황은 매우 어려워졌는데 프랑스와 잉글랜드가 동맹을 맺고 네덜란드를 공격하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1672년 네덜란드는 프랑스가 육로로 침입하고 잉글랜드가 해상에서 공격하면서 매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비록 잉글랜드 국왕은 빌렘 3세의 외삼촌이었지만, 그는 네덜란드를 공격하려던 사촌 루이 14세와 동맹을 맺었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 이전부터 네덜란드와 잉글랜드간의 갈등 역시 덧붙여졌기에 네덜란드를 공격했던 것입니다. 프랑스군이 네덜란드 지역을 점령하면서, 네덜란드에서는 혼란이 왔으며 이전의 국정을 장악했던 이들을 불신했고 결국 네덜란드의 지역들은 점차 하나 둘씩 빌렘을 슈타트하우더로 승인하기 시작합니다. 빌렘은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항복하라는 권고에 대해서 싸우다 죽겠다고 대답했으며 결국 프랑스군의 진격을 저지하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이후 빌렘은 정적들을 몰아내고 슈타트하우더로 완전히 승인받았으며 네덜란드의 국정을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빌렘의 목표는 프랑스의 루이 14세를 저지하는 것이 되었으며 네덜란드는 반 프랑스 동맹에 동참해서 전쟁을 했으며 성과를 거두게 됩니다. 그리고 잉글랜드 내에서는 가톨릭 국가이자 오랜 숙적이었던 프랑스와 동맹을 맺는 것 보다 같은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와의 동맹이 더 낫다고 판단했으며 그렇기에 당시 가장 유력한 왕위계승자인 메리를 빌렘과 결혼시키기로 했던 것입니다. 물론 빌렘 역시 메리와 그녀의 동생인 앤 다음으로 잉글랜드 왕위계승권리를 가지고 있었고 아마도 의회에서는 이런 왕위계승 순위 역시 어느정도 고려했을 것입니다.
사실 네덜란드에서는 메리와의 결혼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는데, 가장 큰 이유는 빌렘의 어머니였던 프린세스 로열 메리가 네덜란드에서 매우 인기가 없었고, 이것은 잉글랜드 공주에 대해서 그다지 호의적이 되지 않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빌렘은 이 결혼으로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동맹을 저지할수 있을뿐만 아니라 자신과 아내의 왕위계승권리를 더욱더 확고히해서 잉글랜드 왕위계승 가능성 역시 커질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활기차고 사교적이었던 메리는 네덜란드에서 인기를 얻게 됩니다. 하지만 결국 직후 개인적인 불행을 겪는데 바로 결혼 몇 달만에 임신한 메리는 전쟁을 치루고 있던 남편을 방문했다가 유산했던 것입니다. 이후 메리는 몇 번 더 유산을 했으며 이후 아이를 가질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마 메리에게는 이것은 큰 타격이었을 것입니다. 메리는 네덜란드에서 살면서 점차 남편과 애정이 깊어졌고 남편인 빌렘 역시 아내와의 사이가 좋아졌습니다. 특히 개신교에 대한 열정은 둘은 서로 더 하나로 묶어주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1685년 2월 메리의 백부인 찰스 2세가 사망하고 메리의 아버지인 제임스 7세&2세가 왕위에 오릅니다. 이때까지도 제임스에게는 살아남은 자녀들이 메리와 앤 밖에 없었기에 메리는 잉글랜드의 더욱더 중요한 왕위계승자로 인식되었습니다. 제임스는 의회와 마찰을 빚었는데 특히 그의 종교 정책은 의회에 거부감을 느끼게 했을뿐만 아니라 메리도 당황스럽게 했습니다. 제임스 7세&2세는 자신이 가톨릭을 믿고 있다고 선언했으며 또한 가톨릭에 대한 차별정책을 바꾸려했었습니다. 당연히 개신교가 대부분이었던 잉글랜드에서는 이에 대해서 반발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갈등은 메리에게도 영향을 줬습니다. 메리는 아버지가 친 프랑스와 친 가톨릭 정책을 쓰는 것에 당황스러웠습니다. 남편인 빌렘은 반 프랑스 정책을 펼치고 있었으며 또한 메리 스스로도 독실한 개신교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마 이런 상황에서 제임스는 중요한 왕위계승자인 딸인 메리가 자신의 편이 되길 원했으며, 또한 프랑스와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서, 딸과 사위가 헤어지길 바라게 됩니다. 결국 제임스 7세&세는 딸의 주변 사람들에게 사위와 딸의 시녀인 엘리자베스 빌리어스와의 불륜을 알리라고 지시했다고 합니다. 엘리자베스 빌리어스는 메리와 동생 앤의 보모였던 프랜시스 하워드의 딸이었기에 메리가 빌렘과 결혼할 때 시녀로 따라왔던 것입니다. 엘리자베스 빌리어스와 빌렘의 관계는 아마도 정치적 목적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당대 군주들은 정부들이 늘 있었으며, 외국인 정부들은 출신 나라나 지역의 이익을 위해서 정부가 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찰스 2세의 프랑스 출신 정부였던 포츠머스 공작부인 루이즈 드 케루얄은 프랑스의 이익을 위해서 그의 정부가 되었습니다. 둘은 1680년경부터 관계를 맺었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빌렘은 아내에게 이를 잘 감추고 있었습니다. 메리는 늦은밤 엘리자베스 빌리어스의 침실에서 나오는 남편을 발견하게 됩니다. 빌렘은 아내에게 엘리자베스 빌리어스와 만난 것은 불륜이 아니라 외교적 문제였다고 발뺌했으며, 메리는 남편의 이 말을 믿었습니다. 물론 아마 메리 역시 남편의 말이 사실이 아닐것이라고 알았을 것입니다만, 메리가 할수 있는 최선은 그저 남편의 말을 믿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당대 군주들에게 정부는 한명쯤은 있어야하는 존재로 받아들여질 정도였으며, 이런 정부의 존재들에 대해서 아내들은 대부분은 그저 참고 살아야했습니다. 물론 참고 살지 않고 헤어지는 경우도 있긴 했지만 이런 경우 대부분 여성들이 피해를 입고 불행하게 살았습니다. 메리 역시 그저 참는 것만이 최선임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메리의 남편인 빌렘은 적어도 아내 앞에서 정부를 인정하지 않는 행동을 해서 아내의 체면을 살려주기까지 했었습니다. 메리는 아무렇지도 않은듯했지만 평생 정부를 마음에 뒀으며, 결국 죽기전에 남편에게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아마 자신의 상처는 물론 남편이 정부와 함께하는 죄악의 삶에서 벗어나길 원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빌렘은 아내가 죽은뒤 아내의 뜻에 따라서 엘리자베스 빌리어스와의 관계를 완전히 정리했다고 합니다.
잉글랜드내의 갈등이 점차 커질수록 제임스의 후계자였던 메리와 메리의 남편인 오라녜공 역시 잉글랜드 내 정치 상황에 더욱더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잉글랜드 내에서는 제임스 7세&2세의 통치에 대해서 거의 마음을 비운 상황으로, 50살이 넘은 국왕이 죽은뒤 신교도인 딸 메리가 왕위를 잇길 바라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1688년 6월 제임스 7세&2세에게 아들이 태어나면서 결국 갈등이 크게 터지게 됩니다. 모데나의 마리는 오래도록 아이를 지속적으로 낳았지만 아이들은 대부분 유산되거나 영유아기를 넘기지 못했었습니다. 그렇기에 당연히 잉글랜드에서는 메리가 왕위에 오를것으로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1688년경 모데나의 마리가 다시 임신한 사실이 알려졌을 때부터 갈등은 이미 시작되는데, 신교측에서는 심지어 왕비가 임신한 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빌렘이 장인에게 축하 편지를 보내자, 이에 대해서 항의하는 편지가 잉글랜드에서 올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1688년 6월 10일 아들인 제임스가 태어나자 더욱더 난리가 납니다. 아이가 태어난 동시에 사실 왕비가 아이를 낳은 것이 아니라 아이를 몰래 데려왔다고 이야기가 퍼져나갔습니다. 제임스7세&2세는 이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서 아들에게 바로 후계자인 웨일스 공 칭호를 부여하고 충성을 맹세하도록 했습니다. 사실 잉글랜드 내에서는 새로 태어난 웨일스 공 자체가 문제였습니다. 그는 당연히 부모를 따라 가톨릭으로 성장할 것으로 이것은 잉글랜드 개신교들 사이에서 완전히 좌절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가 가짜라는 소문이 더 퍼져나갔던 것입니다. 결국 잉글랜드의 귀족들 일부는 네덜란드로 갔으며 “정당한 계승자”인 메리와 메리의 남편인 빌렘이 나서야한다고 설득했습니다. 야심이 컸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루이 14세를 저지할만한 능력까지 있었던 빌렘은 자신이 그저 잉글랜드 여왕의 남편으로 남는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훗날 상황을 봐서는 아마도 이때 이미 빌렘과 메리 그리고 이들에게 도움을 요청한 잉글랜드 귀족들 간에 합의가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1688년 11월 빌렘과 빌렘의 네덜란드 함대는 잉글랜드로 오게 됩니다. 당연히 잉글랜드 대부분 사람들은 빌렘과 그의 군대가 온것에 기뻐했습니다. 제임스 7세 &2세는 사위와 싸워야할지에 대해서 결정해야했습니다. 물론 그에게 충성하는 군대 역시 있었으며, 그도 여러 전투에 참여해서 승리로 이끈 경험이 있는 군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전에 아버지 찰스 1세의 경험 역시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잘못하면 목이 잘릴수도 있는 문제였습니다. 결국 1688년 12월 제임스는 저항을 포기하고 프랑스로 망명하는데 심지어 빌렘은 장인이 도망칠 기회를 주기 위해서 시간을 끌기까지 했었습니다.
1689년 1월 의회가 소집되었으며 메리가 단독으로 왕위에 올라야하는지 아니면 메리의 남편인 빌렘이 왕위에 올라야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진행됩니다. 오라녜공은 남편으로 아내에게 머리를 숙이길 거부했으며, 메리 역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면서 남편이 왕위에 올라야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의회 내에서 메리가 단독으로 왕위에 올라야한다는 사람들 역시 있었기에 결국 메리와 빌렘이 공동으로 왕위에 오르는 합의안이 도출됩니다. 여기서 빌렘은 단순히 메리의 남편이기에 왕위에 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했는데 바로 메리가 후손없이 죽고 빌렘이 재혼해서 자녀를 얻는다면 그 자녀들이 왕위에 오를것이라고 분명히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1689년 4월 11일 메리와 빌렘은 대관식을 치루고 잉글랜드의 메리 2세외 윌리엄 3세가 됩니다. 이 사건은 잉글랜드 내에서 이전의 내전 상황 같은 폭력적 상황없이 왕위가 교체되었기에 “명예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잉글랜드 내 상황이었으며, 스코틀랜드나 아일랜드에서는 윌리엄을 국왕으로 바로 받아들이길 거부했고 그에 대해서 저항을 했으며 당연히 윌리엄은 무력을 동원해서 이들을 진압했었습니다.
윌리엄은 이제 잉글랜드의 국왕이 되었으며 프랑스와 루이 14세를 견제할수 있는 더욱더 강력한 힘을 손에 넣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그가 편안하게 잉글랜드에서 지내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윌리엄은 이제 스코틀랜드나 아일랜드 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참전해야했으며 여전히 네덜란드의 전쟁에도 참전해야했습니다. 남편이 떠나있는 동안 메리는 잉글랜드의 여왕으로 정치에 참여했습니다. 메리는 주로 남편인 윌리엄의 정책과 조언에 따라서 국정을 운영했었습니다만, 자신이 여왕임을 분명히 알았으며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용납하지는 않았습니다. 특히 잉글랜드 내에서 제임스의 복위를 위한 음모가 발각되었을 때 이에 연루된 이들을 절대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은 동생인 앤과의 사이를 멀어지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메리는 말버러 백작 존 처칠을 제임스 2세와의 연락하는 것을 알고는 화를 냈으며, 결국 그의 아내인 사라 처칠(사라 제닝스)를 궁정에서 쫓아내고 싶어했습니다. 사라 처칠은 메리의 동생인 앤의 시녀로 앤의 절친이자 중요한 조언자였기에 앤에게 그녀를 쫓아내라고 했을 때 앤은 거부했고 결국 메리는 말버러를 궁정에서 쫓아냈을뿐만 아니라 이후 그를 반역죄로 체포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상황은 앤이 언니인 메리에게 매우 화를 내는 원인이 되었으며 한동안 앤과 메리는 서로 보려고도 하지 않을 정도가 됐습니다.
메리의 건강은 서서히 나빠지는데, 1694년 메리는 천연두에 걸리게 됩니다. 이동안 언니와 사이가 나빴던 앤은 임신중이었음에도 언니의 상황이 마지막일수도 있다는 것을 걱정해서 언니를 만나러가겠다고 합니다. 물론 메리의 시녀는 이를 거절했는데 후계자가 없던 왕실에 다시 임신한 앤이 병에 걸리는 것을 모두가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처음에 메리는 회복되는 듯보였고 모두가 기뻤습니다만 병은 곧 더 악화되었으며 1694년 12월 28일 32살의 나이로 메리는 사망했습니다.
메리는 사실 한동안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제임스와 그의 후손들을 지지했던 자코바이트들은 메리를 남편의 야망을 위해서 아버지를 쫓아낸 불효한 딸로 묘사했으며 또한 그저 능력있는 남편에게 기대어서 그저 아무것도 못하는 여성으로도 묘사했습니다. 하지만 메리는 자신이 왕위계승자임을 잘 알고 있었으며 심지어 남동생이 태어난 뒤의 정치적 상황에서 자신의 권리를 지켜야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게다가 비록 남편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메리 스스로 능력이 없는 여성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당대 관념대로 여성은 남편을 섬기며 양보해야한다고 생각한 것을 실천했을 뿐이었습니다.
메리가 죽은뒤 윌리엄 3세&2세는 크게 슬퍼했으며 정부와 헤어졌고, 재혼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는 메리의 동생인 앤이 아이를 낳을 것을 오래도록 기대했고 후계자를 얻을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그것은 가망이 없었으며 제임스 7세&2세의 아들인 가톨릭 교도인 올드프리텐더가 왕위에 오를 것을 걱정해서 1700년 가톨릭교도의 왕위계승금지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그리고 윌리엄 3세&2세 역시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이제 왕위는 역시 후계자가 없는 메리의 동생인 앤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