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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Jul 19. 2024

여왕이 되길 원했지만.... : 팔츠의 조피

잉글랜드의 여성 왕위 계승자들...열한번째

1701년 윌리엄 3세&2세는 가톨릭 교도의 잉글랜드 왕위계승금지 법안을 통과시킵니다. 이 법안에 따라서 가톨릭 교도인 수많은 찰스 1세의 후손들이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왕위계승권은 윌리엄 3세의 멀고 먼 친척이었던 팔츠의 조피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팔츠의 조피의 계승권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 의회는 여러 가지 일을 했는데 그중 하나가 조피와 조피의 후손들에게 자동적으로 영국의 시민권을 부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조피와 조피의 후손들이 자연스럽게 영국의 왕위를 이어갈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팔츠의 조피, 하노버의 선제후비


영국의 왕위와는 전혀 관련이 없어보이는 독일식 이름을 가진 조피 폰 데어 팔츠는 사실 스튜어트 가문과 먼 친척관계는 아니었습니다. 조피의 외할아버지가 바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국왕이었던 제임스 6세&1세였습니다. 조피의 어머니는 “보헤미아의 겨울 왕비”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엘리자베스 스튜어트였고, 조피의 아버지는 팔츠의 선제후였던 프리드리히 5세였습니다. 사실 조피는 외가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왕가였을뿐만 아니라 친가는 그 유명한 비텔스바흐 가문이기도 했습니다.


엘리자베스 스튜어트, 제임스 6세&1세의 딸, 팔츠의 선제후비, 보헤미아의 "겨울왕비"


비텔스바흐 가문은 유럽의 오래된 군주 가문중 하나로 이 가문은 라인의 팔츠 그라프령을 가지고 이를 발판으로 바이에른 공작령을 얻은 가문이기도 했습니다. 팔츠 그라프라는 지위는 사실 궁정에서 영주의 대리인을 맡은 지위였습니다. 그중 라인의 팔츠 그라프는 특히 황제의 대리인으로 중요한 지위였으며 이런 지위를 차지한 비텔스바흐 가문은 특히 황제가 없던 공위시대에 엄청나게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레오폴트 4세가 황제가 되면서 가문을 더욱더 힘을 가지게 되었습니다만, 이후 가문은 팔츠 선제후 가문과 바이에른 공작 가문으로 나뉘어졌고 두 가문은 이익 때문에 갈등을 빚고 서로 전쟁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팔츠의 선제후 가문은 전통적으로 제국내에서 힘이 있는 가문이었습니다. 선제후라는 것 자체가 황제를 뽑을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만큼 힘이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했습니다. 조피의 아버지인 프리드리히 5세는 팔츠의 선제후이자 당시 개신교의 중요한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조피의 아버지, 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


조피의 부모가 결혼했을 당시, 사실 유럽은 종교문제로 혼란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조피의 부모는 이 종교문제가 야기시킨 30년 전쟁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보헤미아 왕국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통치를 받고 었는데, 보헤미아 역시 개신교들과 가톨릭들의 갈등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사실 합스부르크 가문은 가톨릭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긴 했지만 카를 5세의 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 같은 인물들은 정치적 이유로 개신교를 용인했었습니다. 하지만 황제 마티아스의 후계자인 조카 페르디난트 대공은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보헤미아의 개신교도들은 페르디난트 대공이 보헤미아를 통치하게 된다면 개신교를 박해할 것을 걱정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마티아스 황제가 죽자, 새로운 국왕을 선출하려했습니다. 원래 보헤미아 왕국에서 군주는 선출제였지만, 제국의 황위처럼 합스부르크가문이 이어가고 있었으며 선출은 그저 형식적인 일이 되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페르디난트 대공을 반대하는 이들이 뭉쳤고, 유럽의 여러 군주들에게 보헤미아의 국왕이 되어달라고 요청합니다. 사실 유럽의 대부분의 군주들은 황제의 가문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눈치를 봤고 군주가 되길 원치 않습니다. 하지만 유럽 개신교 군주들의 중심인물중 하나였던 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는 이 제안을 수락합니다. 그리고 1619년 11월 프라하의 성 비투스 대성당에서 프리드리히 5세는 보헤미아의 국왕으로 대관식을 치루게 됩니다.


보헤미아의 국왕으로 대관한  팔츠의 프리드리히 5세


하지만 이 상황은 합스부르크 가문 입장에서 보면 반역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황제의 가문이었으며 선제후는 황제의 가신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신하가 감히 황제의 상속영지를 뺏는 것에 대해서 마티아스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조카 페르디난트 2세는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페르디난트 2세는 보헤미아를 공격했으며.1620년 11월 백산전투에서 황제의 군대에 보헤미아 군이 패배하면서 프리드리히 5세의 보헤미아 통치는 끝나게 됩니다. 프리드리히 5세와 그의 아내인 엘리자베스 스튜어트는 겨울인 11월에 시작해서 한해 동안 보헤미아의 국왕과 왕비였기에, 둘을 “보헤미아의 겨울 국왕과 겨울 왕비”라는 별명으로도 부르기도 합니다.


이 전투는 곧 전 유럽으로 번져가는 전쟁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바로 30년 전쟁이었습니다. 30년 전쟁의 출발은 이렇게 종교갈등때문이었지만 실제적으로는 신성로마제국내 패권을 전쟁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30년 전쟁은 독일 통일의 갈림길에선 전쟁이기도 했지만 결국 가톨릭은 물론 개신교 어느쪽도 확고한 승기를 잡지 못했기에 통합을 이루기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신성로마제국이 중앙집권화할 것을 두려워한 외국세력, 특히 프랑스 같은 나라의 개입은 이 전쟁을 더욱더 질질끄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프리드리히 5세는 보헤미아 왕위를 뺏겼을뿐만 아니라 신하로 반역을 했기에 팔츠의 선제후령과 지위도 뺏겼고 그는 가족들과 함께 네덜란드로 망명생활을 해야했습니다. 프리드리히 5세는 자신의 지위를 되찾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했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하고 1632년 36살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프리드리히 5세의 아내인 엘리자베스 스튜어트는 남편을 도와서 정치적,외교적으로 노력을 했었습니다. 사실 엘리자베스 스튜어트는 강력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공주였고 이것은 그녀에게 큰 도움이 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동생 찰스 1세 통치기에 영국 내전이 일어났고 동생 찰스 1세는 결국 1649년 참수형당했으며 왕가는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엘리자베스와 엘리자베스의 자녀들에게 정치적으로 매우 치명적인 일이었을 것입니다.


겨울 왕비의 승리, 엘리자베스 스튜어트와 그녀의 자녀들을 그린 그림


조피는 프리드리히 5세와 엘리자베스 스튜어트의 13명의 자녀들중 막내딸이었습니다. 조피 밑으로 동생인 구스타부스 아돌푸스가 있었을뿐이었습니다. 사실 조피는 위의 오빠들을 거의 알지 못했는데 나이차가 많이 났던 오빠들은 모두들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해서 뿔뿔이 흩어졌으며 조피는 막내 동생인 구스타부스 아돌푸스와 가장 친했지만 그는 어린시절 사망했고 조피에게는 큰 충격이었다고 합니다.


조피와 자매들은 네덜란드에서 자랐는데, 네덜란드는 당시 매우 자유로운 지역으로 학문에 대해 잘 접할수 있었습니다. 특히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스튜어트의 궁정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잇었고 조피와 자매들은 이 사람들을 만나면서 여러 가지를 배울수 있었다고 합니다. 조피는 자라면서 찰스 1세의 아들로 망명생활중이었던 사촌 찰스를 만났고 어머니 엘리자베스 스튜어트는 찰스와 조피가 결혼하길 원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조피나 조피의 오빠인 카를 루드비히가 이를 원치 않았고 결국 결혼은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조피


사실 조피와 형제 자매들의 결혼은 매우 애매한 상황이었습니다. 아들들은 그래도 출세를 위해서 다른 일들을 할수 있었고 혼담이 더 유리했었습니다. 하지만 딸들은 지위는 높았지만 영지를 잃은 군주의 딸들이었으며 외가마저도 몰락했으며 또한 재산도 별로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혼담을 원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조피의 언니들은 나이만 먹고 결혼하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1648년 30년 전쟁이 끝나게 되면서 조피의 오빠이자 후계자였던 카를 루드비히가 다시 팔츠 선제후령의 일부와 선제후 지위를 되찾게 되면서 조피 역시 이제 선제후의 여동생으로 좀 더 결혼을 고려할만한 신붓감이 되었습니다.


조피


찰스와의 혼담이 있은뒤 조피의 오빠인 카를 루드비히는 여동생에게 함께 살자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조피는 오빠의 집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조피는 오빠의 집에서 아주 편치 않았는데 카를 루드비히의 아내였던 헤센-카셀의 샤를로테와 마찰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카를 루드비히와 샤를로테는 전혀 맞지 않는 성격이었는데, 카를 루드비히는 젊은 시절 겪은 좌절로 인해서 좀 더 신중한 성격이었지만 카를 루드비히보다 10살이나 어렸으며 과묵한 남편에게 불만이 가득했다고 합니다. 당연히 남편에게 불만이 많았던 샤를로테는 시누이도 좋게 보지 않았고 심지어 남편과 시누이가 불륜관계라는 이야기마저 떠들고 다녔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피는 조카인 엘리자베트 샤를로테를 돌보면서 위안을 삼았으며 서둘러 결혼해서 오빠집을 떠나고 싶어했습니다. 물론 팔츠 선제후의 불화는 조피가 결혼하기전 부부가 갈라서는 것으로 끝이났습니다.


조피의 오빠 카를 루드비히, 팔츠의 선제후


팔츠 선제후의 여동생인 조피에 대해서 혼담을 원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치적 상황은 물론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 때문에 혼담이 성사되지 않고 조피는 20대 후반까지 미혼으로 지냈습니다만, 결국 1658년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이었던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와 결혼을 합니다. 사실 이 결혼은 복잡한 문제가 있었는데 원래 조피와 혼담을 했던 인물은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아니라 그의 형인 게오르그 빌헬름이었습니다.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막내동생으로 상속 영지가 없었지만, 게오르그 빌헬름은 당시 칼렌베르크 지역을 상속받아서 통치 영지가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조피와 조피의 오빠는 그와의 결혼을 승낙했었습니다만, 결혼에 대한 모든 것이 조율 된 뒤 갑작기 게오르그 빌헬름은 결혼을 원치 않게 됩니다. 사실 이런 상황은 취소하고 싶다고 취소할수 없는 것이 결국 독립된 군주들간의 외교관계가 얽힌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게오르그 빌헬름은 동생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와 조피가 결혼하는 대신 자신이 결혼하지 않고 칼렌베르크 지역을 둘의 후손에게 물려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리고 조피와 팔츠의 선제후는 이를 결혼 조건에 넣고 결혼을 합니다.


조피의 남편,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후에 하노버의 선제후


하지만 이런 결혼 조건은 조피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로 다가오게 됩니다.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막내동생이었으며 게오르그 빌헬름의 동생이자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의 형인 요한 프리드리히가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게오르그 빌헬름이 결혼하지 않더라도 그의 영지는 바로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나 그의 아들에게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요한 프리드리히에게 넘어가게 되어있었습니다. 게다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게오르그 빌헬름의 맹세와 달리 그는 갑자기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고 결국 그녀와 결혼해버립니다. 사실 게오르그 빌헬름은 귀천상혼 했기에 자녀들에게 상속권이 없다고 여겨졌지만, 이후 그는 아내의 지위를 높여주고 자신의 자녀들에게 상속권리를 주기 위해서 노력했기에 조피와 조피의 남편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에게는 더욱더 스트레스였습니다.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 게오르그 빌헬름, 조피의 전약혼자이자 시아주버니, 첼레 공작


조피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여섯명의 아들과 딸 한명을 뒀습니다. 그리고 둘의 바람대로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의 형들에게는 후계자가 될 아들이 없었고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는 여성상속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결국 조피의 남편과 조피의 아들들이 영지를 물려받게 됩니다.


요한 프리드리히, 조피의 시아주버니, 칼렌베르크 공, 재미난 것은 그는 조피의 조카와 결혼했었습니다.


결혼후 조피의 삶은 상속권에 대한 걱정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조피의 남편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능력있는 인물이었으며 영지를 상속받을 명분을 마련했을뿐만 아니라 황제에게 충성을 해서 제국내 지위를 높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에게 빌붙는 사람들이 당연히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역시 결혼하고 얼마지나면서 아내가 아닌 다른 여성들에게 눈을 돌렸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잠시만의 연애였지만 1670년대 아름다운 클라라 폰 플라텐이라는 여성을 정식 정부로 두게 됩니다. 클라라는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궁정에서 선제후비인 조피보다 더 영향력이 있었던 인물이었습니다. 조피는 매우 지적이고 똑똑했지만 조피의 남편은 아내가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게 막았었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정치에 관여하도록 내버려뒀고 이것은 조피에게 아마 치명적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조피는 이런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단지 자신이 정식 아내이기에 클라라가 자신의 지위를 넘보지 못하는데 위안을 얻었고, 매우 더운날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클라라를 데리고 오래도록 정원을 산책하는데 따라오게 해서 힘들게 만드는 것 같이 소소하게 복수하는 정도가 전부였다고 합니다.


클라라 폰 클라텐, 조피의 남편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의 정부


아마 조피가 나이가 들어서 학문에 좀 더 집중하게 된 원인 역시 남편이 정부에게 빠졌기 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클라라를 정부로 만든 시기쯤 조피는 하노버에서 남편 밑에서 일하던 라이프니츠와 우정을 쌓고 그와 교류하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매우 지적이었으며 학문적으로 매우 자유로운 네덜란드에서 성장했던 조피와 라이프니츠는 사상적으로도 잘 어울렸다고 합니다.


조피


조피는 나이가 들면서 남편이나 정치보다는 자녀들의 관계에 더 집중하게 됩니다. 특히 장남인 게오르그 루드비히의 결혼에 대해서 신경씁니다. 그녀는 특히 장남을 친척이었던 잉글랜드의 공주인 앤(후에 앤 여왕)과 결혼시키고 싶어했습니다만, 잘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이후 게오르그 루드비히는 사촌이었던 첼레의 조피 도로테아와 결혼했는데 첼레의 조피 도로테아는 조피가 원래 결혼하려했었던 게오르그 빌헬름의 딸로, 복잡한 상속문제 때문에 조피는 신분이 낮다고 생각했던 조피 도로테아와 아들이 결혼하는 것을 용납해야했다고 합니다.


조피의 장남, 게오르그 루드비히, 하노버의 선제후, 영국의 조지 1세


하지만 이 결혼은 불행했고 부부는 서로 싸워댔었습니다. 조피는 며느리가 못마땅했었지만 그래도 아들부부를 화해시키려고 노력하기도 했었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며느리가 몰래 다른 남자와 야반도주하려던 것이 발각되면서 조피의 아들 부부는 이혼했습니다. 또한 1692년 남편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하노버의 선제후가 되면서 조피 역시 선제후비가 됩니다만 지위가 높아진다고 좋은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장자 상속제도를 선언했는데, 이에 조피의 다른 아들들이 이에 반발했으며 결국 아버지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에 대해서 반기를 들려고 했습니다. 이에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아들들을 추방해버렸고, 조피는 이를 말리려고 했지만 남편이 조피마저 음모에 연루되었는가에 대해서 의심하기까지해서 아무것도 할수 없었습니다.


막시밀리안 빌헬름, 조피의 둘째아들, 조피는 아들이 추방당한후 다시는 만나지 못했습니다.


1698년 1월 조피의 남편은 병으로 사망합니다. 조피는 아내로 남편이 죽기전 마지막으로 남편 곁에서 남편을 간호했었습니다. 그리고 그제야 조피는 겨우 궁정에서 남편의 정부보다 더 인정받고 대접받게 됩니다. 하지만 아들이 하노버의 통치자가 되었으며 조피는 여전히 궁정내에서 아무런 정치적 영향력이 없었다고 합니다.


남편이 죽은 후 조피


조피가 열정적으로 정치에 관여하게 된 것은 1701년 잉글랜드 내에서 가톨릭 교도나 가톨릭 교도와 결혼한 사람의 왕위계승권리를 박탈하는 법률이 통과되면서 였습니다. 찰스 1세의 수많은 후손들은 이 조건에 부합되지 않았으며 또한 조피의 살아남은 오빠들의 자녀들 역시 이에 해당하지 않았기에 결국 조피와 그녀의 후손들이 잉글랜드의 왕위계승자가 됩니다.


이제 조피는 잉글랜드의 왕위계승자가 되었으며 열정적으로 잉글랜드와의 관계에 집중합니다. 사실 잉글랜드 내에서 조피와 조피의 후손들을 지지하는 쪽이 있었지만, 여전히 제임스 7세&2세의 아들인 제임스(올드 프리텐더)가 왕위를 이어야한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특히 앤 여왕은 조피와 조피의 아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조피는 잉글랜드 왕위계승권리를 굳히기 위해서 여러 가지 노력을 했다고도 합니다.


조피


사실 조피는 매우 건강했으며 반면 앤 여왕은 늘 아팠었습니다. 그렇기에 1714년 80살이 넘은 조피가 앤보다 더 건강하고 오래 살것으로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앤이 죽는다면 조피는 이제 연합왕국의 여왕이 될것이었습니다. 하지만 1714년 6월 8일 자신의 정원에서 산책하다가 비를 만났고 비를 피하려고 뛰어가다가 갑작스럽게 쓰러져서 사망합니다. 이 때 조피는 며칠전 앤 여왕으로부터 불쾌한 편지를 받았었고 아마 이 편지에 자극을 받은 것이 아닐까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피가 죽은지 두달도 되지 않은 1714년 8월 앤 여왕이 사망합니다. 그리고 왕위는 조피의 장남이었던 하노버의 선제후 게오르그 루드비히에게 돌아갔고, 게오르그 루드비히는 영국의 조지 1세가 됩니다.


영국의 조지 1세


조피는 매우 높은 신분으로 태어났습니다. 유럽의 오래되고 강력한 군주 가문인 비텔스바흐 가문 출신이자 팔츠 선제후의 딸이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국왕의 외손녀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조피의 신분은 30년 전쟁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모두 물거품이 됩니다. 아버지는 영지를 뺏기고 추방당했으며 영지를 회복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렇기에 조피는 높은 신분만 있을뿐 아무것도 없었고 아마도 이후 조피가 자신의 처지를 잘 이해하고 오래도록 인내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게 된 원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매우 똑똑하고 지적이며 교육을 잘 받았음에도 정치에 전혀 관여할수없이 인생의 대부분을 그저 아내이자 어머니로 참고 살았던 원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조피에게 영국의 왕위계승권은 아마도 자신의 뜻과 재능을 펼칠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 될수 있었을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조피는 영국의 여왕이 되지는 못했습니다만, 그녀의 후손들이 계속해서 영국의 왕위를 이어가게 됩니다.


팔츠의 조피, 하노버의 선제후비, 조지 1세의 어머니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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