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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Jul 26. 2024

모두에게 사랑받던 후계자 : 웨일스의 샬럿

잉글랜드의 여성 왕위 계승자들...열두번째

하노버 가문의 국왕 조지 3세는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샤를로테와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고 수많은 자녀를 얻었기에 왕위계승자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생각은 틀린 것이 밝혀지는데 국왕의 수많은 아들들은 결혼해야하는 의무를 저버리고 결혼하지 않거나 아내와 사이가 나빴습니다. 그렇기에 조지 3세의 수많은 아들들에게서 적자 자녀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나마 1796년 장남 웨일스 공 조지의 유일한 딸인 샬럿이 태어나면서 다음 세대의 왕위계승자가 생겨났습니다. 이 샬럿은 영국에서 오래 기다려온 왕위계승자로 조부모는 물론 영국 국민들 모두에게 사랑받던 공주였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왕위계승전 사망했습니다. 


웨일스의 샬럿 공주


웨일스의 샬럿은 당시 영국의 왕위계승자로 웨일스 공이었던 조지 4세와 그의 아내인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카롤리네의 외동딸로 태어났습니다. 사실 부모의 결혼은 전형적인 정략결혼이었는데 부부는 결혼 직후부터 서로를 못견뎌했으며 대놓고 함께 안 살려고 했는데 샬럿은 이런 부모 사이에서 기적적으로 생긴 아이였고 오래도록 기다려왔던 영국의 왕위계승자이기도 했습니다.


샬럿의 아버지인 웨일스 공 조지는 조지 3세의 장남으로 오래도록 왕위계승자로 교육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성인이 되면서 사고를 치기 시작했으며 아마 이런 그의 행동은 결국 동생들에게도 영향을 줬을 것입니다. 샬럿의 아버지인 웨일스 공이 친 가장 큰 사고는 바로 과부였던 여상의 피츠허버트 부인과 비밀결혼식을 올린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아주 큰 문제였는데 피츠허버트 부인이 이미 한번 결혼했던 여성이며 신분도 그리 높지 않았던 것은 사실 그리 큰 문제가 아닐수도 있었습니다. 피츠허버트 부인과의 결혼에서 가장 큰 문제는 그녀가 가톨릭교도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영국 법률상 가톨릭 교도거나 가톨릭 교도와 결혼한 사람은 왕위계승권리를 박탈하도록 되어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이것은 큰 스캔들을 넘어서 왕위계승과도 연관되는 일이기도 했었습니다.

웨일스 공 조지, 조지 4세, 1790년대


물론 이전에 조지 3세는 국왕의 허락없이 왕가의 사람들이 결혼하지 못하도록하는 법률을 통과시켰으며 만약 허락없이 결혼할 경우 결혼을 무효로 선언할수 있게 했습니다. 그렇기에 왕실에서는 피츠허버트 부인과 웨일스 공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서둘러 웨일스 공에게 알맞은 유럽의 왕가 여성을 결혼시키려했습니다. 웨일스 공 조지는 사실 매우 사치스러운 생활을 좋아했고 이 때문에 빚이 엄청나게 있었습니다. 결국 이런 빚 때문에 조지는 아버지와 의회가 원하는대로 유럽 왕가 출신의 여성과 결혼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선택한 사람이 바로 고종사촌이었던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카롤리네였습니다.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카롤리네는 프랑스 혁명전쟁이 시작될 당시 연합국의 총사령관으로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드와 그의 아내이자 조지 3세의 누나였던 웨일스의 오거스타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카롤리네의 아버지는 뛰어난 군인이었을뿐만 아니라 프로이센의 국왕으로 프리드리히 대왕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프리드리히 2세의 조카이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는 뛰어난 군인이자 프로이센의 국왕의 총애받던 조카였고, 어머니는 영국 공주였기에 카롤리네의 신분은 높아보였습니다만, 사실 카롤리네와 형제 자매들은 그리 행복하지 못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카롤리네의 아버지는 정부를 두고 살았으며 어머니는 이를 용납하기 힘들어했고 이것은 부부간의 불화로 이어집니다. 게다가 카롤리네의 오빠들 대부분은 무능력한 인물로 아버지의 눈에 들지 않았고 이것은 카롤리네의 아버지가 카롤리네의 어머니에게 불만을 갖는 원인이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카롤리네는 딸이었기에 아들들보다 교육에 훨씬 덜 신경썼었고 이것은 후에 카롤리네의 스캔들의 원인중 하나가 됩니다.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카롤리네, 영국의 캐롤라인 왕비


둘의 결혼은 사촌간이었기에 적당한 신분이었을뿐만 아니라 프랑스 혁명전쟁으로 인해서 독일쪽 동맹이 중요했기에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딸과 결혼하는 것은 영국에도 정치적으로 유리한 일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웨일스 공이 결혼을 승낙한 가장 큰 이유는 카롤리네가 영국에서 큰 힘을 쓸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으며, 카롤리네는 남편을 선택할 권리가 없었습니다. 아마 카롤리네는 어차피 정략결혼할 것이라는 미래의 영국의 왕비가 될수 있는 웨일스 공과의 결혼이 나쁘지 않을 것이라 여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둘은 첫눈에 곧 서로가 맞지 않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사실 이전에 이미 결혼 협상을 위해서 왔던 영국 외교관은 웨일스 공과 카롤리네가 맞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다고도 합니다. 부부는 결혼 직후부터 별거했는데, 둘 사이에는 기적적으로 허니문베이비가 생겼고, 1796년 1월 카롤리네는 외동딸이 될 샬럿을 낳게 됩니다. 샬럿은 조지 3세의 첫 적자 손주였고 영국의 그 다음세대 왕위계승자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 2 왕위계승자이기도 했습니다.


웨일스 공의 결혼식


아이가 태어났지만 샬럿의 부모는 사이가 더욱더 나빠졌습니다. 부부는 왕족이었고 아이도 있었기에 화해를 모색하기도 했지만 둘은 만나면 만날수록 서로에 대한 차이만 더욱더 인식했고 둘다 함께 살길 원치 않았고 결국 공식적으로 별거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둘이 별거하는 문제는 별거하는 문제였지만 아이 문제가 남았습니다. 샬럿의 어머니인 카롤리네(캐롤라인)은 당연히 딸을 키우고 싶었지만 샬럿은 왕위계승자였으며 전통대로 다른곳에서 양육됩니다. 문제는 샬럿의 아버지인 조지는 아내가 딸을 만나는 것을 금지시켰었습니다. 


사실 결혼 생활은 부부의 문제이고 부부간의 불화는 남들이 알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샬럿의 부모 문제에서 영국 국민들은 샬럿의 어머니를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샬럿의 어머니인 캐롤라인이 처음에 영국에 와서 조지와 불화를 겪을 때, 조지와 그의 친구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캐롤라인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멀리 외국서 온 젊은 아가씨가 사치스러운 생활에 집중하고 이미 결혼전부터 정부들이 있었을뿐만 아니라 심지어 결혼까지 했었던 남자와 결혼해서 불행하게 된 것에 대해서 영국 국민들은 캐롤라인을 안타깝게 여겼고, 무조건 웨일스 공의 잘못으로 생각했습니다. 사실 왕실에서도 처음에는 무조건 조지의 잘못이라고만 생각했었지만, 캐롤라인의 편지를 대필해주던 비서가 돈을 받고 그 편지를 언론에 흘리면서 문제가 됩니다. 캐롤라인은 교육이 허술해서 프랑스어나 영어를 잘 쓰지 못했고 결국 캐롤라인이 구술하면 비서가 써서 편지를 보냈었습니다. 그런데 그 비서가 이 편지를 빼돌렸는데, 이 편지에서는 불행한 결혼생활에 대한 불평과 더불어 시집인 영국 왕가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던 것입니다. 특히 시어머니에 대한 불만이 많았고, 안그래도 결혼초 시누이의 등쌀에 힘들었던 조지 3세의 왕비이자 캐롤라인의 시어머니였던 샬럿 왕비는 이제 며느리가 아니라 아들을 지지하는 입장이 됩니다.


하지만 여론은 도리어 이런 편지마저 남편쪽 사람에게 도난당해서 언론에 공개되는 일을 당하는 캐롤라인을 더 불쌍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 대해서 캐롤라인보다 웨일스 공을 탓했으며 캐롤라인의 인기는 더욱더 올라가게 됩니다. 사실 이것은 당대 웨일스 공이 정치적으로 엄청나게 인기가 없었기에 그가 하는 모든 행동에 대해서 사람들이 싫어했던 것도 영향이 큽니다.


캐롤라인이 샬럿을 만나는 문제에 대해서도 조지가 일방적으로 비난당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조지가 딸에게 관심도 없으면서 아내를 싫어해서 딸과 아내를 만나지 못하게 하는 비정한 아버지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샬럿이 도리어 어머니와 어려서부터 자주 만나는데 도움이 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캐롤라인을 안타깝게 여겼으며 샬럿을 돌보는 사람중에도 있었기에 캐롤라인과 샬럿을 몰래 만나게 해주기도 했었습니다. 

딸 샬럿과 함께 있는 캐롤라인


샬럿은 영국의 왕위계승자로 어려서부터 인기있는 공주였습니다. 아마 샬럿의 아버지에 대해서 별 기대가 없었던 사람들은 샬럿에게 기대를 했을 것이며 이것은 사람들이 샬럿을 좋아한 원인이 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부모는 별거중에도 여전히 싸워댔고 결국 딸을 두고도 서로 대놓고 싸웠고, 이런 부모의 싸움중에서 자라난 샬럿에 대해서 영국 국민들은 더욱더 안타깝게 여겼기에 샬럿에 대한 호감이 더욱더 올라갔을 것입니다.


샬럿은 자라면서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와 그리고 할아버지인 조지 3세와 더 친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조지 3세는 아팠지만 자신의 유일한 적자 손녀이자 왕위계승자인 샬럿을 만나는 것을 좋아했고 샬럿 역시 할아버지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당연히 샬럿은 어머니에 대해서 더욱더 친밀함을 느꼈는데 당연히 샬럿 주변의 사람들도 대부분 캐롤라인에게 동정적이었고 이런 상황은 샬럿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게다가 조지는 당대 아버지로 당연히 자녀가 어린시절 자녀의 양육에 신경을 쓰지 않았을 것이며 이것은 딸이 어느정도 자란뒤 관여하기 시작했을 때 샬럿에게는 그저 간섭이라고 여겨지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손녀 샬럿을 돌보는 조지 3세


샬럿은 어린시절부터 모두에게 사랑받던 공주님이었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던 얌전한 공주님의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샬럿의 어린시절 놀이 친구는 훗날 샬럿이 매우 남자아이같이 활동적이고 호기심이 많았으며 사고를 자주쳤다고 회상했는데 이를테면 샬럿과 그 친구는 주변 어른 없이 샬럿을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몰래 빠져나가는 일을 하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아마 샬럿이 어린시절부터 매우 독립적이고 자기주장이 강한 여성이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으며 이런 성격은 자라면서 아버지와 마찰을 빚는 원인중 하나가 되었을 것입니다.


물론 샬럿은 왕위계승자로 매우 잘 교육받았습니다. 조지 3세는 사랑하는 손녀의 교육에 엄청나게 신경썼으며 또한 정치적 문제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자기 주장이 강했던 샬럿은 이 교육에 대해서 아주 잘 따르지는 않았으며, 자기가 좋아한 피아노 배우기 정도만을 열성적으로 했는데 덕분에 샬럿은 피아노를 아주 잘 쳤다고 합니다. 물론 샬럿이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이를테면 샬럿은 승마도 매우 잘했고 아버지인 웨일스 공은 이런 딸의 승마 실력을 자랑하고 다닐 정도였다고 합니다.


어린 샬럿


샬럿이 10대 사춘기 소녀가 되면서 점차 더 독립적이고 자기주장이 더 강해집니다. 그렇기에 샬럿은 예법에 맞지 않는 행동이라도 자신이 원한다면 했고, 이런 모습은 예법을 무시하는 모습으로 비춰지기도 했었습니다만, 영국 사람들은 늘 불쌍한 소녀였던 샬럿에 대해서 호의적이었기에 이런 모습은 도리어 격식없는 행동으로 비춰져서 좋아했었습니다. 


1810년대가 되면서 샬럿은 정치적 문제에 엮이게 됩니다. 이때 조지 3세는 광기가 완전히 시작되었고 군주로 수행할 능력이 없다고 여겨졌으며 샬럿의 아버지인 웨일스 공이 섭정으로 일하게 됩니다. 샬럿은 할아버지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고 할아버지가 아프면서 매우 슬퍼했습니다만 정치적인 문제에 엮이게 됩니댜. 샬럿은 아버지 웨일스 공처럼 휘그당원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아버지인 웨일스 공이 섭정이 되면서 휘그당을 중용할 것이라 여겼지만, 웨일스 공은 그러지 않았고 이에 대해서 샬럿은 대놓고 아버지에 반발했다고 합니다. 


웨일스 공은 10대 중반이 되는 딸에 대해서 걱정을 하기 시작합니다. 당대 가부장적 아버지였던 조지는 아마도 딸이 성인이 되어가면서 더욱더 엄격하게 딸을 규제하려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조지는 왕위계승자인 딸이 딸의 지위를 노리는 사람들에게 이용당할 것을 걱정했습니다. 그렇기에 딸을 미혼으로 살고 있던 여동생들과 함께 지내도록 했었는데 이런 상황은 도리어 샬럿이 지루함을 느끼게 했고 주변의 남자들에게 눈을 돌리는 원인이 됩니다. 조지는 딸의 이런 행동에 당황했지만,역시 늘 반항아였던 샬럿의 어머니 캐롤라인은 딸이 자유롭게 연애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기도 했었습니다. 


샬럿


웨일스 공은 딸이 적당한 남편감을 만나서 결혼하길 원하게 됩니다. 그리고 곧 딸의 남편감이 될 사람을 찾게 됩니다. 샬럿의 남편은 영국 여왕의 남편이었기에 정치적으로 외교적으로 엄청나게 중요했습니다. 그리고 웨일스 공과 그 주변 사람들은 당연히 영국에 유리한 남편감을 찾았습니다. 바로 오라녜공 빌렘으로 네덜란드의 후계자였습니다. 이 결혼은 영국과 네덜란드 간의 오랜 관계등을 고려해볼 때 정치적으로 꽤나 괜찮은 혼담이었습니다. 웨일스 공은 딸에게 이 혼담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빌렘을 영국에 초대했었습니다. 이 초대는 성공적이지 않았는데, 웨일스 공의 생일 파티에서 빌렘과 샬럿은 처음 만났지만 이때 빌렘은 다른 사람들처럼 취해있었고 당연히 이런 모습을 샬럿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샬럿은 아버지가 비밀로 했음에도 빌렘이 자신의 남편 후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샬럿은 아마 빌렘과의 결혼에 대해서 고민이 많았을 것입니다. 결혼한다면 아버지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외국인, 그것도 네덜란드의 계승자와 결혼한다면 자신이 영국을 떠나야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샬럿이 이 혼담에 대해서 애매하게 대처하는 동안 웨일스 공은 딸이 결혼을 승낙했다고 받아들였으며 곧 결혼협상이 진행됩니다.  샬럿의 어머니는 딸과 오라녜 공과의 결혼을 반대합니다. 그리고 영국에서는 공주가 외국 왕위계승자와 결혼해서 영국을 떠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이동안 샬럿은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를 따라 영국을 방문한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레오폴트를 만났고 둘은 서로에게 호의적이 되는데 이에 샬럿의 아버지는 레오폴트를 좋게 보게 됩니다.


레오폴트와 만나는 샬럿


이 동안 오라녜공과의 결혼협상이 마무리 되었습니다만, 샬럿이 오라녜 공과 결혼하는 것에 대한 영국내 반대 여론이 커져갔습니다. 그리고 샬럿 역시 결혼하는 조건으로 어머니가 자신을 늘 방문할 수 있어야한다고 했습니다. 물론 웨일스 공은 이런 조건을 받아들일수 없었으며 오라녜공이 이 조건을 거절하자, 샬럿은 그와 파혼해버립니다. 이것은 외교적으로 매우 심각한 문제였기에 웨일스 공은 화가났고 딸을 가택연금시키려했습니다. 물론 이에 샬럿은 격렬하게 반항했고 집을 뛰쳐나가 어머니에게 갔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것은 정치적 문제이기도 했기에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라녜공과의 결혼이 깨진뒤, 샬럿은 가택연금상태가 됩니다. 물론 부녀간에 감정적으로는 화해를 했지만, 정치적인 문제를 이런식으로 처리하는 것에 대해서 웨일스 공은 화가 났을 것입니다. 어쨌든 샬럿은 결국 왕위계승자였고 왕위계승자로 이런 외교적 문제를 개인 감정으로 처리하는 것은 안 될 일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샬럿은 갇혀있는 동안 외부, 특히 어머니와 연락하려고 노력했고, 조카에게 좋은 숙부였던 서식스 공작이 샬럿의 쪽지를 외부로 전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이를 안 웨일스 공은 화를 내면서 동생을 질책했다고도 합니다. 


샬럿은 어머니가 영국을 떠나 사는 문제로 아버지와 다투기도 했지만 결국 서서히 아버지와 화해를 하고 부녀 사이는 좀 더 평온해지게 됩니다. 웨일스 공은 딸과 오라녜 공과의 결혼을 여전히 바라고 있었지만, 샬럿은 자신의 뜻을 들어지 않는 남자와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었으며 대신 다른 남편감을 찾아보고 있었습니다. 결국 오라녜 공은 샬럿과의 결혼을 포기했고, 안나 파블로브나 여대공과 약혼합니다. 이렇게 되면서 샬럿은 완전히 오라녜 공으로부터 자유로워졌으며 이제 자신이 마음에 든 남편감과 결혼할수 있게 됩니다. 바로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레오폴트였습니다.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레오폴트는 작센 공작 가문의 수많은 분가의 일원이었을뿐만 아니라 막내아들이었기에 물려받을 영지도 없었습니다. 사실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가문 역시 힘이 큰 가문이 아니었는데, 가문의 딸인 율리아네가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의 둘째 손자인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대공과 결혼하면서 가문의 운이 펴진 경우였습니다. 레오폴트 역시 누나의 연줄을 통해서 러시아 군으로 복무했으며, 황제 알렉산드르 1세를 따라 영국으로와서 샬럿을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레오폴트, 후에 벨기에의 레오폴 1세, 빅토리아 여왕의 외삼촌, 앨버트 공의 삼촌


1816년 샬럿은 아버지에게 레오폴트와의 결혼을 허락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리고 레오폴트는 영국으로 와서 웨일스 공을 만나게 됩니다. 웨일스 공은 레오폴트를 만난뒤 그에 대해서 좋은 평가를 내리는데 여성을 행복하게 할 남자라고 이야기했고 딸과 레오폴트의 결혼을 허락합니다. 곧 샬럿의 결혼에 대한 조정이 다시 들어가는데 연금이나 지위등에 대한 의회의 협상이 이뤄집니다. 이동안 웨일스 공은 딸을 레오폴트와 자주 만나지 못하게 하는데 딸이 감정적으로 또 결혼을 깰까봐 두려웠다고 합니다. 


1816년 5월 2일 샬럿과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레오폴트는 결혼을 했으며 오래도록 사랑받은 공주의 결혼식을 보기위해 런던에 인파가 엄청나게 몰렸다고 합니다. 


샬럿과 레오폴트의 결혼


샬럿과 레오폴트의 결혼 생활은 매우 행복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부부는 모두에게 환영받는 존재였고 샬럿 역시 결혼 생활에 만족했었습니다. 레오폴트는 샬럿에게 매우 다정한 남편이었을뿐만 아니라 강한 성격으로 자주 흥분하는 아내를 잘 달래는 인물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샬럿과 레오폴트


샬럿은 결혼 3개월만에 첫유산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해인 1817년 4월 다시 아이를 임신했다는 발표가 납니다. 샬럿의 임신은 영국에서 열성적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샬럿은 인기있는 공주였으며 또한 샬럿의 아이는 그 다음 세대 왕위계승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샬럿의 출산 예정일은 10월 이었습니다만, 출산 예정일이 지나도록 별 소식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11월 3일 샬럿은 진통을 시작합니다. 오랜 진통 끝에 11월 5일 살럿은 남자아이를 사산합니다. 의사들은 아이를 소생시키려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대신 샬럿의 상태가 양호한 것만을 확인했습니다. 샬럿은 아들이 죽은채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저 신의 뜻이라고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샬럿이 아이를 낳는 내내 곁에 있었던 레오폴트는 아내가 괜찮은 것을 확인한 뒤 아편제를 마시고 잠을 청했습니다. 


모든 것이 괜찮아 보였지만, 11월 6일 자정이 되면서 갑자기 샬럿은 구토를 하고 복부 통증을 호소했으며 출혈이 일어납니다. 이런 상황에 모두가 당황했는데, 치료에도 샬럿의 출혈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측근은 서둘러 레오폴트를 깨우려했지만 레오폴트는 약을 먹고 잠이 들었기에 깨우기 힘들었고 결국 샬럿은 남편이 일어나기전 사망했습니다. 


샬럿의 죽음


샬럿의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충격이었습니다.샬럿의 아버지는 유일한 자녀가 죽은 것에 너무나 힘들어했고 딸의 장례식에 참석조차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유럽에 있던 샬럿의 어머니는 딸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지조차 못했었고 뒤에 겨우 알고서는 너무나 슬퍼했었습니다. 하지만 샬럿의 남편이었던 레오폴트의 슬픔은 가장 컸는데 기다리던 첫 아이가 태어나는 가장 행복한 시간이 아이와 아내를 잃은 가장 불행한 시간으로 바뀌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레오폴트는 평생 샬럿과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잊지 않았으며, 후에 재혼한 뒤 딸이 태어나자 샬럿의 이름을 따서 샤를로테(벨기에의 샤를로테, 후에 멕시코의 카를로타 황후)라고 이름을 지을 정도였습니다. 


샬럿


샬럿의 죽음은 가족의 슬픔을 넘어서 온 영국의 슬픔이기도 했습니다. 영국 국민들은 어린시절부터 부모의 싸움으로 불행하고 외롭게 자라난 어린 공주에 대해서 애정과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고, 인기 없는 아버지 웨일스 공에 대한 대안으로 언젠가 왕위에 오를 샬럿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랑과 희망을 한몸에 받았던 샬럿의 죽음은 영국 국민들에게도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왕국 전체가 2주 애도기간에 검은색 상복을 입었고 심지어 도박장 조차도 샬럿의 장례식에는 샬럿에게 애도를 표하기 위해서 문을 닫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샬럿의 장례식


샬럿의 죽음으로 영국에서는 조지 3세의 손자대의 합법적 후계자가 없는 상황이 됩니다. 그리고 그동안 결혼하지 않고 정부와 살고 있던 샬럿의 숙부들은 서둘러 재혼했습니다. 이 재혼한 숙부중 한명이 바로 켄트 공작 에드워드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외동딸인 빅토리아는 결국 영국의 여왕이 되었습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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