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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Aug 02. 2024

여제-여왕 : 빅토리아 여왕 (첫번째)

잉글랜드의 여성 왕위 계승자들...열세번째

1817년 11월 웨일스의 샬럿이 사망하면서 영국에서는 다시 왕위 계승문제가 발생합니다. 샬럿은 조지 3세의 유일한 적자 손주였기에 샬럿의 죽음으로는 다시 조지 3세의 손자대 후계자가 한명도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미혼으로 정부들과 살고 있던 샬럿의 숙부들이 왕실에서 인정하는 여성들과 결혼하는 계기가 됩니다. 물론 단순히 이들이 생활을 바꾼 것은 왕위계승 가능성 뿐만 아니라 왕족들의 재정 문제도 한몫했습니다. 조지 3세의 아들들은 자신의 수입보다 더 많이 지출을 하면서 호사스럽게 살았고 이것은 빚으로 남았습니다. 그렇기에 의회가 이 왕자들이 정식 결혼해서 후손을 얻는 것을 지원하기 위해서 돈을 대주기로 했고 이에 왕자들은 더욱더 적당한 신붓감을 찾아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샬럿의 숙부중 한명이자 빅토리아 여왕의 아버지였던 켄트 공작 에드워드 역시 이때 결혼하게 됩니다.     


빅토리아 여왕의 아버지, 켄트 공작 에드워드


1818년 50살의 켄트 공작 에드워드는 31살의 과부였던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빅토리아와 결혼을 합니다. 빅토리아는 이전에 라이닝겐 공과 결혼했었도 카를과 페오도라라는 두명의 자녀를 낳았었습니다. 하지만 1814년 남편이 죽고 과부가 되었고 미성년인 아들 카를의 섭정으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켄트 공작과 빅토리아가 결혼하게 된 계기는 빅토리아의 동생이 바로 웨일스의 샬럿의 남편이었던 레오폴트였기 때문일듯합니다. 사실 부부는 결혼 후 처음에는 돈이 많이 드는 영국에서 사는것보다는 유럽 대륙에서 살았었습니다. 하지만 곧 켄트공작부인은 임신했고, 아이가 영국의 왕위계승자가 될수도 있었기에 켄트 공작 부부는 영국으로 돌아왔고, 1819년 5월 24일 켄징턴 궁에서 후에 영국 여왕이 될 딸 빅토리아를 낳았습니다.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빅토리아, 빅토리아 여왕의 어머니


켄트의 빅토리아가 태어났을 때 빅토리아의 왕위계승서열은 5위였습니다. 왕위계승 서열은 백부들인 웨일스 공이자 섭정 공이었던 조지(후에 조지 4세)와 요크 공작 프레드릭과 클라렌스 공작 윌리엄 그리고 아버지인 켄트 공작 다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웨일스 공과 요크 공작은 둘다 아내들과 불화했고 떨어져 지냈기에 더 이상 적자를 기대할수 없었습니다. 그나마 아버지와 함께 정식으로 결혼했던 클라렌스 공작 윌리엄에게 후손을 기대할수 있었지만 일단 빅토리아가 태어났을 때 이미 나름 중요한 왕위계승자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백부들에게 후손이 없으면서 빅토리아는 더욱더 중요한 계승자가 됩니다. 특히 백부였던 조지 4세나 윌리엄 4세가 즉위했을 때, 다음대 왕위계승자는 빅토리아가 가장 서열이 높은 왕위계승자였고 이 때문에 빅토리아는 날이 갈수록 점차 더 중요한 계승자였고, 특히 윌리엄 4세 시절에는 완전히 왕위계승자로 확정적이었습니다.     


어린 켄트의 빅토리아 공주


하지만 이런 높은 왕위계승 서열은 빅토리아의 어린시절을 매우 불행하게 만들었습니다. 빅토리아의 아버지인 켄트 공작은 빅토리아가 한 살이 되기전에 사망했고, 과부가 된 어머니 켄트 공작부인은 힘든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켄트 공작에게는 결혼전 빚이 여전히 남아있었으며 켄트 공작부인은 이 남편의 빚을 갚아야했습니다. 켄트 공작부인은 독일 출신으로 영어도 서툴렀기에 당연히 돈이 많이 드는 영국을 떠나 독일로 가고 싶어했었습니다만, 빅토리아는 이미 중요한 왕위계승자였고 이 때문에 영국을 떠나는 것을 허락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왕실에서는 켄트공작부인의 경제적 어려운 처지를 그다지 도와주지 않았고 이 때문에 동생인 레오폴트가 자신이 영국으로부터 받던 연금(샬럿의 남편으로 받기로 되어 있던 연금)을 누나에게 지원해주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아기인 빅토리아와 함께 있는 켄트 공작부인


당연히 이런 상황은 켄트 공작부인이 영국 왕실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는 감정을 갖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남편의 측근이었던 존 콘로이에게 의지하는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존 콘로이는 야심이 컸던 인물로 특히 빅토리아가 왕위계승자로 거의 확실시 되면서 이제 빅토리아를 통해서 권력을 잡을 궁리를 했습니다. 빅토리아의 백부들은 나이가 많았기에 빅토리아가 성년이 되기전 죽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습니다. 이미 윌리엄 4세를 제외한 백부들과 심지어 아버지까지 빅토리아가 성인이 되기전 사망했었습니다. 만약 빅토리아가 미성년으로 국왕이 될 경우 당연히 섭정이 필요했고  그럴 경우 어머니인 켄트 공작부인이 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존 콘로이는 자신에게 의존적이었던 켄트 공작부인이 섭정이 되면 자신이 영국에서 권력을 잡을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존 콘로이


이렇게 되면서 빅토리아는 권력을 잡을 도구로 여겨졌으며, 사고로라도 죽을 경우 타격이 컸기에 빅토리아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가 마련됩니다. 이것이 일명 “켄징턴 시스템”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빅토리아는 절대 혼자 있지 못했고, 나이가 들어서도 어머니와 늘 같은 침실을 썼고 또한 늘 누군가가 빅토리아와 어느곳이던 함께 있어야했습니다. 또한 존 콘로이는 빅토리아가 절대적으로 자신의 영향력아래 있길 원했기에 다른 사람들 심지어 친척들과의 교류도 막았습니다. 빅토리아는 고용인들 사이에서 어머니와 존 콘로이와 존 콘로이와 가까운 사람들 외에 다른 친척들과 다른 사람들, 특히 영국 왕가쪽 사람들은 거의 만나지 못했었습니다. 사실 켄트 공작부인은 윌리엄 4세의 사생아 자녀들인 피츠윌리엄 가문 사람들이 궁정에 드나드는 것에 경악해서 딸을 더욱더 영국쪽 친척들과 못만나게 했었지만, 켄트 공작부인의 과한 행동은 공작부인이 다른 마음이 있다고 여기게 했었습니다.      


켄트 공작 부인과 켄트의 빅토리아


빅토리아는 점차 성장해나갔지만 주변 사람들은 이런 빅토리아의 감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제대로 못만나게 되면서 점차 빅토리아는 어머니와 어머니를 조정하는 존 콘로이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게 됩니다. 특히 빅토리아가 점차 성장해가면서 주변에 사람이 필요해지면서 켄트 공작부인과 존 콘로이는 빅토리아에게 개인적 비서로 고용하라고 강요하는데 이것은 빅토리아에게 더욱더 둘을 싫어하는 원인이 되었고 절대 허락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이렇게 빅토리아가 자신의 뜻을 주장할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가정교사인 레첸이 빅토리아를 지지했으며 존 콘로이에게 대항할수 있게 격려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 왕실은 물론 주변 친척들이 걱정을 했습니다. 하지만 윌리엄 4세와 다른 영국 왕가의 걱정에 대해서 이미 반감이 극에 달했던 켄트 공작부인은 이들을 무시하고 있었습니다만, 존 콘로이의 영향력에 대해서 공작부인의 동생이자 1831년부터 벨기에 국왕 레오폴 1세가 된 레오폴트마저 걱정할 정도였습니다. 윌리엄 4세는 대놓고 만찬에 참석한 켄트 공작부인에게 자신은 빅토리아가 성인이 되어서 섭정이 필요없는 1837년 5월 24일까지는 살거라고 말할정도였다고 합니다.      


10대 시절의 빅토리아 공주


그리고 윌리엄 4세의 장담대로 윌리엄 4세는 빅토리아가 성인이 되는 날보다 오래 살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당연히 빅토리아에게는 섭정이 필요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야심 때문에 존 콘로이와 그의 영향력아래 있던 켄트 공작부인은 빅토리아에게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섭정이 필요하다고 선언하는 문서에 서명하라고 강요했습니다. 이런 행동은 빅토리아에게 존 콘로이와 켄트 공작에 대한 반감을 더욱더 크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딸을 보호해야하는 어머니 켄트 공작부인이 존 콘로이에게 놀아나서 이런 행동에 동참한 것에 대해서 빅토리아는 절대 용납할 마음이 없었을 것입니다.      


성인이 되어가면서 빅토리아의 결혼 문제 역시 중요해지게 됩니다. 빅토리아는 윌리엄 4세의 후계자로 영국의 여왕이 될 사람으로 완전히 굳어지면서 빅토리아의 남편은 영국 여왕의 남편으로 힘을 얻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기에 혼담들이 나오게 됩니다. 특히 영국 왕가에서는 빅토리아가 빅토리아와 동갑인 사촌인 캠브리지의 조지(빅토리아의 숙부인 캠브리지 공작 아돌푸스의 아들)과 결혼하길 원했지만 당연히 켄트 공작부인은 대놓고 이 혼담에 대해서 싫어했습니다. 켄트 공작부인과 동생인 레오폴 1세는 조카인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알베르트를 빅토리아의 신랑감으로 생각했습니다. 빅토리아의 백부인 윌리엄 4세는 이 혼담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가장 큰 이유는 켄트 공작부인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으며 대신에 역시 전통적으로 영국의 동맹이었던 네덜란드의 왕자를 선호했다고 합니다. 물론 켄트 공작부인은 이 혼담에 대해서 역시나 싫어했었습니다. 빅토리아는 이런 남편감들을 만나면서 이들에 대해서 여러 가지 평을 남기게 됩니다. 하지만 아직 10대 후반이었던 빅토리아는 딱히 바로 결혼할 마음이 없었으며 빅토리아가 성인이 될 때까지 혼담은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1837년 6월 20일 운명의 날이 옵니다. 빅토리아의 백부였던 윌리엄 4세가 사망했고 이제 빅토리아는 영국의 국왕이 됩니다. 빅토리아는 이 소식이 온 것을 알자, 주변 사람들 모두를 물리치고 홀로 사절들을 만났고 백부의 사망과 자신의 즉위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빅토리아의 행동은 섭정으로 빅토리아에게 영향을 행사하려던 켄트 공작부인과 존 콘로이의 야망을 완전히 꺽는 행동이기도 했습니다.     


백부인 윌리엄 4세의 부음을 듣는 빅토리아 여왕


빅토리아는 영국의 국왕이 되었지만, 하노버 가문의 다른 영지인 하노버 왕국의 상속권리는 얻지 못합니다. 하노버 왕국은 살리카법을 시행하는 곳이었고 여성인 빅토리아가 왕국을 이어받을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왕국은 숙부인 컴벌랜드 공작 어니스트 아우구스투스가 물려받았고 하노버의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로 즉위합니다. 이런 상황은 빅토리아와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간의 갈등을 발생기키는데,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가문의 모든 보석을 자신이 상속받아야한다고 주장했으며, 이것은 영국 왕가에 전해지는 보석들 대부분을 자신의 몫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었습니다. 빅토리아는 이에 대해서 반발했지만 결국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보석들 대부분을 가졌으며, 빅토리아는 이에 대해서 오래도록 맘이 상했었다고 합니다.      


빅토리아 여왕의 대관식 초상화


빅토리아는 여왕이 되었으며 당연히 어머니와 더 이상 함께 살고 싶지 않았으며 어머니 주변 사람들을 보고 싶지 않아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정치적 문제로 발전하는데 존 콘로이는 여전히 켄트 공작 부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여왕에게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려했습니다. 그렇기에 미혼인 여왕이 어머니와 함께 살지 않는 것에 대해서 쑤근거림으로 발전했으며 이것은 여왕이 당시 수상으로 엄청나게 의지했던 멜버른 경과의 관계마저 쑥덕대는 원인이 됩니다. 게다가 이런 상황을 더욱더 악화시킨 것은 켄트 공작부인의 시녀로 여왕의 어린시절 켄징턴 시스템에 동조했었던 레이디 플로라 헤이스팅스에 대한 행동이었습니다. 여왕은 레이디 플로라에 악감정이 있었고 여왕 주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기에 레이디 플로라가 부인과 질병으로 아프자 여왕의 주변 사람들이 레이디 플로라가 사생아를 임신했다고 이야기했고 여왕마저 이에 동조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결국 레이디 플로라는 자신이 임신하지 않았고 병이라는 것을 밝혔고 이것은 여왕을 난처하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레이디 플로라는 병으로 사망했는데 이 상황을 존 콘로이등은 대놓고 정치적으로 이용해서 여왕의 평판을 떨어뜨리는데 일조했다고 합니다.      


즉위후 어머니와 함께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빅토리아 여왕


결국 빅토리아 여왕은 어머니와 어쩔수 없이 한 집에 살아야 했습니다. 물론 어머니의 참실을 자신과 제일 멀리 떨어진 곳에 뒀지만 켄트 공작부인과 그 측근들은 여전히 여왕에게 껄끄러운 존재였으며 여왕에게 부담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중 최고는 여전히 직책을 원하던 존 콘로이였습니다. 결국 여왕은 어머니와 떨어져 살기 위해서는 결혼해야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이제 남편감을 찾게 됩니다.


결혼전 빅토리아 여왕, 사실 여왕은 젊은 시절 파티 엄청나게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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