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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Aug 09. 2024

여제-여왕 : 빅토리아 여왕 (두번째)

잉글랜드의 여성 왕위 계승자들....열네번째

빅토리아 여왕이 남편감을 선택하려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입에 오르내리게 됩니다. 특히 영국 여왕 남편이라는 지위는 상당히 영향력을 행사할수 있는 지위라서 모두가 누가 여왕의 남편이 될지 궁금해했었으며 조금이라도 여왕과 연관된 남자는 주목받았었습니다. 이를테면 여왕이 남편감을 찾고 있을 때, 러시아의 황태자였던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대공(후에 황제 알렉산드르 2세)가 영국을 방문했었습니다. 사실 황태자 역시 신붓감을 찾고 있는 중이었고 잘생긴 황태자와 “요정같았다”라고 알려진 여왕은 곧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한밤까지 파티를 즐겼습니다. 그리고 이런 모습에 곧 어쩌면 러시아의 황태자와 영국 여왕이 결혼할지도 모른다는 소문마저 돌게 했었습니다. 물론 러시아 황태자가 영국 여왕과 결혼하기에는 너무나 정치적으로 복잡했었으며 둘은 이런 관계를 잘 알고 있었기에 그저 호감을 표시한 것 정도가 다였지만 말입니다. (아이러니한 점은 시간이 흐른후 여왕의 아들과 황제의 딸이 결혼하려했을 때 둘다 결사반대했던....)     


결혼전 빅토리아 여왕


빅토리아 여왕은 영국의 여왕이었고 남편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왕이 선택한 남편감은 사촌이었던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알베르트였습니다. 사실 둘은 이전에도 만났었지만 여왕은 그에 대해서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땐 아직 어렸었으며 결혼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할 시기도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진지하게 결혼을 고민하게 되었을 때 이후 영국에서 “앨버트”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될 사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사실 앨버트는 외사촌이었기에 어머니 켄트 공작 부인이 지지하는 남편감이었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빅토리아 여왕의 반감을 생각하면 앨버트는 좀 후보에서 멀어질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왕이 애정을 가지고 있던 외삼촌인 벨기에의 레오폴 1세는 조카인 앨버트를 또 다른 조카인 빅토리아와 결혼시키고 싶어했습니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자신의 가문인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이 영국의 통치 가문이 되는 꿈을 조카를 통해서 이루길 원했다고도 합니다. 어쨌든 영국 여왕의 남편이 되는 것은 가문 전체의 이익이었기에 조카를 남편감으로 밀었고, 결국 빅토리아는 앨버트를 점차 다른 눈으로 보게 되었고 앨버트에 대한 호감이 커졌기에 1839년 10월 15일 여왕은 앨버트에게 청혼했고, 둘은 1840년 2월 10일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의 결혼

  

여왕은 앨버트에게 반해버렸고 그와 결혼을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마 여왕의 삶에서 최고의 선택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여왕의 남편이 된 앨버트는 당대 수많은 남성 왕족들과는 좀 다른 인물이었습니다. 여왕의 외삼촌이었던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른스트 1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앨버트는 어린시절 부모가 불화했고 결국 헤어지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에른스트 1세는 못말리는 바람둥이었고, 앨버트의 어머니인 작센-코부르크-알텐부르크의 루이제는 이를 못견뎌했습니다. 결국 부부는 헤어지게 되었으며, 특히 루이제는 재혼한뒤 다시는 아이들을 만나지 못한채 심지어 병으로 일찍 사망했습니다. 이런 상황은 앨버트와 그의 형인 에른스트의 삶에 큰 영향을 줬습니다. 에른스트는 아버지처럼 될대로 되라는식으로 즐거운 삶을 살기로 결정했던반면, 더 심각하고 진지한 사람이었던 앨버트는 어린시절 불행에 대해서 매우 깊이 생각했고 자신이 크면 절대 자신의 자녀들에게는 자신이 겪은 아픔을 겪게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 여왕과 결혼한 앨버트는 여왕에게 최고의 남편이자 아이들에게는 좋은 아버지가 됩니다.      


앨버트 공


사실 앨버트와 여왕은 동갑이었으며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았던 사람이었기에 결혼후 둘을 당연히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빅토리아 여왕은 어린시절의 어머니와 존 콘로이의 핍박에 대한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매우 고집센 인물이었으며 또한 하노버 가문의 다른 사람들처럼 매우 불같은 성격이기도 했었습니다. 게다가 여왕이라는 지위 때문에 다른 이들이 자신의 뜻에 반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이런 아내와 잘 지내기 위해서는 주로 참는 쪽은 앨버트가 되어야했습니다. 사실 당대는 가부장적 사회였기에 가정내에서 남편이 아내보다 더 권위있는 사람이었고 그렇기에 주로 참는 쪽은 아내였었습니다. 그렇기에 남편이 참아야하는 상황은 사실 당대 남성들에게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앨버트는 행복한 가정을 원했고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했었고 결국 주로 자신이 참는 쪽을 선택했었습니다. 이를테면 빅토리아 여왕은 화가 나서 말싸움을 시작하게 되면 더욱더 화를 냈었습니다. 그러힉에 앨버트는 아내가 화가 나면 싸움을 피하기 위해서 서재로 도망갔다고 합니다. 당대 서재는 남성들만의 공간이어서 아내도 함부로 들어갈수 없었지만, 화가난 여왕은 서재에까지 따라들어왔기에 앨버트는 무조건 서재에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아내의 화가 가라앉을때까지 기다렸다고 합니다. 또 여왕은 말을 하면할수록 더욱더 화를 냈고, 이 때문에 앨버트는 여왕이 화가 나거나 여왕의 문제를 지적할때는 절대 말로 하지 않고 쪽지로 대화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쪽지 대화는 여왕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기에 후에 남편이 죽은 뒤에도 화가나면 화난 상대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쪽지를 주고 받기만 했다고도 합니다.     


빅토리아 여왕


그리고 이런 노력은 여왕의 삶을 매우 행복하게 했을뿐 아니라 당대 모범적인 가족생활의 표본이 되었습니다. 아내와 남편은 서로를 신뢰하고 아이들을 잘 돌보는 멋진 모습이었고 “빅토리아 시대”의 표준적 가정모습으로 남게 됩니다. 물론 앨버트 공의 영국에서의 삶은 쉽지는 않았고, 아내와의 갈등을 참고 인내하는 것 외에 영국내에서 자신을 외국인이라고 무시하는 것도 참아야했습니다. 물론 앨버트는 그저 참지만 않았고 자신이 관심있는 분야에 대해서 다양하게 활동하고 후원했었는데 이를테면 자연과학에 관심이 많았던 앨버트는 영국의 자연과학 분야에 다양하게 후원했었으며 또한 여러 논쟁적 사건에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말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물론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을때는 위험할정도로 승마를 하면서 스릴을 통해서 스트레스를 풀기도 했다고 합니다.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


빅토리아 여왕은 다른 영국의 군주들처럼 영국 정치에 직접적으로 관여할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여왕은 국내 문제와 사건에 열심히 관심을 가지고 행동을 했으며 외교적 문제에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이를테면 여왕은 프랑스와 영국 사이의 관계 개선에 관심이 많았는데 프랑스의 국왕 루이 필리프 1세의 장녀는 빅토리아 여왕이 제일 좋아한 외숙모인 벨기에의 왕비 루이즈 도를레앙이었으며 또한 루이 필리프 1세의 자녀들과 여왕의 사촌들이 결혼한 사이이기도 했었기에 가까운 관계였습니다. 그렇기에 여왕은 남편과 가족들과 함께 공식적으로 프랑스를 방문하기도 했었습니다. 또한 여왕은 이후 프랑스의 황제가 된 나폴레옹 3세와 그의 가족들에게도 호의적이었는데, 특히 나폴레옹 3세의 가족들의 망명을 받아줬으며, 나폴레옹 3세의 아내인 외제니 황후와는 평생 친구가 되기도 했었습니다.      


프랑스의 루이 필리프와 그 가족들과 빅토리아 여왕과 그 가족들


여왕은 남편인 앨버트 공과 모두 아홉명의 자녀를 낳았고 매우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습니다. 하지만 자녀들이 커가면서 자녀들의 문제 역시 조금씩 커져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왕은 군주로 자녀들에게 압박을 가하는 존재였고 아버지인 앨버트가 자녀들을 돌보고 여왕과 자녀들간을 중재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기에 평온한 가정생활이 계속 지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여왕은 이런 남편에게 점차 더 의지했고, 앨버트는 가족을 돌보고 여러 활동을 하면서 점점 더 과로를 하게 되었습니다.      

1851년 만국박람회 개막식때의 여왕과 앨버트공 그리고 가족들


1861년 초 여왕의 어머니인 켄트 공작 부인이 사망했습니다. 여왕은 어린시절의 경험 때문에 오래도록 어머니에 대해서 섭섭함이 있었고, 남편과 결혼한 뒤 어머니와 많이 화해했고 나름 화목하게 지내고 있긴 했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응어리는 남아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죽음뒤 여왕은 어머니가 자신의 어린시절 물건들을 모두 간직하고 있는 것을 보고서 자신을 매우 사랑했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제야 어머니를 용서하고 깊은 슬픔에 빠졌었습니다.


켄트 공작 부인 빅토리아, 여왕의 어머니


하지만 여왕의 이런 슬픔은 그해 말의 슬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1861년 12월 여왕이 사랑하고 의지했던 남편 앨버트가 병으로 사망했습니다. 남편의 죽음은 여왕에게 너무나 큰 충격이었는데 여왕은 “마치 폭풍우 속에 나침반 없이 떠 있는 배 같았다”라고 자신의 심정을 이야기했었습니다. 그리고 여왕의 행복했던 가족 생활은 여기에서 끝이 납니다.     


앨버트 공


여왕은 이후 과부가 된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으며 남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고 오래도록 우울해했습니다. 특히 여왕은 남편이 아프게 된 원인이 장남인 웨일스 공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앨버트의 죽음에 그가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앨버트 공은 죽기전 스캔들을 일으킨 웨일스 공을 만나러 가서 오래도록 아들과 빗속을 걸으며 이야기했고 아들에게 여러 가지 충고를 했었습니다.그리고 돌아온 뒤 아프기 시작해서 사망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여왕은 장남이자 후계자인 웨일스 공 앨버트 에드워드(버티)에게 대놓고 딴지를 걸었으며 후계자인 아들에게 어떤 권한등을 부여하려하지 않았고 정치적 문제에서도 배제하려고 하기까지 했었습니다.      


남편이 죽은 얼마뒤 상복을 입고 아들 레오폴드와 함께 있는 빅토리아 여왕


여왕은 과부로 이제 속세를 떠나 칩거하고 싶어했지만, 여왕은 군주였기에 그럴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여왕은 점차 즐거운 삶을 벗어나 남편을 애도하는 삶을 살았으며 특히 앨버트가 지었던 와이트 섬의 집이나 앨버트가 애정을 가지고 있었던 스코틀랜드 지방에 자주 갔었습니다. 특히 앨버트 공의 스코틀랜드 인 시종중 한명이었던 존 브라운에게 점차 더 의지했는데, 심지어 여왕이 존 브라운과 비밀결혼했다는 소문조차 돌기도 했었습니다.      


존 브라운과 빅토리아 여왕


빅토리아 여왕의 통치기 영국은 세계 최강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산업혁명이 시작된 나라 였던 영국은 이런 과학적 기술을 바탕으로 엄청난 부를 누렸습니다. 게다가 빅토리아 여왕 통치기 영국의 외교 정책 역시 세계 최강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여러 지역의 분쟁에 개입했으며 또한 여러 지역을 장악해서 식민지로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영국 사람들은 당연히 영국과 영국내 식민지들의 군주인 빅토리아 여왕에 대해서 엄청나게 열성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1876년 인도 제국의 여제로 선포되었을 때 이제 여제-여왕이 된 빅토리아 여왕에게 더욱더 열광했었습니다.     


사실 영국은 오래도록 인도를 정식 식민지로 삼기 보다는 동인도 회사의 아래 두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이것은 영국 정부가 직접적으로 인도에 관여하지 않으면서도 인도의 부를 뺏아올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1857년 일명 “세포이 항쟁”으로 시작된 인도의 동인도회사 통치에 대한 반발전쟁은 결국 영국 정부가 이후 직접 인도 통치에 개입하게 이르게 했으며, 복잡한 정치적 조율을 거쳐 1876년에는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의 여제”라는 칭호를 쓰게 된 것이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 1875년

 

빅토리아 여왕은 영국의 군주로 오래도록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물론 여왕은 여러번의 암살 시도를 겪었습니다만, 이들의 시도는 영국 사람들의 여왕에 대한 사랑을 더욱더 보여주는 결과를 낳았으며, 여왕은 이런 사람들의 애정을 좋아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여왕에 대한 신민들의 애정은 여왕의 골든 주빌리와 다이아몬드 주빌리 행사에서 잘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의 다이아몬드 주빌리 사진


빅토리아 여왕은 1861년 사랑하는 남편이 죽은뒤 자신도 곧 남편을 따라 세상을 떠날것이라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여왕의 예상과 달리 여왕은 남편이 죽은 뒤 40년을 더 살았고, 1901년 1월 22일 새 세기가 시작될 때 사망했습니다. 60년 이상 영국을 통치했던 여왕의 죽음에 많은 이들이 슬퍼했고 애도를 표했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의 장례식 행렬


빅토리아 여왕은 남편인 앨버트공과의 사이에서 아홉명의 아이를 낳았으며 이 아이들과 후손들은 유럽의 여러 왕가 사람들과 결혼했고 이 때문에 유럽 왕가 사람들 대부분이 친척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빅토리아 여왕은 일명 “유럽의 할머니”라고도 불리기도 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공 그리고 둘의 아홉아이들


여왕의 첫째아이이자 장녀였던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는 프로이센의 왕위계승자였던 프리드리히와 결혼했고, 결국 프리드리히가 황제 프리드리히 3세가 되면서 빅토리아는  독일의 황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빅토리아의 아들이 바로 제 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사람중 한명이었던 독일의 황제 빌헬름 2세였습니다. 프린세스 로열의 셋째딸인 조피는 후에 그리스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 독일의 황후


여왕의 둘째 아이이자 장남으로 “버티”라는 애칭으로 알려졌던 앨버트 에드워드는 어머니의 뒤를 이어서 국왕 에드워드 7세가 되었습니다. 버티의 아들인 조지는 후에 영국의 국왕 조지 5세가 되었으며, 버티의 딸인 모드는 노르웨이의 국왕 호콘 7세와 결혼해서 노르웨이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영국의 에드워드 7세


여왕의 셋째아이이자 둘째딸이었던 앨리스는 헤센의 대공 루드비히 4세와 결혼해서 헤센의 대공비가 되었습니다. 앨리스의 막내딸이었던 헤센의 알릭스는 후에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2세와 결혼해서 러시아의 마지막 황후였던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가 되었습니다. 앨리스의 장녀인 빅토리아는 친척이었던 바텐베르크의 루드비히와 결혼해서 영국에서 살았는데, 빅토리아의 외손자였던 그리스의 필리포스 왕자는 후에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와 결혼했습니다. 또 빅토리아의 딸이었던 루이즈는 스웨덴의 국왕 구스타프 6세 아돌프와 결혼해서 스웨덴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앨리스, 헤센의 대공비


여왕의 넷째아이이자 아들이었던 에딘버러 공작 앨프러드는 후에 백부의 뒤를 이어서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이 되었습니다. 그의 딸인 에딘버러의 마리는 후에 루마니아의 국왕 페르디난트 1세와 결혼해서 루마니아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앨프러드,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여왕의 다섯째 아이이자 딸이었던 헬레나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크리스티안과 결혼했습니다. 이들의 결혼은 외교적으로 매우 복잡한 결과는 낳았지만, 어쨌든 헬레나의 아들이었던 앨버트는 후에 이름밖에 없긴했지만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 지위를 물려받게 됩니다


헬레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부인

여왕의 여섯 번째 아이이자 딸이었던 루이즈는 영국 귀족이었던 아가일 공작과 결혼했습니다.


루이즈, 아가일 공작부인


여왕의 일곱 번째 아이이자 아들이었던 코넛 공작 아서는 대부였던 웰링턴 공작처럼 영국 육군에서 주로 복무했었습니다. 아서의 장녀였던 마거릿은 스웨덴의 구스타프 6세 아돌프와 결혼했지만 남편이 왕위에 오르기전에 사망했습니다. 현 스웨덴 국왕은 마거릿의 손자이기도 합니다.     


코넛 공작 아서


여왕의 여덟 번째 아이이자 아들이었던 알바니 공작 레오폴드는 혈우병 환자로 오래도록 어머니의 과보호아래 지냈었습니다. 그는 성인이 되어서 결혼했고 두 아이들까지 얻었지만 혈우병 때문에 젊은 나이에 사망했습니다. 레오폴드의 아들이었던 찰스 에드워드는 할머니의 뜻에 따라서 백부인 앨프러드의 뒤를 이어서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카를 에두아르트가 되었습니다만, 1차 세계 대전때 영국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했고, 이후 나치에 연결되어서 2차대전이후 전범으로 처벌받았었습니다. 카를 에두아르트의 딸인 시빌라는 스웨덴의 왕위계승자와 결혼했고 현 스웨덴 국왕의 어머니였습니다.      


알바니 공작 레오폴드


여왕의 아홉 번째 아이이자 딸이었던 베아트리스 공주는 평생 어머니 곁에서 지냈었습니다. 베아트리스의 딸로 에나라는 이름으로 더 잘알려진 바텐베르크의 빅토리아 유제니는 에스파냐의 국왕 알폰소 13세와 결혼해서 에스파냐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현 에스파냐 국왕의 증조할머니이기도 합니다.     


베아트리스, 바텐베르크 공


빅토리아 여왕의 통치 시기는 영국의 최대 전성기중 하나라고 생각되는 시기로 일명 “빅토리아 시대”라고도 알려지는 역사적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이 빅토리아 시대의 중심은 바로 당시 군주였던 빅토리아 여왕이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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