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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Aug 16. 2024

옛 시대의 마지막 군주 : 엘리자베스 2세

잉글랜드의 여성 왕위 계승자들...열다섯번째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는 1926년 당시 요크 공작이었던 조지 6세와 그의 아내인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의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엘리자베스 2세가 태어났을 때는 사실 엘리자베스가 왕위계승자가 될지에 대해서는 그렇게 크게 기대는 하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엘리자베스 2세가 태어났을 때 영국의 군주는 엘리자베스 2세의 할아버지였던 조지 5세였습니다. 사실 조지 5세에게는 아들들이 여럿 있었습니다만, 이 아들들이 결혼해서 가정을 꾸려서 후계자를 얻어야하는 의무에 소홀히 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위의 아들들이 이제 20대 중반을 넘어서게 되는 1920년대가 되면서 아들들이 결혼할 생각을 안하게 되자 특히 조지 5세와 메리 왕비는 조바심을 내게 됩니다. 사실 당시 영국의 왕자들은 결혼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뿐만 아니라 사교계에서 유부녀들과 연애관계로 결혼할 생각이 거의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런 상황은 안그래도 “도덕적으로 건전한 왕가”라는 이미지를 만들려고 했던 조지 5세와 메리 왕비에게 매우 걱정스러운 일이었으며 자녀들을 결혼시키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922년 딸인 프린세스 로열 메리를 먼저 시집보냈는데, 이에 대해서 오빠인 웨일스 공은 동생이 부모의 강요로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하게 됐다고 화를 냈다고도 합니다.     


조지 5세와 메리 왕비, 엘리자베스 2세의 조부모


그리고 뒤를 이어서 결혼한 사람이 바로 엘리자베스의 아버지였던 요크 공작 앨버트 였습니다. 앨버트 역시 20대초에 유부녀인 여성을 따라다녔다고 합니다만, 조지 5세는 아들에게 이를 정리하라고 요구했고 결국 앨버트는 부모의 말에 따라서 관계를 정리한 뒤 신붓감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앨버트가 찾아낸 신붓감은 바로 스코틀랜드 귀족 스트레스모어 백작의 딸이었던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이었습니다. 1921년 앨버트는 엘리자베스에게 청혼했습니다만, 엘리자베스는 요크 공작이 아닌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두고 있어서 요크 공작을 거절했습니다. 심지어 메리 왕비가 엘리자베스를 만나기까지 했었고, 왕비는 엘리자베스를 마음에 들어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후 1922년 동생 메리의 결혼식에 들러리가 된 엘리자베스에게 요크 공작은 다시 한번 청혼했습니다만 왕실 가족이 된다는 것이 부담된다는 이유로 다시 한번 거절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국 1923년 요크 공작은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과 정식으로 결혼해서 요크 공작 부인이 되었습니다.     


조지 6세와 엘리자베스 왕비, 엘리자베스 2세의 부모


엘리자베스는 오래도록 조지 5세 부부의 유일한 며느리였으며, 요크 공작 부부가 결혼해서 자신들이 원하는대로 착실한 결혼생활과 왕실의 의무를 수행하는 모습에 국왕 부부는 매우 만족해했으며 며느리에 대해서도 좋게 생각했었습니다. 그리고 이 요크 공작 부부의 첫딸이 바로 엘리자베스 였습니다. 엘리자베스의 세례명은 엘리자베스 알렉산드라 메리로 증조할머니인 알렉산드라 왕비와 할머니인 메리 왕비 그리고 어머니인 엘리자베스의 이름을 물려받은 것이었습니다. 할아버지였던 조지 5세는 손녀의 세례명에 대해서 아들이 빅토리아라는 이름을 넣지 않은 것에 대해서 야심이 없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엘리자베스가 태어난 4년후에는 동생인 마거릿 공주가 태어났고 자매는 함께 성장하게 됩니다.     


엘리자베스 2세의 세례식때 가족들 사진

가족들에게 “릴리벳”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엘리자베스는 조지 5세와 메리 왕비의 매우 사랑받던 손녀였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조지 5세의 첫 번째 손주였기에 조지 5세는 엘리자베스를 매우 사랑했었습니다. 엄격한 부모였던 조지 5세 부부는 손녀에게는 좀 더 다정한 할아버지와 할머니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둘은 평생 왕실예법을 준수하고 왕실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기에 손녀들에게도 엄격한 모습을 보였습니다만, 자녀들에게 대한것보다는 훨씬 더 부드러운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특히 조지 5세는 결혼하지 않고 유부녀들과 연애질만 하던 후게자인 웨일스 공 에드워드에 대해서 못마땅해했으며 차라리 그가 결혼하지 않아서 왕위가 릴리벳에게 돌아가길 바란다고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조지 5세 부부와 며느리 요크 공작 부인과 두 손녀들


엘리자베스와 동생 마거릿의 어린 시절은 평화로웠습니다. 부모인 요크 공작은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아이들과 떨어져 지내기도 했지만, 가족들은 대부분 왕실의 복잡한 상황을 떠나서 시골의 한적한 곳에서 평화롭게 가족생활을 즐겼습니다. 그리고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론 요크 공작 가족들도 왕위는 웨일스 공이 이어받을 것이며 그가 결혼해서 자녀들이 생기면 요크 공작과 그 자녀들은 왕위계승권리와 멀어질것이라 여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운명은 엘리자베스의 할아버지인 조지 5세가 원했던 대로 돌아가게 됩니다. 1936년 엘리자베스의 할아버지인 조지 5세가 사망하고, 백부였던 에드워드가 국왕 에드워드 8세가 됩니다. 하지만 그는 두 번 결혼하고 한번 이혼했던 유부녀였던 미국 출신 심슨 부인과 오래도록 연애관계였습니다. 그리고 왕위에 오른뒤 심슨 부인과 결혼하길 원합니다. 이것은 유부녀인 심슨 부인이 두 번째 남편과 이혼하고 국왕과 결혼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당대 이것은 용납하기 힘든 일이었는데 영국의 국왕은 국교회의 수장이었으며 이런 국교회의 수장이 당시 “도덕적 흠”으로 여겨지던 이혼을 두 번이나 한 여성과 결혼한다는 것을 많은 이들이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를테면 당시에는 이혼한 여성은 궁정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었습니다.)


   에드워드 8세는 심슨 부인과 결혼하기 위해서 여러모로 노력했지만, 내각이나 다른 식민지들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려했으며 결국 심슨 부인과 결혼하기 위해서는 왕위에서 물러나는 길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국왕이 된지 1년도 되지 않은 1936년 12월 퇴위를 결정합니다.   


에드워드 8세, 후에 윈저 공작

    


에드워드 8세의 갑작스러운 퇴위로 인해서 왕위는 준비되지 않았던 동생인 요크 공작 앨버트가 물려받게 됩니다. 앨버트는 왕명을 조지로 선택했고 이렇게 그는 영국의 조지 6세가 되었으며 그의 장녀인 엘리자베스는 이제 영국의 왕위계승자가 되었습니다. 이 퇴위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불만을 품었는데 특히 에드워드 8세의 어머니였던 메리 왕비가 크게 화를 내게 됩니다. 메리 왕비의 경우 평생 왕실을 지키기 위해서 희생했는데, 이런 왕위를 아들은 고작 아무렇지도 않게 버리는 것에 대해서 너무나 화가났으며 평생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고도 합니다.

조지 6세의 즉위식 후 발코니 행사 때, 가운데 있는 소녀가 바로 엘리자베스 2세입니다.


엘리자베스는 이제 왕위계승자로 많은 것을 배우고 익혀야했습니다. 특히 1939년 제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면서 왕위계승자로 널리 더 모습이 알려지게 됩니다. 영국에 대한 독일의 공습이 강화되자 일부에서는 왕비에게 공주들을 안전한 캐나다로 보내라고 이야기했지만 왕비는 국왕 곁에 자신과 자녀들이 있을 것이라고 이를 거부했으며 엘리자베스와 동생 마거릿 역시 전시의 영국에 남았습니다. 물론 부모가 더 위험한 지역에 머무는 동안 공주들은 폭격으로부터 좀 더 안전한 지대에 가있긴했었습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공주가 성인이 되면서 왕위계승자로 활동 폭이 더 넓어지게 됩니다. 특히 1945년 전쟁 말기 엘리자베스는 군대의 보조 업무를 담당하는 활동을 맡았으며, 보급을 위한 트럭 운전과 자동차 고치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런 경험은 여왕이 이후 직접 운전해서 다니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1945년 트럭앞에 서 있는 엘리자베스 2세


이런 전쟁 와중에 엘리자베스 공주는 자신의 왕자님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그리스의 필리포스 왕자였습니다. 그리스의 필리포스 왕자는 그리스의 안드레아스 왕자와 그의 아내인 바텐베르크의 앨리스의 아들로, 엘리자베스와는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9세와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을 모두 공통선조로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필리포스는 복잡한 그리스 사정과 우울한 가정 사정 때문에 어려서 영국에서 성장했고 이후 외가쪽 전통에 따라서 영국 해군으로 복무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필리포스의 숙부이자 영국 왕실과 가까운 사이였던 루이스 마운트배튼경은 잘생긴 자신의 조카를 미래의 영국 여왕과 결혼시키고 싶어했고 어떻게든 자리를 만들려했습니다.


그리고 점차 이 계획에 영국에 있던 필리포스의 외가쪽 가족들은 물론 그리스 왕가 사람들 역시 동참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주 만나게 된 잘생기고 아름다운 두 사람은 결국 서로에 대해서 호감을 넘어서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특히 성인이 된 엘리자베스는 이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 늘 그리워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이를 알아볼 것을 우려해서 그의 멋진 외모가 감춰진 수염이 가득난 사진을 간직해서 사람들이 못알아보게 하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그리스의 필리포스 왕자, 엘리자베스 2세의 남편, 1945년


엘리자베스는 이제 필리포스와 결혼하길 원했고, 필리포스쪽 가족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환영했습니다. 하지만 영국 왕실은 달랐습니다. 사실 여왕이 될 엘리자베스가 영국인, 특히 영국 귀족과 결혼하는 것이 모든 면에서 유리했었습니다. 게다가 필리포스는 그리스 왕족이긴했지만 그의 누나들은 모두 독일 왕족들과 결혼했었는데, 2차대전이후 영국의 반 독일 감정은 다시 한번 극에 달하고 있었기에 필리포스가 그리스 왕족이며, 덴마크 국왕의 후손임에도 그를 거의 독일인처럼 생각하는 사람들 역시 있었고 이 때문에 엘리자베스가 그와 결혼하는 것이 왕실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특히 엘리자베스의 어머니인 왕비는 오빠들이 전쟁중 사망했기에 독일에 대한 적개심이 훨씬더 컸고 역시 필리포스를 엄청나게 반대했다고도 합니다.      


엘리자베스와 필립


하지만 사랑에 빠진 엘리자베스의 고집을 꺽을수가 없었으며 결국 1947년 국왕 부부가 딸들과 함께 아프리카 순방을 다녀온 뒤인 1947년 7월 엘리자베스와 “영국 해군 대위” 필립 마운트배튼과의 약혼이 발표됩니다. 이미 1947년 초 결혼은 거의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는데 그것은 필리포스 왕자가 그리스 국적과 왕위계승권리를 포기하고 영국 시민 필립 마운트배튼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운트배튼이라는 성은 외가쪽 성을 차용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필립은 종교도 그리스 정교회에서 성공회로 개종했었습니다.      

1947년 11월 20일 영국의 엘리자베스 공주와 이제 에든버러 공작이 된 필립 마운트배튼이 정식으로 결혼했습니다. 엘리자베스의 결혼식은 전후 영국에서 가장 화려하고 기대되는 행사이기도 했습니다. 전쟁의 암울함에서 벗어나기 좋은 행사였었습니다. 당시 영국은 여전히 생필품을 배급했는데 엘리자베스 공주 역시 자신의 웨딩드레스를 만들기 위해서 쿠폰을 모았다고 합니다. (재미난 사실은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공주의 웨딩드레스를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쿠폰을 공주에게 보내줬었다고 합니다만, 정작 쿠폰을 양도하는 것은 불법이기에 공주는 사람들의 마음만 받았다고 합니다.)      


미래의 영국 여왕의 결혼식이기에 수많은 유럽 왕가에서 참석했는데, 특히 신랑의 가족들 역시 유럽의 여러 왕가와 연결되기에 참석한 많은 왕족 하객들이 신랑 신부의 친척들이었습니다. 유일하게 오지 못한 친척들은 신랑의 누나들과 그녀들의 남편들이었는데 모두 독일인과 결혼했었기에 반 독일 감정을 자극할 수 있었고 이에 영국 왕실에서는 이들을 아예 초청하지도 않았었습니다. 그리고 필립의 누나들은 이에 대해서 매우 오래도록 서운해했다고도 합니다.    


엘리자베스 공주와 에든버러 공작 필립



결혼후 엘리자베스 공주는 왕위계승자였지만, 영국 해군인 남편을 따라서 영국 해군 부인으로 한 동안 평범한 삶을 살았습니다. 남편 동료와 그 부인들과 어울렸고 남편의 임지를 따라다니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 사이 엘리자베스는 첫 아이이자 후계자가 될 아들 찰스를 낳았으며 다음으로 첫딸인 앤도 낳았습니다. 사실 엘리자베스가 첫 아들을 낳았을 때 가족들 모두가 기대하지 않던 아들이라 놀랐다고 합니다. 필립은 위로 누나가 네명이나 있었고, 엘리자베스도 남자 형제가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찰스의 세례식날 필립의 외할머니였던 헤센의 빅토리아는 이 증손자가 언젠가 영국의 국왕이 될 때는 자신이 살았던 시대보다 평온하길 바란다고 했다고 합니다.     


아들 찰스가 태어난뒤 남편 부모님과 힘께 있는 엘리자베스 2세


아마 엘리자베스에게는 이런 평범한 해군 장교 부인으로의 삶은 나름 행복한 시기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1951년이 되면서 모든 것이 바뀌게 됩니다. 엘리자베스의 아버지인 조지 6세의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기 시작했으며 공식 업무를 이제 왕위계승자인 엘리자베스가 이어받아야했습니다. 그리고 부부가 아프리카를 방문중이던 1952년 2월 6일 조지 6세가 사망하고 이제 엘리자베스가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됩니다. 여왕 부부는 서둘러 영국으로 돌아왔으며 조지 6세의 장례식과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을 준비합니다. 이 와중에 잠깐의 소란이 있었는데, 늘 야심이 많았지만 그에 비례해서 말도 많았던 필립의 외삼촌인 루이스 마운트배튼경이 이제 영국 왕가는 마운트배튼 가문이 된다고 떠들고 다녔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당연히 메리 왕비가 화를 냈으며 결국 여왕은 왕가의 성은 여전히 “윈저”를 쓸것이라고 선언하기까지 했었습니다. 대관식 직전 여왕의 할머니인 메리 왕비가 사망했는데, 평생 왕실을 우선했던 메리 왕비는 유언으로 자신이 대관식 전에 죽더라도 대관식은 원래 하기로 한 날짜에 진행하라고 못을 박았고, 1953년 6월 2일 엘리자베스 2세는 영국 여왕으로 대관식을 올렸습니다.     


엘리자베스 2세 대관식때 여왕과 남편 필립공


이후 엘리자베스 2세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식민지 독립 문제였습니다. 이전의 많은 영국의 식민지들이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을 원했으며 이들과의 평화로운 헤어짐은 영국과 영연방내에서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가장 덩치가 컸던 인도가 평화롭게 식민통치에서 벗어났으며 이후 다른 아프리카나 카리브해 국가들이 영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났습니다. 하지만 북아일랜드 문제는 오래도록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중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엘리자베스 2세는 영국내 정치에 직접 관여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여왕의 행동은 상징적인 것이 더 컸으며 주로 영연방내 많은 나라들을 다니면서 이들을 결속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행동을 더 많이 했습니다. 또한 영연방내 국가들의 수장으로 다른 외교활동을 했었습니다.      


1980년대 레이건 대통령 부부를 만나는 엘리자베스 2세 부부


엘리자베스 2세의 통치기중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아마 1990년대였을 것입니다. 언론이 발달함에 따라 여왕의 개인 가족들에 대한 노출이 점차 더 심해졌고 특히 후계자인 아들 웨일스공 찰스와 그의 아내인 웨일스 공비 다이애나의 불화가 전세계의 가십거리로 알려졌으며 결국 1997년에는 둘은 이혼하게 됩니다. 이미 딸과 다른 아들의 이혼을 결험했던 여왕이었지만, 왕위게승자인 아들 부부가 이혼한다는 것은 아마 구시대의 마지막 모습과 같은 엘리자베스 2세 에게 이것은 매우 큰 타격이었을것입니다. 게다가 다이애나가 비극적으로 죽은뒤 엘리자베스 2세가 다이애나의 죽음에 대해서 어떤 것도 하지 않는 듯한 모습에 영국 국민들은 다이애나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이 영국 왕실과 여왕이라고 비난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상황은 왕실의 위기로까지 이어질 정도였지만 엘리자베스 2세는 대중앞에 나서서 이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해명했고 손자들에 대한 애정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대중들의 마음은 다시 돌아서기도 했었습니다.  


다이애나, 웨일스 공비, 엘리자베스 2세의 며느리, 찰스 3세의 첫번째 부인


엘리자베스 2세는 즉위 70주년을 채운 2022년 9월 8일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왕위는 아들인 웨일스 공 찰스가 이어받아서 영국의 찰스 3세가 되었습니다. 사실 여왕은 90세가 넘도록 왕위에 있었는데, 다른 유럽의 군주들이 나이가 들면서 후계자에게 왕위를 넘기고 은퇴하던 모습과 매우 대조적이었기에 여왕도 은퇴해야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2세는 구대시의 사람으로 “왕권은 의무이며 신께서 가져가지 않는 한 의무를 수행해야한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마 이런 생각은 무책임하게 왕위를 버린 백부 에드워드 8세 때문에 더 강하게 작용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엘리자베스 2세 통치기는 사실 19세기 최강으로 빛났던 영국과 그 제국이 해체되고 새롭게 편성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 엘리자베스 2세는 영국의 군주로 굳건히 자리를 지켰으며, 많은 사람들이 엘리자베스 2세의 통치에 대해서 호감을 가졌습니다. 특히, 묵묵히 군주로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는 여왕의 모습에 아마 많은 이들이 여왕에 대한 호감과 더불어 군주제에 대한 호감을 느꼈던 것일 듯합니다.    

      

엘리자베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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