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의 여성 왕위 계승자들...다섯번째
요크의 엘리자베스는 에드워드 4세와 그의 아내인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장녀로 1466년 웨스트민스터 궁전에서 태어났습니다. 엘리자베스의 아버지는 잉글랜드의 국왕이었으며, 엘리자베스의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그의 정식 아내이자 대관한 왕비였기에 엘리자베스는 국왕의 첫아이로 매우 상징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엘리자베스의 대부모는 친할머니인 요크 공작부인 시슬리 네빌과 외할머니인 룩셈부르크의 자퀘타 그리고 아버지의 사촌이었던 워릭백작 리처드 네빌이었습니다. 아마도 리처드 네빌이 엘리자베스의 대부모가 된 것은 그가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에드워드 4세의 결혼을 극렬히 반대했었기에 에드워드 4세와 그가 화해하는 것을 보여주는 정치적 의도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엘리자베스의 아버지인 에드워드 4세는 랭카스터 국왕 헨리 6세와 그 주변인물들을 물리치고 국왕이 된 인물이었습니다. 물론 이떼 헨리 6세는 살아있긴했지만 폐위당한채 감금당해있었으며 잉글랜드에서는 이런 상황에 대해서 거부감 없이 에드워드 4세를 국왕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물론 여전히 재기를 노리는 랭카스터 파 사람들이 있었으며 이들에 동조하는 이들 역시 있긴했었습니다.
엘리자베스의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에드워드 4세와 결혼할 때 엄청나게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물론 우드빌 가문은 사실 랭카스터 가문을 지지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어머니인 룩셈부르크의 자퀘타는 헨리 6세의 숙모였습니다. 남편이 죽은뒤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아버지인 리처드 우드빌과 사랑에 빠져서 결혼하는 바람에 궁정 출입을 금지당하기까지 했었습니다. 하지만 헨리 6세의 아내인 앙주의 마거릿과 인척관계였기에(마거릿의 숙모중 한명이 자퀘타의 여동생이었습니다.) 외국인 왕비로 궁정에서 지지세력이 필요했던 앙주의 마거릿이 자퀘타를 다시 궁정으로 불렀고 덕분에 우드빌 가문 사람들 역시 궁정 출입을 할수 있었습니다. 이후 엘리자베스 우드빌 역시 이런 연줄 덕분에 그로비의 페레스 남작령의 상속자였던 존 그레이와 결혼했었습니다. 하지만 장미전쟁이 일어나면서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남편은 랭카스터 가문을 위해서 싸우다 전사했으며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과부가 됩니다. 과부가 된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에드워드 4세와 만나게 되는데, 당대 “브리튼섬 최고의 미녀”라는 평가를 받았던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왕위를 쟁취한 국왕이었던 에드워드 4세는 서로 사랑에 빠졌고 결국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립니다. 이후 에드워드 4세는 자신이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결혼했다는 사실을 밝히는데 이것은 곧 요크 가문의 내분을 초래합니다.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랭카스터 가문의 가신 가문 출신이었을뿐만 아니라 왕가를 중심으로 혈연관계로 얽힌 잉글랜드 궁정에서 이런 혈연적 연결고리가 하나도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룩셈부르크 가문 출신이었지만, 프랑스쪽인데다가 헨리 6세의 숙모였기에 당연히 엘리자베스 우드빌이 궁정에서 자리잡는데는 하나도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이런 상황은 에드워드 4세가 엘리자베스 우드빌을 왕비로 굳히기 위해서 대관식을 거행하고 처가 식구들인 우드빌 가문 사람들을 중용했으며,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동생들을 궁정내 힘을 가졌던 여러 귀족가문들과 결혼시키는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일련의 상황은 둘의 결혼에 불만을 가졌던 사람들에게 도리어 더 화를 돋우는 것으로, 워릭 백작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왕비로 대관했기에 신분이 낮은 엘리자베스 우드빌에게 고개를 숙여야한다는 것에 화를 냈으며, 랭카스터를 지지했던 우드빌 가문을 중용하는 것에 분노했고 엘리자베스 우드빌이 동생들의 결혼을 밀어붙인 것에 대해서 탐욕스럽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결국 이런 갈등은 워릭 백작의 반란으로 이어지지만, 결국 이긴 사람은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아버지였던 에드워드 4세였으며 이후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잉글랜드 통치는 더욱더 확고해지게 됩니다. 둘 사이에 10명의 자녀가 태어났으며 당연히 에드워드 4세의 후계는 안정되어보였습니다.
요크의 엘리자베스는 행복한 부모의 밑에서 잉글랜드의 공주로 평온한 어린시절을 보냈을 것입니다. 물론 아버지가 중간에 왕위를 뺏기기도 했었지만 어린 아이였던 엘리자베스는 잘 보호받았으며 아버지가 돌아온 뒤에는 더 이상 불안함도 없었을 것입니다.
요크의 엘리자베스는 잉글랜드 국왕의 장녀였고 당연히 정치적으로 유용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기에 엘리자베스의 혼담은 아주 어려서부터 정치적 목적으로 언급됩니다. 엘리자베스가 3살때였던 1469년 친척이었던 조지 네빌과 약혼합니다. 조지 네빌은 솔즈버리 백작 리처드 네빌의 손자이자 몬태규 후작 존 네빌의 아들로 그의 백부가 바로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이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워릭 백작과 에드워드 4세의 갈등을 봉합하려는 것으로, 조지 네빌은 1470년 국왕으로부터 베드퍼드 공작 지위를 받는데 아마 그가 엘리자베스와 약혼했기 때문일듯합니다. 하지만 워릭 백작이 반란을 일으켰고, 에드워드 4세는 워릭 백작과의 평화를 위해서 딸을 결혼시키려했었기에 워릭 백작이 반란을 일으키자 당연히 약혼은 없었던 일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프랑스와의 평화를 위해서 루이 11세의 아들인 도팽 샤를(후에 샤를 8세)와 1475년 결혼하기로 합의를 봤었습니다만, 1482년 루이 11세는 아들을 막시밀리안 1세와 아내인 마리 드 부르고뉴의 딸인 마르가레테와 약혼시키면서 엘리자베스와 아들의 약혼을 깼습니다. (하지만 샤를8세와 합스부르크의 마르가레테의 약혼 역시 브르타뉴 공작령 상속문제로 깨졌고 샤를 8세는 결국 브르타뉴 여공작이었던 안 드 브르타뉴와 결혼했습니다.)
요크의 엘리자베스는 잉글랜드 공주였기에 결혼할 걱정이 없었습니다만 1483년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정치적으로 상황이 복잡하게 흐르면서 엘리자베스의 처지 역시 애매해지게 됩니다.
엘리자베스의 동생인 웨일스공 에드워드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에드워드 5세가 됩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요크 가문의 내분이 시작됩니다. 엘리자베스의 숙부였던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는 형의 유언에 따라 호국경이 되었는데, 우드빌 가문의 영향력아래있던 조카를 데려왔으며 우드빌 가문과 그 가까운 측근들을 반역죄로 가뒀으며 후에 처형해버리기까지 합니다. 이런 상황이 되면서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다른 자녀들을 데리고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성역권으로 도망가게 됩니다. 글로스터 공작은 대관식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다른 조카였던 요크 공작 리처드를 데려왔습니다. 이렇게 에드워드 4세의 아들들인 에드워드 5세와 요크공작이 글로스터 공작의 손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후 글로스터 공작은 권력을 잡기 위한 행동을 시작합니다. 그는 형인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결혼이 적법하지 않기에 둘의 결혼이 무효이며, 둘의 자녀들은 모두 사생아로 왕위계승권리가 없다고 주장했고 의회는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조카를 대신해서 스스로 국왕 리처드 3세로 대관식을 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런던탑에 있던 엘리자베스의 남동생들은 사라지게 됩니다.
이동안 엘리자베스는 어머니와 다른 여동생들과 함께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성역권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다시 바뀌게 되는데 어머니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리처드 3세에게 반란을 일으키려던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와 손을 잡았습니다. 헨리 튜더를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시키려는 것으로, 이 결혼이 성사된다면 명분상 헨리 튜더에게 더욱더 유리해질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전의 리처드 3세의 측근이었던 버킹엄 공작까지 끌어들였던 이 반란은 결국 실패로 돌아갑니다. 버킹엄 공작은 살해당했고,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 역시 재산과 권리를 뺏기고 연금상태가 됩니다.
이때 엘리자베스 우드빌 역시 성역권으로 나오라고 압박을 당하게 됩니다. 아마 아들들이 사라졌고 반란마저 실패했기에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딸들의 앞날도 생각해야했습니다. 리처드 3세는 조카들을 잘 돌봐주겠다고 했었으며,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딸들을 리처드 3세의 궁정으로 보내서 결혼을 하고 평온하게 살길바라게 되었을 것입니다. 결국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성역권에서 나왔으며 왕비가 아니라 레이디 엘리자베스 그레이라는 이름으로 연금상태에 사는 것을 승낙합니다. 대신 딸들을 궁정으로 보냈었습니다.
1484년 엘리자베스는 동생들과 함께 숙부의 궁정으로 갔고 리처드 3세는 약속한 대로 조카들을 잘 돌봐줬었습니다. 하지만 곧 궁정에서 소문이 돌게 됩니다. 1484년 4월 리처드 3세의 외아들인 미들햄의 에드워드가 사망합니다. 그가 죽은뒤 아내인 앤 네빌은 건강이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궁정에서는 리처드 3세가 아내가 죽는다면 바로 조카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게 됩니다. 그리고 1485년 앤 네빌이 죽게 됩니다. 앤 네빌은 병으로 사망했지만 리처드 3세가 조카와 결혼하기 위해서 아내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파다해졌으며 이것은 바다건너에 있던 헨리 튜더가 잉글랜드로 서둘러 오는 계기중 하나가 됩니다. 물론 리처드 3세는 조카와 결혼할 마음이 없었고 아내가 죽자 조카를 궁정에서 다른 곳으로 보내서 의심을 피하려했습니다. 또한 그는 조카를 자신의 동맹이 될만한 외국 왕가로 시집보낼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헨리 튜더는 잉글랜드로 왔으며 리처드 3세는 그에게 패배하게 됩니다. 헨리 튜더는 이전에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하겠다고 맹세했었으며 잉글랜드에서 승리한 뒤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을 합니다. 사실 요크의 엘리자베스와의 결혼은 매우 정치적인 이유였는데 헨리 튜더는 랭카스터 가문의 명분을 계승한 인물이긴 했지만 플랜태저넛 가문의 명분을 따지자면 요크 가문의 다른 사람들보다 명분이 약한 보퍼트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그가 늘 다른 살아남은 요크 가문의 사람들에 대해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만, 적어도 요크 가문의 상속권리를 주장할수 있는 에드워드 4세의 장녀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한 것 자체가 그의 명분에 큰 힘을 실어준 것이기도 했습니다.
요크의 엘리자베스는 헨리 7세와 결혼해서 잉글랜드의 왕비가 됩니다. 사실 이때 엘리자베스의 처지는 그리 쉬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헨리 7세는 아내의 명분이 중요하긴 했지만, 아내의 권리를 통해서 국왕이 되었다는 것은 거부하게 됩니다. 그는 스스로 국왕이 되었으며 그의 권리는 아내인 엘리자베스도 침해할수 없는 것이었으며 권력 역시 아내와 나누려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엘리자베스와 헨리 7세의 장남은 둘의 결혼 8개월만에 태어나는데 기본적으로 조산으로 태어났다고 생각할수 있지만 보스워스 전투 이후 혼란한 상황에서 엘리자베스가 헨리 튜더와의 관계를 강요받았다고 생각할수도 있는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헨리 7세는 요크 가문 출신의 왕위계승권리를 주장할수 있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의심을 하고 있었고 여기에는 엘리자베스의 동생들 역시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아마도 요크의 엘리자베스가 헨리 7세와의 관계를 좋게 이어나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엘리자베스가 참고 인내했으며 남편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원인이 되었으며 결국 엘리자베스는 왕비로 자비심 많은 좋은 사람으로 남았으며 남편인 헨리 7세 역시 이런 아내를 신뢰하게 되었으며 서서히 아내의 영향력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물론 요크의 엘리자베스는 궁정이나 정치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정치에서는 남편인 헨리 7세가 그녀가 나서는 것을 싫어했을 것이며, 궁정에서는 대단한 시어머니인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요크의 엘리자베스는 당대 여성들처럼 순종적인 아내였을뿐만 아니라 대단한 시어머니 뒤에서 조용히 지내는 사람이기도 했었습니다. 아마 엘리자베스가 시어머니 뒤에서 있어야했던 가장 큰 이유는 남편인 헨리 7세가 늘 어머니인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를 최우선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비록 정치적 영향력이 없었으며 궁정에서 대단한 시어머니 뒤에 있었지만, 요크의 엘리자베스는 왕비로 남편에게 신뢰와 애정을 얻었으며 안정적 지위를 유지할수 있었으며 이런 안정적 지위를 통해서 동생들이나 다른 친척들을 도울수 있었습니다. 또한 엘리자베스는 주로 아이들의 양육에 신경썼었는데 헨리 7세나 그의 어머니인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는 모두 많이 배운 것을 좋아했었기에 아마도 엘리자베스 역시 아이들의 교육에 더 신경을 썼을 것입니다.
아마 요크의 엘리자베스는 아마 자녀들을 결혼시키면서 평온한 삶을 지속할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특히 며느리인 아라곤의 카타리나가 왔을 때 매우 좋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1502년 아들이자 후계자였던 아서가 사망합니다. 헨리 7세는 아들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을뿐만 아니라 자신의 왕조에 대한 걱정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에 엘리자베스는 남편이 외동아들이지만 결국 왕위에 올랐으며 둘은 아직 아이들을 더 낳을수 있는 젊은 아니라고 위로했었다고 합니다. 물론 엘리자베스 역시 아들을 잃고 너무나 슬펐지만, 아마도 늘 남편을 우선으로 해야했었기에 이렇게 위로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엘리자베스도 힘들어했으며, 남편인 헨리 7세는 아내와 함께 서로룰 위안했다고 합니다.
이전의 엘리자베스의 말대로 엘리자베스는 다시 한번 임신을 했습니다. 그리고 1503년 2월 막내딸인 캐서린을 낳았습니다만, 아이는 얼마 살지 못하고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아이의 어머니인 요크의 엘리자베스 역시 산후감염으로 2월 11일 사망합니다.
엘리자베스의 죽음은 헨리 7세와 그의 가족 모두에게 충격이었습니다. 헨리 7세는 늘 자신을 이해해주던 아내를 잃었기에 너무나 힘들어했으며 어머니를 제외한 누구도 만나려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녀들 역시 다정한 어머니를 잃었기에 너무나 힘들어했는데 딸들은 물론 이제 유일한 아들이 된 헨리는 어머니의 죽음에 무척이나 힘들어했다고 합니다.
핸라 7세는 국왕이자 정치가였기에 비록 아내를 잃고 힘들어했지만 정치적 목적으로 재혼 상대를 찾았습니다. 여러 사람이 대상이 되었는데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고 합니다. 가톨릭 공동 군주는 헨리 7세가 역시 과부로 아직 잉글랜드에 남아있던 자신의 딸과 재혼하려하는 것이 아닌지 걱정했다고합니다. 사실 헨리 7세는 며느리의 지참금을 돌려주는 것을 아까워하고 있었기에 며느리가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미루고 있었으며 심지어 재혼도 고려했었습니다. 하지만 며느리의 부모가 반대했고 며느리와 결혼하는 문제는 윤리적으로도 여러 가지가 문제가 되었기에 이 생각은 포기합니다. 결국 아라곤의 카타리나는 헨리 7세의 둘째아들이자 후계자가 된 헨리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헨리 7세는 아내의 기일을 잊지 않았으며 늘 아내의 기일에 추모미사를 하고 종을 울렸으며 100개의 초를 켰다고 합니다.
요크의 엘리자베스는 사실 남편인 헨리 7세보다 더 강한 왕위계승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헨리 7세는 외가인 보퍼트 가문을 통해서 랭카스터 가문의 계승권리를 주장했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이전에 강화된 여성 왕위계승권리 덕분에, 보퍼트 가문의 장자 계열의 상속녀였던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의 계승권리를 헨리 튜더가 인정받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보퍼트 가문 자체가 “사생아 가문”이었기에 비록 랭카스터 가문의 계승권리를 이어받았다고 하더라도 다른 요크 가문의 사람들보다 명분이 약하다고 할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헨리 7세나 헨리 7세의 어머니인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는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헨리 7세가 결혼해야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요크의 엘리자베스는 당시 스스로 왕위계승권리를 주장할만한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요크의 엘리자베스는 왕비가 되는 정치적 합의를 받아들였으며, 자신의 정치적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었습니다.
헨리 7세는 자신의 애매한 명분 때문에 자신보다 더 강한 명분을 주장할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 경계했었습니다. 이것은 결국 이미 바닥난 플랜태저넛의 명분을 주장할수 있는 사람들 대부분을 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잉글랜드내의 남성 직계 왕위계승자를 더욱더 줄어들게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요크의 엘리자베스는 왕위에 오르지 못했지만 손녀들인 메리와 엘리자베스는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