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디 오페라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의 역사적 배경
베르디의 오페라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는 1855년 프랑스에서 Les vêpres siciliennes라는 이름으로 무대에 올려진 5막짜리 그랜드 오페라였습니다. 이 오페라는 프랑스 극작가가 프랑스어로 작곡한 대본을 가지고 베르디가 오페라를 작곡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대본때문에 베르디와 대본가 사이에 복잡한 상황이 있었고 이때문에 원래는 1854년말에 초연되기로 했던 오페라가 1855년 6월로 밀렸지만 결국 무대에 올려지게 됩니다. 무대에 올려진뒤 호평을 받았으며 바로 이탈리아어의 번역버전이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1855년 12월 파르마에서 이탈리아 버전인I vespri siciliani라는 제목으로 무대에 올려졌습니다, 이때 공연은 프랑스판처럼 발레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베르디는 이탈리아어 버전에서 발레를 빼고 공연을 했었습니다. 이후 이 오페라는 주로 발레가 들어가지 않는 이탈리아 어 버전이 공연되었지만 21세기가 되면서 프랑스어 버전도 무대에 올려지고 있습니다.
이 오페라는 오페라 제목처럼 13세기 시칠리아 섬에서 일어난 반란 사건인 "시칠리아의 저녁기도"The Sicilian Vespers (Italian: Vespri siciliani; Sicilian: Vespiri sicilian)사건을 역사적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시칠리아의 저녁기도 사건은 근본적으로는 교황권과 황제의 가문이었던 호엔슈타우펜 가문과의 갈등 때문에 생기게 된 사건이지만, 시칠리아 왕국의 복잡한 상속문제와 지역 사람들의 불만등이 어우러져서 생긴 사건이었습니다.
시칠리아 왕국은 12세기 노르만인(노르망디 출신의 노르드인들을 의미, 주로 노르망디 공작의 가신들이었는데 바이킹의 후손답게 전투기술이 뛰어났다고 알려져있습니다.)으로 이탈리아 남부 지방에 눌러앉게 되는 탕크레드 도트빌의 후손으로 시칠리아 백작이었던 로게르 2세가 교황으로부터 왕위를 얻게 되면서 생긴 왕국이었습니다. 시칠리아 왕국의 영토는 시칠리아 섬과 나폴리를 중심으로하는 이탈리아 남부 지역을 합친 지역이었습니다. 그리고 12세기 말이 되면서 시칠리아 왕국은 결혼 관계를 통해서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가문이었던 호엔슈타우펜 가문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호엔슈타우펜 가문 출신으로 어머니인 시칠리아의 콘스탄차로부터 시칠리아 왕국의 왕위를 물려받았던 페데리코는 후에 아버지인 황제 하인리히 6세의 권리를 이어 받아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로 즉위하게 됩니다. 프리드리히 2세는 황제가 되면서 당연히 다른 많은 황제들처럼 교황과의 마찰을 빚게 되었으며 이것은 곧 교황과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갈등으로 확대 됩니다.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죽었을때 후계자 문제는 매우 애매한 상황이었습니다. 그의 후계자인 손자 콘라딘은 독일에 있었으며 이때문에 시칠리아 왕국의 통치는 프리드리히 2세와 그의 정부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었던 만프레디가 섭정으로 통치하게 됩니다. 만프레디는 자신의 어머니가 아버지가 죽기전에 정식으로 결혼했다고 주장하면서 스스로에게 시칠리아 왕국을 이어받을 정당성을 부여했었습니다만 많은 이들은 이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만프레디는 정당한 후계자인 콘라딘이 있었음에도 스스로 시칠리아의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이 상황에 대해서 호엔슈타우펜 가문을 견제하던 교황은 당연히 좌시하지 않았습니다. 교황은 만프레디를 파문하면서까지 그에게 시칠리아 왕위에서 물러나라고 압박했으며 또 시칠리아 왕위를 호엔슈타우펜 가문에게서 뺏아서 다른 가문의 사람들에게 넘겨주려했습니다. 여러명에게 제안했었는데 마지막으로 제안한 사람은 프랑스의 국왕 루이 8세의 막내아들이자 루이 9세의 동생이었던 앙주 백작 샤를이었습니다. 샤를은 매우 야망이 컸던 인물로 아내를 통해서 프로방스 지방을 장악했었으며 프로방스 지방에 대한 권리를 처형들과 그 남편들과 나누려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아내의 큰언니가 자신의 형수였음에도 그랬었고 이때문에 루이 9세의 아내이자 샤를의 형수였던 프로방스의 마르거리트는 샤를에게 적대적이 되기까지 했습니다.
앙주의 샤를은 교황으로부터 시칠리아 왕위에 대한 명분을 얻었으며 이런 명분을 바탕으로 무력으로 시칠리아 왕국을 장악했으며 시칠리아의 국왕 카를로 1세가 됩니다.이전의 국왕이었던 만프레디는 패배해서 사망했으며 시칠리아 왕국의 상속권리는 아라곤의 국왕과 결혼한 시칠리아의 콘스탄차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시칠리아 왕국 사람들은 당연히 갑자기 나타난 국왕이었던 앙주의 샤를에 대해서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특히 시칠리아 섬 사람들은 훨씬더 거부감이 심했었는데 기본적으로 오트빌 가문이 시칠리아 백작작으로 시칠리아 통치를 했고 이를 발판으로 시칠리아 왕국을 형성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어쨌든 정당한 상속권리를 가지고 있던 호엔슈타우펜 가문 사람들 역시 받아들였었습니다. 하지만 앙주의 샤를은 이전 통치 가문과 혈연적 정당성이 없었으며 정치적으로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정적이었던 교황의 지지를 받았던 샤를에 대해서 어느정도 불만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불만이 커진것은 바로 앙주의 샤를의 강력한 팽창정책때문이었습니다. 샤를은 프랑스내의 앙주 백작령을 통치했으며 또 아내를 통해서 프로방스 백작령을 통치하고 있었고 무력으로 점령한 시칠리아 왕국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야망은 여기에 멈추지 않았고 지중해 전체를 손에 넣고 싶어했으며 더 나아가서는 비잔틴 제국을 타도하고 콘스탄티노플마저 손에 넣고 싶어했습니다. 당연히 이런 팽창 주의를 위해서는 많은 군대가 필요했고 이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결국 세금을 더 거둬야했었습니다. 시칠리아 왕국 사람들은 이미 기본적으로 샤를에 대한 불만이 있었는데 세금 때문에 더욱더 불만이 커지게 됩니다. 특히 시칠리아 섬 사람들은 샤를의 다른 영지인 프로방스 지역이나 앙주 지역 심지어 같은 시칠리아 왕국이었던 나폴리 중심의 이탈리아 남부지역보다 더 못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세금마저 과중하게 부과되자 더이상 참을수 없게 됩니다.
결국 1282년 3월 30일 월요일 부활절 저녁기도 종소리에 맞춰서 시칠리아 섬 사람들이 카를로 1세의 통치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사건이 정확히 어떻게 일어났는지는 알려져있지 않지만 구전으로 전해지는 이야기에서는 부활절 축제때 프랑스 출신의 관리들이 시칠리아 여성을 희롱했고 이를 참지 못한 이 여성의 남편이 관리를 죽였다는 것입니다. 이후 프랑스 인들이 이 남편을 잡으려했을때 시칠리아 군중들이 프랑스 인들을 살해하면서 반란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 반란 사건은 국제전으로 확대되는데 시칠리아 섬 사람들은 만프레디의 딸인 콘스탄차의 남편인 아라곤의 페드로 3세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당연히 아내의 권리를 통해서 시칠리아 왕국의 통치 권리를 주장할수 있었던 페드로 3세는 군대를 이끌고 시칠리아 섬으로 왔으며 시칠리아 섬 사람들은 아라곤의 페드로 3세와 시칠리아의 콘스탄차를 군주로 인정하게 됩니다. 이후 시칠리아 왕국은 시칠리아 섬을 중심으로하는 시칠리아 왕국과 나폴리등의 이탈리아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나폴리 왕국으로 분리됩니다.
물론 베르디의 오페라는 다른 많은 오페라들처럼 이 역사적 사건을 정확히는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이전에 국립 오페라단에서 시칠리아 섬의 저녁 기도를 공연했을때 올렸던 글입니다. 그리고 제 21회 대구 국제 오페라 축제에서 국립 오페라단이 이 시칠리아 섬의 저녁 기도를 2024년 10월 25일 금요일 오후 7시 30분과 26일 토요일 오후 3시 공연합니다.
베르디는 이 오페라를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는 시칠리아 사람들의 이야기로 묘사했으며 당시 이탈리아 정치 상황과도 어느정도 맞아떨어졌기에 그의 정치적 견해도 어느정도 들어가있습니다. 여러분도 이 베르디 오페라를 한번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그림출처
1.위키 미디어 커먼스
- 시칠리아의 저녁기도 사건을 묘사한 14세기 그림
2.대구 오페라 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