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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락방 May 27. 2022

로맨스 그리고 균형

《The Hating  Game》, 《사랑은 왜 불안한가》를 읽고

The Hating Game, Sally Thorne


'샐리 쏜'의 《The Hating Game》은 같은 직장에 다니면서 서로를 지독하게 미워하는 여자와 남자가, 그러나 그것이 미움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호감이었음을(심지어 한쪽은 첫눈에 반했음을!) 깨닫게 되고 연인이 되어가는 로맨스 소설이다. 


이 책에서 내가 좋아하는 장면이 여러 개 있는데, 그중 하나는 그들이 아직 섹스를 하기 전이다. 조슈아 형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먼 길을 운전했고 차 안에서 그들의 분위기도 좋았고, 그들은 그렇게 호텔방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래서 서로 끌어안고 키스하게 되었는데, 그런데 조슈아는 바로 그 자리에서 섹스를 하려고 하진 않는다. 루시는 하기 싫으냐고 물어보고 조슈아는 그렇지 않다는 걸 자신의 hard body를 통해 표현한다. 루시는 나로 인해 그가 이렇게나 흥분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또 그가 나를 원한다는 걸 알게 되어서 좋아하지만, 그러나 어쨌든 이 날의 섹스는 조슈아 엄마의 전화로 인해 성사되진 않는다. 그런데 만약, 조슈아 엄마의 전화가 아니었어도, 그런데 조슈아가 하기 싫다고 거절했어도, 루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뜻대로 섹스를 할 수 있었을까? 그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루시는 조슈아와 같은 직장에 다니고 같은 직급을 가지고 있다. 나이대도 비슷하고 그리고 진급을 위한 경쟁자의 상태에 놓여있다. 루시는 자신의 욕망을 말하기를 꺼려하지 않고 조슈아는 자신이 혹시 선을 넘는 건 아닌지 매사 신중한 사람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원하는 걸 말할 수 있고 싸우기도 하고 또 배려하기도 하는 성인 남녀, 그냥 보면 어느 모로 보나 평등한 여자와 남자가 거기 있다. 그러나 그것이 로맨스로 들어가 버리면 평등이 유지되기가 힘들다. 루시는 160도 안 되는 작은 키를 가지고 있고 어릴 때부터 너무 작았던 자신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조슈아는 키가 190이 넘고 운동을 해서 엄청난 근육질의 몸이다. 그는 한 팔로도 루시를 들어 올릴 수 있다. 물론 섹스의 기본은 서로 합의하에 하는 것이지만, 조슈아가 아니라고 말하면 안 해야 하는 게 당연히 이치에 맞는 말이지만, 루시의 입장에서는 조슈아가 아니라고 했을 때에 어떻게든 자신이 섹스를 더 해나갈 순 없다. 강제하고자 하는 의지나 생각이 없지만 설사 있다 해도 그것을 할 수 없는 위치라는 거다. 그러나 조슈아는 그렇지 않다. 조슈아의 성격이나 책에서의 타입으로 보면 조슈아 역시 원하지 않는 관계를 억지로 이끌어 나갈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루시에게 더 나은 기회가 있다면 그것을 찾아가게 하려고 하고 또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면 거부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혹여라도 루시가 섹스를 원하지 않을 때, 조슈아로서는 강제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거다. 이 책에서 루시가 욕망에 솔직한 여성이라고 해서 먼저 섹스를 말하고 혹은 여성 상위로 아무리 접근을 한다 해도, 분명한 사실은 루시는 강제로 할 순 없다는 거다.



나는 조슈아가 강간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정말 아니다. 내가 얘기하고 싶은 건, 이성애 로맨스로 들어가 버리면 그 안에서 온전한 평등이 자리하기 힘들다는 거다. 루시의 그동안 삶은 지금의 루시를 만들었다. 조슈아는 (당연히 소설이니)'그럴 남자가 아니지만' , 조슈아가 질투로 화를 낼 때 루시는 의자 뒤로 숨고 싶어 한다. 똑같은 질투로 루시가 화를 냈을 때, 조슈아는 그 어디로도 숨지 않는다. 어느 한쪽은 숨고 싶어 하고 어느 한쪽은 숨을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불평등이 그 안에 있는 거다. 실제로 조슈아가 루시를 위협하느냐 안 하느냐와는 다른 문제다. 어쨌든 내 앞에 있는 저 남자가, 좀 전까지 나랑 무엇을 했고 어떤 말을 나눴든 간에, 나를 위협할 수 있는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피하게 되는 것. 그것이 이성애 로맨스 안에 있는 거다. 이것은 신체적으로 한쪽은 삽입을 '하는' 입장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삽입을 하는 입장에서는 강제적으로 당할 확률이 아주 낮다. 특히나 사회적 조건이 얼추 비슷한 경우라면 강제적으로 당할 일은 없다고 봐야 한다. 우리는 모두 그걸 알고 있지 않은가.



또한 이 소설에서처럼 아무리 균형감각을 가져가려고 해도, 이성애 로맨스 안에서는 사회적으로 부여된 젠더 롤에 충실해지려는 자신을 발견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상대 역시 젠더 롤에 충실하기를 바라게 되고. 나만 해도 이 소설 읽으면서 강인한 근육을 가진 조슈아에게 반하지 않았는가. 네가 좀 더 단단하기를, 네가 좀 더 근육질이기를, 네가 좀 더 나를 보호해주기를, 기타 등등. 내가 온전한 한 사람의 인간이며 나는 혼자서도 충분히 기능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 관계 안으로 들어가면 젠더 롤에 나를 자꾸 맡기고 싶어 지게 되는 거다. 왜일까. 그게 더 편하니까? 어쩌면, 그게 더 이 이성애 로맨스 관계를 부드럽게 만들어주니까?



이성애 로맨스는 본질적으로 페미니즘적일 순 없겠구나, 그런데 이 사회는 거대한 이성애 로맨스 사회다, 그래서 이렇게나 페미니즘이 가는 길이 멀고도 험난 한 건가, 하는 생각을 어쩔 수 없이 하게 되었다. 자, 이쯤에서 우리 '에바 일루즈'의 말을 들어보자.



평등은 원래부터 혼란스럽다. 평등을 기본 전제로 깔면 역할 분담이 제대로 이뤄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갈등이 불거진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평등이 불안함과 애매함을 낳는 원인이라 말할 수 있다. 불평등을 편안하게 여기게 만드는 두 번째 측면은 권력관계를 보호관계로 바꿔주며, '자연스러운' 상호의존성과 강한 감정적 접착성을 만들어준다는 점이다. 반대로 평등은 어떤 의무감도 낳지 않는다. 오히려 각자의 욕구와 권리의식을 강화함으로써 상대방과 갈등을 빚도록 조장한다. 불평등이 지닌 세 번째 편안한 측면은 역할 문제를 놓고 서로 협상을 벌이지 않아도 좋다는 점이다. 이로써 관계 당사자들은 좀 더 자발적이고 직접적인 감정을 가짐으로써 골치 썩을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우리가 즐겨 보는 드라마 시나리오가 그려내는 사회적 역할을 보라. 고민하고 자시고 할 것 없이 그저 감당하기만 하면 되는 역할이지 않은가. -《사랑은 왜 불안한가》, 에바 일루즈, p.82-83


《사랑은 왜 불안한가》, 에바 일루즈


에바 일루즈는 그러나 우리가 불평등을 더 편하게 생각하는 바로 그 지점은, 그것이 우리가 누군가의 지배를 원해서는 아니라고 덧붙인다. 그게 아니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라도 상대와의 결합을 원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논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가부장제를 갈망하는 태도는 페미니즘의 반작용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이런 갈망은 여성이 지배당하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감정적 결합을 갈구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물론 감정적 결합에는 피치 못하게 남성의 지배가 뒤따르기는 한다. 혹은 이런 지배를 드러나지 않게 숨기거나 교묘하게 정당화하기도 한다. 마치 남성의 보호자 역할을 봉건 체계로부터 떼어내 보호만 보장해주는 것처럼 위장하지만, 어쨌거나 그 본질은 남성의 지배다. 다시 말해 오늘날 여성은 예나 지금이나 수많은 영역에서 남성의 지배와 직면해야만 한다. 물론 여성에게 낮은 신분을 강요하며 남자에게 보호의 의무를 안기는 봉건적 규칙이 사라지기는 했다.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모양새를 취하기는 했지만, 여성은 감정을 나눌 짝 혹은 배우자를 갈망하는 탓에 여전히 남성에게 휘둘리고 만다. -《사랑은 왜 불안한가》, 에바 일루즈, p.84





사소한 모든 것에서부터 우리는 자기 자신의 모순과 맞닥뜨리게 된다. 주체적인 나를 원하면서도 이성애 로맨스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상대가 나보다 더 강하기를 원하는 거야말로, 대놓고 말하지 못해도 상대가 나를 보호해주길 원하는 것도, 나로서는 언제나 모순을 만나는 순간들이다. 누구나 그렇듯이 내 안의 모순을 만나는 것도 그리고 그걸 인정하는 것도 끔찍하게 싫다. 그렇지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그래서 누군가와는 좀 더 특별하게 좀 더 단단하게 결합하고 싶은 욕망도 막을 순 없을 것이다. 관계에서 오는 즐거움과 기쁨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나는 그동안 그렇게나 로맨스를 읽어온 게 아닐까. 그러나 그동안 나의 삶은 나를 여기로 데려왔고, 그래서 로맨스 소설을 읽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비판적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숙명일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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