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인의 인생의 스물네 시간>
'슈테판 츠바이크'의 [감정의 혼란] 에는 총 네 편의 단편이 실려있는데, 그 중, <어느 여인의 인생의 스물네 시간>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이제는 육십이 넘은 여인이 우연히 만난 남자에게, 그가 열린 사고를 갖고 있는 것 같으므로,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이십년 전 자신의 하루를 얘기한다.. 남편이 죽고나서 혼자가 된 사십대였을 때, 그녀는 도박장에서 한 청년을 만난다. 도박을 하는 그의 손짓은 몹시 다급해보이고, 그 손에서 그의 감정이 고스란히 읽혀서, 그녀는 그가 전재산을 도박으로 잃고 죽으려고 마음 먹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둘 수가 없어, 잘 알지도 못하는 그 청년에게 다가가, 그러지 말아라, 내가 돈 다 잃은 너에게 호텔을 잡아줄게, 거기서 일단 오늘 편히 자고, 그리고 내가 내일 너가 너의 나라로 돌아갈 돈을 줄테니 절대 나쁜 생각을 하지 말아라, 한다. 그는 낯선 여인의 친절로 노숙을 하지 않을 수 있었고 자살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부모님이 준 돈 다 날려먹어서 콱 죽어버려야겠다고, 그것만이 답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갑자기 이 구원자가 나타난거다.
그는 악인이 아니었고 은혜를 모르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착실한 청년이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감사하고 그녀에게 존경을 표한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그와 한 호텔에 있게 되고, 그를 안심시키며, 그래서 잠든 그의 얼굴을 바라보게 된다. 모든 욕정이 다 드러났던 손과 얼굴, 그리고 지금은 해맑게 천사 같은 미소를 머금은 얼굴. 그렇게 그의 얼굴을 한없이 바라보다가 그녀는 그의 이름도 모르는채로, 그 호텔의 이름도 모르는채로 낮 열두시에 카지노에서 만나자고 한다. 모든 일을 바로잡겠다고.
그녀의 기분이, 그녀의 생각이 달라졌다. 그녀의 자식들에겐 딱히 그녀가 필요한 것 같지도 않고, 그녀 자신도 스스로에게 관심이 없었다. 목적 없는 인생이었는데, 갑자기 그녀는 누군가의 구원자가 되었으며 삶에 의욕이 생겼다. 나는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다! 오늘 나는 그를 만나 그의 일을 처리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어제 우연히 만난 그 때는 그가 도박에 모든 것을 잃었고 또 밤이어서 서로의 얼굴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낮에 다시 보게 될 나를 기억할까?
그러나 약속장소에 나가자 그는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향해 달려온다. 그녀에게 감사하는 얼굴, 순진하고 무고한 얼굴, 예의바른 태도. 그녀는 그를 데리고 점심을 먹으러 가서 그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가 예비 외교관 시험 합격해 아버지로부터 받은 돈으로 경마를 해보고 돈을 땄던 일, 그러다가 도박의 광기에 자기를 맡겨 시간과 학업과 돈을 탕진하게 된일. 도박 빚을 만들고 누나한테 갚게 하고 그러다 숙모의 귀걸이를 훔치고.. 그녀는 그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아 도박에 미친놈이구나, 세이 굿바이 하자, 했어야 했다. 정말 그랬어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가여워한다. 이렇게 해맑은 청년이 어쩌다가... 그녀는 돌아갈 여비와 귀걸이를 찾을 돈을 줄테니, 반드시 오늘 출발해 가족에게 돌아가라고 얘기한다. 그렇게 약속한다. 그는 그녀를 경배하며 감사한다. 신앙심이 깊은 그를 성당으로 데려가 맹세까지 시킨다. 그리고 그에게 돈을 준다. 격렬한 감정에 휩싸여 그에게 돈을 주면서, 가족 약속에 갔다올테니 일곱시에 기차역에서 만나자고 한다. 우리 일곱시에 기차역에서 만나 작별인사해요. 세이 굿바이- 아련~
그녀는 실망했다. 자신에게 가지 말라고 말하지 않는 청년을 보고 실망했다. 나 가지 말라고 잡아주지. 그러나 그녀는 가족 모임에 가야했고, 그렇게 참여한 가족 모임에서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었다. 내내 청년이 나를 여자로 보지 않았던 것 같아서 고통스러웠다. 솔직해지자면, 만약 그가 그녀에게 함께 가자고 했다면 자식들을 다 버리고 그리고 체면도 버리고, 당시 사람들이 모두 손가락질했겠지만, 기꺼이 그를 따라가고 싶었다. 내가 그에게 여자였으면, 그가 나를 여자로 봐주었다면!! 아, 도무지 모임에 집중할 수가 없다. 그녀는 아프다는 핑계로 자신이 머물던 호텔로 돌아와 짐을 싼다. 나는 청년을 따라갈 것이다. 청년과 함께갈 것이다. 누구도 나를 막을 수 없다. 나는 그 청년과 지내고 싶어! 그녀의 마음엔 열망이 가득하다. 그런데 시누이가 찾아온다. 몸은 괜찮아? 이러면서. 아, 시간이 가는데, 이렇게 가면 안돼, 아아 일곱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아 시누이 왜 집에 안가, 예의상 대화해주다가 시누이가 통 갈 생각을 하지 않아 더이상 참지 못하고, 집에 가버려!! 나 가야 돼!! 하고 체면이고 뭐고 그냥 짐 다 싸가지고 얼른 기차역으로 간다. 나는 청년을 보아야해, 청년과 함께 보내고 싶어, 내 마음의 열 to the 망!! 그러나 일곱시가 한참 지나고, 기차역에서 청년을 볼 순 없었다. 아... 아...
아!!
다 끝났어.. 다 끝났어. 그를 이제 다시는 볼 수 없어. 그녀는 울고싶다. 그를 놓쳐버렸다. 나를 이렇게 만든 그 청년을 놓쳐버렸어. 나는 그가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는데. 그녀는 절망한다. 이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와의 추억을 곱씹는 일. 그녀는 차례차례, 어제 그를 만났던 곳을 둘러보며 그를 생각하기로 한다. 그를 만나 함께 있었던 모든 곳이 그립다. 공원의 벤치, 도박장, 싸구려 호텔... 그런데!!
아니, 이게 누군가!
도박장에 그가 있다! 그가 있다! 이미 떠난줄 알았던 그가
있!!
다!!
내가 헛것을 보는게 아닐까? 그가 있어! 그를 다시 보고 있어, 나는!! 꺅 >.< 내 사랑은 불발이 아닌가요? 그러나!!
그는 도박장에 있었다. 그녀가 준 돈으로 도박을 하고 있었다. 눈이 도박에 미쳐서 뒤집어져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당장 일어서라고 하지만 그는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하겠다더니 그 말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 결국에는 재차 재촉하는 그녀에게 화를 낸다. 너 때문에 졌어, 어제도 너가 나타나서 내가 졌는데 오늘도 너 때문에 지고 있어!! 라고 한다. 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이 개새끼야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나는 체면도 버리고 자식도 버리고 이 남자 따라갈 생각에 미쳐있었는데, 이 남자는 도박에 미쳐서 나 따위 안중에도 없고, 내가 돈을 준 사람이라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내가 돈을 줬다는 사실이 중요해서, 그러니까 돈을 가진게 중요해서, 그녀에게 예의바르게 대하던 것도, 그 맑던 미소도 다 내던지고, 이제 나때문에 도박에 졌다고 승질을 낸다. 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나의 사랑 갈 곳을 잃어... 내 사랑, 구덩이 속에 빠졌네. 내가 준 것은 사랑이었는데 그가 받은 것은 무엇인가. 아아, 여자여, 왜 남자를 사랑하나요... 그와 나 사이에 있는 이 거대한 구덩이, 그 구덩이에 내 사랑이 빠졌다. 그러나 그는 그 구덩이의 존재도 모르고 그러므로 그 구덩이에 빠진 것이 뭔지도 모른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나는 이 이야기를 읽다가 너무나 울고싶어졌다. 울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내 안에 사랑과 욕망이 들끓었고 삶에 대한 의욕도 치솟았는데, 그런데 정작 나를 그렇게 만든 상대는, 도박 말고는 생각할 수 있는게 없었어...남자, 고쳐쓰는 거 아니라는 걸, 그녀는 이번 기회에 알았겠지. 그렇게 지금은 예순이 넘은 그녀가 마흔이 넘었을 때 일어났던 일을 낯선 신사에게 고백한다. 그 때 그랬답니다. 그리고 나는 그 길로 도망쳐서 아들네 집으로 갔지요.....
그녀에게 찾아온 것은 커다란 실망이었지만 그리고 절망이었지만, 그러나 이 일이 그녀의 삶에 없는 편이 더 나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삶이 다시 의욕을 찾으려고 했던 그 순간이, 존재했었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세상의 모든 사랑은 사실 불발로 끝나는 경우가 많고, 심지어 어떤 사랑은 상대가 알아채지도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쪽이 낫지 않았을까. 그러나 거기에서 오는 고통은 또 얼마나 큰가. 나는 진짜 도박장에서 눈 뒤집힌 '내가 사랑한다고 생각한 남자'를 봤을 때의 그 절망을, 와, 감당할 수가 없을 것 같다. 내 자신이 싫어질 것 같아. 하, 나는 어쩌자고 이런 사람을... 하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그런데 그런 사람을 사랑한 것이 나의 잘못인가요????
인생에서 특별한 시간은, 대부분 길게 유지되지 않는다. 짧다.
하..밤이 깊어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