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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락방 Oct 12. 2020

《사랑의 묘약》

감자 껍질 벗기기

《사랑의 묘약》, 루이스 어드리크 지음, 문학동네, 2013

몇  년 동안 나긋한 달콤함에 길들었던 나는 이제 뭔가 다른 맛을 갈망했다. 하지만 여전히 사탕 맛도 그리웠다. 나는 두 가지 맛을  모두 실컷 즐기지 못했고, 그것이 내 문제이자 삶의 다른 갈래 길로 덜어선 지 한참 지나서까지 룰루를 잊지 못한 이유였다.  (p.165)



 캐시포'는 룰루를 처음  본 순간 반해 사랑에 빠졌다. 아주 젊은 시절의 일이다. 룰루와 달콤한 시간을 만들어갔고, 당연히 룰루랑 결혼할 줄 알았는데,  언덕에서 우연히 마주친 '마리' 에게 끌리게 되어 그 언덕에서 그녀와 섹스하게 되고 그렇게 그녀와 결혼하게 된다. '룰루'는  단맛을 주는 여자였다면 '마리'는 쓴맛을 주는 여자였다.


결혼해서 아이들까지 여럿 낳았지만, 그러나 넥터는 룰루를 그리워한다. 그렇게 넥터는 룰루와 바람을 피우게 된다.


이  세상에 나랑 똑같은 성향, 똑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은 없다. 나는 나로서 존재하며 나는 세상에 유일한 나이다. 그런 나를 다른  사람이 백 프로 완벽하게 충족시켜 줄 수는 없다. 백 프로 나를 만족시키는 존재 역시 없을 것이고. 우리는 아주 많이 다른 점들을  갖고 있으면서 그러나 서로에게 조금씩 자신의 기질을 양보하고 맞춰나가면서 관계를 시작하고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설사 나랑  똑같은 사람을 만난다고 해도, 그 사람이 나를 온전히 채워줄 수 있을까? 아니, 우리는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그 자체로 온전한  누군가가 될 수 없다. 많이 사랑해도 실컷 사랑해도 때로는 외롭고 때로는 공허하며 때로는 빈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바람을 피우는 것, 자신의 배우자나 애인이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에게로 향하게 되는 것은 이 충족되지 못함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바람이 타당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어야 한다.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결코 버리지 못할 것은 무엇인가, 하고.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또 무엇이 가장 충족에 가깝게  나를 채워주는지 알고 있다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할 때 공허할 일을 막을 수 있을 테니까.



나는  넥터가 내가 말한 것처럼 공허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그는 '난 다 원해'라고 생각하며 쓴맛과 단맛을 찾았는데, 이렇게  이것저것 다 좋아, 그리고 다 갖고 싶어, 다 가질 테야, 하는 것은 비열한 욕심 채우기에 다름 아니다. 내가 쓴맛을 선택했다면,  그렇다면 나는 단맛을 포기해야 한다. 사람은 다 가질 수가 없을 테니까. 만약 넥터가 원하는 것이 어떤 정서와 영혼 그리고  마음에 관련된 것이었다면, 가장 충족된 한 사람을 찾고 다른 사람에 대해 크게 욕심부리지는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원한 것은 단순히 단맛 그리고 쓴맛이었다. 모두 즐기고 싶어 하는 성향. 그것은 나를 채워줌과는 다르다. 충족과는 달라. 충족과는  다른, 다 갖고 싶은 무엇.


어쨌든 그는 그 두 가지를 다 갖고 싶었고, 그래서 그렇게 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단맛의 룰루에게도 충실할 수 없고 당연히 쓴맛의 아내에게도 충실할 수 없다. 마리에게는 거짓말을 해야 하고  룰루에게는 헛된 약속을 해야 한다. 룰루는 더는 이렇게 아내 있는 남자의 헛된 약속에 기댈 수 없으므로 다른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결심한다.


넥터는 룰루가 다른 남자에게 안기는 걸 상상만 해도  너무 괴롭다. 아, 안 되겠다, 나는 룰루를 사랑해, 룰루를 사랑한다. 결국 그는 룰루에게 가기로 마음먹는다. 아내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아내에게 편지를 남기고 집을 나선다.



사랑하는 마리

나는  하루하루 더 힘이 드는데 이제는 이렇게 살 수 없어. 한때 당신을 사랑한 것은 틀림없지만, 요즘 룰루를 만나고 있어. 이제  그녀가 내 선택을 강요하고 나도 떠날 때가 됐어. 정말 미안해. 그녀에게서 진정한 사랑을 찾았어. 선택의 여지가 없어. 하지만  넥터 캐시포가 제 식구를 잊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 (p.208)


이 편지를 펼쳐본 마리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내가 사랑한 남자, 결혼한 남자, 아이까지 같이 키우던 남자가  다른 여자에게서 '진정한 사랑'을 찾았다니.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사랑이었나. 이 편지를 열어본 마리는 대체 어떠했을까.


나는 너무 괴로웠다. 너무너무 괴로웠다.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내가 사랑한 남자가,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한 남자가, 그런데 나에게 다른 여자와 진정한 사랑을 하게 됐다고 말하다니.

나는  내가 가장 사랑한 남자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가 내게 그렇게 말한다면, 하고 생각했다. 아, 그다음의 남은 시간들을 나는  살아낼 수 있을까? 나는 무엇이었나. 나는 무엇이었지. 더 절망적인 건, 나는 여전히 그를 사랑한다는 거였다. 마리는 넥터를  사랑했다. 마리는 여전히 넥터를 사랑한다. 넥터는 마리의 유일한 사랑인데, 그런데 넥터는 진정한 사랑을 찾았다며 마리를  떠나겠단다. 아!



나는 사람이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 진정한 사랑이 있다면, 결국은 그쪽을 향하게 되어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 어차피 사람은 그쪽을 향해 움직일 수밖에 없다. 왜?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하니까, 자기 자신을  채워야 하니까.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가장 만족시킬 수 있는 상대,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가진 상대를 찾을 수밖에 없고,  찾았다면 설사 그때 다른 사람이 내 옆에 있어도 이동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그러나, 이것이 나와 상대가  엇갈렸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당신은 나를 충족시켜준다, 당신이 있다면 나는 다른 부족한 것도 생각나지 않고 다른 곳을 쳐다보지도 않게 된다, 당신을 사랑한다.

그런데 당신은 나로는 안된다고 한다, 나는 당신을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한다,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한다.


아, 마리, 당신은 어때요? 사랑하는 넥터로부터 그런 말을 듣고 당신은 어떻게 버텼나요?

마리는,



감자 껍질을 벗긴다.



오후가 지나가고 있었고,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할지에 대해 아무 생각도 없이 앉아 있었다.

감자 껍질을 벗겨야겠어. 나는 혼잣말을 했다. 아이들이 적어도 오리 한 마리는 잡아올 것이다.

나는  부엌으로 가서 감자 그릇을 놓고 앉았다. 지금껏 살면서 치페와족 남자, 여자, 아이를 먹이느라 감자 껍질을 지긋지긋하게 벗겼다.  하지만 아직 벗길 것이 남았다. 가칫가칫한 껍질을 벗기고 싹이 난 감자 눈을 도려내자 보드랍고 하얀 속살이 드러났다. 그것을  바라보니 마음이 한결 가라앉았다. 한 조각 베어 먹었다. 사람들이 사과를 먹는 것처럼 나는 이따금 생감자를 먹었다.  (p.210-211)


  시간이  지나자 마음이 가라앉았고, 나는 이유가 있어서 가지 않은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유는 충분했다. 편지에서 그녀를 사랑한다고  했다. 나는 감자 껍질을 더 벗기기 시작했고, 왜 그런지 모르지만 이제는 그냥 넘길 수 없었다. 마음을 가눌 수 없었다. 그가  라마르틴 여자를 사랑한다는 그 사실은 지금껏 그가 내 삶을 불편하게 하고 수치심을 느끼게 한 온갖 행위와는 다른 차원이었다. 그가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에게서 진정한 사랑을 찾았다는 사실 때문에 나는 집에 있는 감자를 모조리 벗겼다. (p.211-212)


사랑이 시작될 무렵의 혼란스러운 내가 떠올랐다. 내가 내 마음을 어쩌지를 못해 도대체 이걸 어떻게 잡나, 싶어 백팔배를 했던 일, 컬러링북을 열심히 색칠했던 일.

이별 후의 내가 떠올랐다. 그 아픈 마음을 어쩌지 못해 한 달을 내리 울던 일,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시간들, 위가 망가질 때까지 술을 마시던 날들.

왜 나는 감자 껍질을 벗기지 않았을까. 감자 껍질을 벗겼어야 하는데. 감자 껍질을 벗기노라면 나 역시 차분해질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잠시 잠깐이라도, 감자 껍질을 벗기는 시간 동안은 감자 껍질 벗기기에 집중할 수 있었을 텐데.


감자  껍질을 벗기는 마리를 보면서 생각했다. 혹여라도 내게 마리처럼, '나는 다른 사람을 사랑해'라는 말을 듣는 때가 온다면, 잊지  말고 감자 껍질을 벗기자. 그때를 대비해 감자를 사서 쌓아둘까 싶었지만, 감자는 싹이 나면 솔라닌이란 독이 생겨, 마냥 둘 수  없다. 그러니 사서 쌓아두는 건 현명한 방법이 아니야. 우리 중학교 때 배웠지요, 솔라닌? 가뜩이나 가슴이 찢어지는데 솔라닌까지  먹으면 안 돼요, 감자를 사서 쌓아두면 안 됩니다. 감자 껍질을 벗겨야 한다면, 새로 사서 벗기는 걸로…


그렇지만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 앞에 이미 마음이 무너져 있는데, 감자 사러 시장까지 갔다 올라니까 세상 귀찮네. 게다가 한두 개 껍질  벗긴다고 고요해지지 않을 터, 한 박스는 사야 할 텐데 또 그러면 세상 무겁잖아? 아아 생각만 해도 짜증 나는구먼. 제발 이런 과정 내가  거치지 않도록, 나에게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됐다는 말을 하지 마.


그러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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