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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락방 Oct 13. 2020

《돈 잘 버는 여자 밥 잘하는 남자》

나도 게으르고 싶다

《돈 잘 버는 여자 밥 잘하는 남자》, 앨리 러셀 훅실드 지음, 아침이슬, 2001


책을  쓰는 동안, 나는 지하에서 흘러나오는 미세한 소리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귀를 쫑긋 세웠다. 내가 땅속의 두더지가 된 것  같았다. 책이 세상에 나온 뒤, 여기저기서 강연 요청을 받게 되었고, 엘리베이터 속의 남자와 같은 수많은 사람들이 내게  접근해왔다. 전국의 라디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책이 소개되었고, 방송국에 갔을 때 안내원은 낮은 목소리로 자신의 전남편은  빨래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녹화를 끝내고 스튜디오에서 나가는데 카메라 기사가 ˝그런데 박사님, 게을러터진 여자는 못 보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p.329)


'알리 러셀 혹실드'의 이 책이 나오고 나서 반응이 꽤 뜨거웠다고 한다. 혹실드 박사는 여기저기 강연을 다녀야 했고  독자들로부터 편지를 받았으며,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로부터 질문과 하소연을 들었다고 했다. 이 책은 혹실드 박사가 12년간  열두 집의 가정으로 들어가 그들의 생활을 목격하고 인터뷰한 뒤에 내놓은 책이다. 대부분의 가정에서 가사노동은 여자들이 부담하고  있었고, 이건 여성이 전업주부이거나 일을 따로 갖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똑같이 밖에서 일을 하고 들어와도 집 안으로 들어와  소파에 가 텔레비전을 보는 대신 청소하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아이를 돌보는 일이 다 여성인 아내의 몫이었다.


이에  아내들은 지친다. 몸이 부서질 것만 같다. 그래서 남편에게 집안일을 좀 같이하자고 말하면 남편들은 화를 내고 짜증을 낸다.  더러는 해주기도 한다. 그건 어디까지나 아내들이 부탁했기 때문에 해주는 것뿐이지, 스스로 알아서 이것은 내가 사는 집, 우리  가족의 일이라는 생각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어떤 남편들은 매우 화를 내고 신경질을 낸다. 그래, 너도 바깥에서 일하니까  힘들지, 그런데 니 바깥일이 힘들다고 해서 내가 왜 가사노동을 해야 해?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가진 남편들도 있다. 아내가  돈을 남편보다 잘 벌든 못 벌든 남편들은 아내보다 확실히 가사노동을 덜했다. 게다가 양육자로서도 한걸음 떨어져 있었다. 남편들이  그랬다.



그런 생활에 지친 아내들은 남편들을 타일러도 보고, 화를 참아가며  부탁을 해보기도 하다가, 포기한다. 어떤 아내들은 포기하고 어떤 아내들은 집을 나가버리고 어떤 아내들은 이혼을 얘기한다. 이  가족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남편에게 이것 좀 해달라 저것 좀 해달라 부탁하는 게 너무 짜증이 나서, 그냥 남편은 창고  일을 하고 나는 나머지 일들을 하면서 반반씩 부담한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남편에게 짜증이 나는 아내들은 바로 '그래도 다른  남자들 보단 낫지', '그래도 이 정도면 내가 운이 좋았지', '이런 남편이라니 그나마 내가 운이 좋은 거야' 라면서 자신을  다독인다. 외부에서 보기에 전혀 운이 좋은 것 같지 않음에도, 그들 스스로는 운이 좋다고 자신들을 다독인다. 운이 좋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는 아내들이, 그런데 왜 삶에 지쳐있고 지겨워할까. 운이 좋다면서 왜 웃음을 잃을까.



나도  그렇지만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선택이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꺼려한다. 그래서 아니, 이 정도면 충분한 거라고 합리화하는데에  열중하기도 한다. 바깥에 나가서도 일을 하고, 집에 돌아와서도 또 일을 하면서도, 그래서 늦은 밤에 침대에 쓰러져버리면서도,  아내들은 '그래도 이만하면 운이 좋았다', '내 남편은 그래도 다른 남자들보다 낫다'라고 생각한다.



남편들은  자신들은 게으르지만 아내들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아내들이 가사노동을 하는 거라고 한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가사 노동을 하는 게 아내들에게 노동을 지운 거라는 생각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한 미친 자기 합리화 아닌가. 집에 와서 쉬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집에 와서 걸레질을 하고 식탁을 차려내고 설거지를 하고 아이들 숙제를 봐주는 것은 또 얼마나 힘이  드는가. 자기는 하기 싫어서 텔레비전 앞에 앉으면서 그건 아내가 부지런하기 때문이라고 말을 하다니.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진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이 책은 이 책이 나오고 난 후의 후기도 실려있고, 저 위에 인용한 부분은 그 후기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박사님, 게을러터진 여자는 못 보셨습니까?˝



게을러터진  여자가 왜 없겠는가! 나 역시도 게을러터진 여자 중 하나다. 우리 엄마는 게으르고 싶지 않았을까? 이 책 속의 아내들이 게으르고  싶지 않았을까? 누군가 밥을 차려야 하고, 누군가 아이들을 씻겨야 하고, 누군가 설거지를 해야 하는데, 그런데 당신이 안 하면 누가  하나? 내가 한다.



일전에 여동생네 가족이 와있을 때였다.  엄마가 이것저것 분주히 부엌에서 움직이고 계셨고 아빠는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계셨다. 나는 거실에서 조카랑 놀고 있는데,  아빠가 엄마에게 '그만하고 좀 쉬어'라고 말하는 거다. 이때부터 내 가슴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엄마가 하고 있는 가사노동-그것이  청소든 설거지든 빨래든- 그걸 엄마가 하고 있다면, 그 일은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즉, 엄마가 그 일로부터 쉬기 위해서는  누군가 그 일을 '대신' 해줘야 하는 것이다. 일을 하는 중에 '쉬라'고만하면, 그 일은 그대로 남아 다시 엄마의 몫이 되는 게  아닌가. '내가 할게 쉬어'가 아니라 '그만 하고 쉬어'라니. 그렇다면 그다음은?



이게 작년인가 재작년의 일이다. 그래서 잔소리를 할까 말까 하는 와중에 여덟 살 조카가 우리 아빠에게 그랬다.



"그러면 할아버지가 해야지! 할아버지가 하는 것도 아니면서 쉬라고 하면 어떻게 쉬어!"



이  날은 집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기로 한 날이었다. 식탁 위의 불판에서 고기는 익어가는데 조카 1이 자꾸 나를 부르고, 그렇게 조카를  상대해주고 앉을라치면 여동생이 조카 2 때문에 나를 부르고.. 그렇게 움직이느라 편하게 앉아 먹지 못하는 상태였다. 고기는 제부가  계속 굽고 있었다. 아빠는 계속 드시고 계셨다. 아빠가 다 드시고 일어나실 때쯤 나는 자리에 앉을 수 있었는데, 아빠는 내게 '너  아직도 다 안 먹었냐'라고 하시는 거다. 와. 얼마나 화딱지가 나던지.



"나도 아빠처럼 누가 구워주는 거 가만히 앉아서 받아먹기만 하면 아까 다 먹었지!!"




회사가  누군가의 노동으로 굴러가는 것이듯, 집안도 누군가의 노동-가사노동, 돌봄 노동-으로 굴러간다. 그리고 대체적으로 그건 대부분  아내만의 몫이 된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렇고 조금 달라졌다고 해도 지금까지도 역시 그렇다. 82년생 김지영이 괜히 나왔겠는가.

아빠  엄마가 맞벌이로 돈을 벌러 바깥으로 나가셔서 나는 어릴 적부터 동생들과 함께 집을 보아야 했다. 엄마는 그런 우리가 불안해 가끔  친할아버지를 부르시고 가끔 외할머니를 부르셨다. 외할머니는 우리 삼 남매의 밥을 챙겨주시고 어린 동생을 씻겨 주셨고, 넘어져  다치거나 화상을 입으면 약을 발라 주셨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가만 앉아있다가 열 살, 열한 살 내가 차려주는 밥을 가만 받아먹고  부모님 중 누군가 오시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는 일찍부터 돈 벌기는 중단하고 계셨었다. 덕분에 아버지는 가난하게  자랐고.... 돈도 안 벌고 밥도 안차려 먹고.......... 그만두자, 이런 얘기는.....




아,  그러니까 나도 게으른 사람이라는 거다. 우리 친할머니도 게으르고 싶었을 거고 외할머니도, 엄마도 게으르고 싶었을 거다. 그러나  게으르고 싶다고 해서 게을러진다면 집안이 대체 어떻게 굴러가겠는가. 밥상을 차리는 것도, 다 먹고 난 후에 치우는 것도, 지저분해진  집을 청소하는 것도, 옷을 빠는 것도... 나 게을러 너 게을러 우리 모두 게을러 그러니까 안 해~ 이렇게 되면 집안은 어떻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게을러터진 여자는 못 봤냐는 저 피디의 말은 정말이지 답답하기 짝이 없다.



그래, 게을러터진 여자를 봤다고 하자.

그런데?

그래서?

게을러터진 여자가 있어. 그런데 뭐?

게을러터진 여자가 있고, 그런 여자를 봤다면, 그러면 남자들이 가사노동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하는 것이 갑자기 말이 되는 부분인가?

남성들의 여성에 대한 폭력을 멈추라고 말하는데, '여자들도 때려'라고 말하면, 그다음엔 뭐 어쩌라고? 되는 거잖아. 그래서?  때리는 여자들도 있어서? 그래서 뭐? 그러면 남자들이 때리는 게 갑자기 변명되는 부분인가?



우리  남자들이 다 나쁜 건 아니야, 우리가 다 그렇게 게을러터진 건 아니야, 를 말하고 싶어서 그랬겠지. 그래서 게을러터진 여자도  있잖아! 항변하고 싶었겠지. 그러나 게을러터진 여자가 있다고 해서 갑자기 남자들이 가사노동에 뛰어드는 게 아니잖아. 게으른  여자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서 뭘 어쩌자는 거지?



이  책 속에 나오는 부부들 역시 다른 부부들과 마찬가지로 함께 살고 싶어서 함께 살기를 결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혼한 후에 그  결혼생활이 자신의 생각하던 것과 다름을 알고 절망한다. 여자는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남자는 뒷바라지해줄 사람이 필요해서 결혼한 것  같다. 회사 갔다 오면 나 다독여줄 사람, 밥 차려주고 옷 빨아주고 침대 정리해줄 사람이 필요해서 결혼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 드는 것이다. 몸종 필요해서 결혼한 부분?

나는 어김없이 나에게도 물었다. 만약 내가 연애하던  중에 그와 결혼하기로 했다면, 내 결혼생활은 어땠을까? 이 책에 드물게 나오는 부부처럼 평등하게 가사노동을 나누고 사이좋게 지내는  부부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알 수 없다. 이 책에 나온 여자들도 그럴 줄 알고 결혼했겠지.



당연한  얘기지만, 혹실드는 자기가 본 부부들 중에서 행복해 보였던 부부들은 가사노동을 함께 분담하고 있던 부부들이라고 했다. 전통적인  성역할에 대한 생각을 바꾸고 같이 해나가야 부부가 행복할 수 있을 거라고 당연한 얘기로 책을 끝맺는다. 성역할도 성역할이지만,  남자들이 뭐 자기들이 돈을 많이 벌면 많이 버는 대로 가사노동에서 자기는 좀 빠져도 된다고 생각하고, 적게 벌면 적게 번다고 자존심  상해서 빠지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너무 우쭈쭈 해준 게 크지 않았나 싶다. 진짜 남자들은 우쭈쭈 해줄 필요가 없다. 버릇만  나빠진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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