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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락방 Sep 15. 2020

《트라우마》그래도 될까?

《트라우마》, 주디스 루이스 허먼 지음, 열린책들, 2012


써 왔던 시를 태우고 싶었다. 강사 일을 관두고 싶었다. 형근과 형근의 어머니를 그만 이해하고 싶었다. 성연은 이런 사건의  피해자가 트라우마 때문에 정상적인 삶을 살기 어렵다는 예측과 우려를 벗어나고 싶었다. 유형과 증상을 뛰어넘을 수 있을 듯했다.  진단과 병명에 갇히기 싫었다. 자신이 성폭력 생존자라는 사실을 무시하고 방치하면 가능한 일이었다. 사건은 없던 일이 되어갔다.  하지만 천막 안의 남자를 본 순간, 가격을 당했다. 사촌과 얼굴이 거의 똑같은 남자였다.- 《지상의 여자들》, 박문영, P171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박문영의 소설 속에 등장했던 저 문장처럼, 바로 저런 생각으로 살고 있을 것이고 또 살고 싶었을  것이다.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나에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러니까 '너 그런 일 때문에 그렇게 되었구나' 같은 말  따위는 절대 듣고 싶지 않아서, 혹여라도 원인과 결과를 그런 식으로 생각할 게 두려워서 더 정상적이고 건강한 삶에 매달리려고  노력했다. 나는 나의 정신건강을 자부했고 또 잘 되고 있었다. '주디스 허먼'의 《트라우마》에서 트라우마에 도움이 되는 게  사회적 지지라고 하는데, 그런 점에서 나는 아주 유리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내게는 지지를 보내주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내가  하는 행동들의 원인이 내 상처나 과거의 경험을 끌고 오기를 결코 바라지 않았고, 박문영이 말한 것처럼 그런 유형에 갇히기 싫었다.  그러나 박문영의 바로 저 문장처럼, 뉴스만 봐도 어김없이 과거로 끌려들어 갔다. SNS로 공유되는 많은 소식들에도 그랬다. 내가  보기 싫은, 듣기 싫은 뉴스들은 하루에도 몇 차례씩 사건으로 나와서 나를 어김없이 두들겨 팼고, 나는 그럴 때마다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렇게 하염없이 바닥으로 끌려가는 게 싫어 오히려 더 등을 돌리고 싶었다가 나 같은 사람이 생길까 봐 오히려 더  행동하고 싶어 졌다. DSO, 초록우산어린이재단, 앰네스티 전쟁 성폭행 피해자 후원, 한국 여성의 전화, 유니세프에 정기후원을 하는  이유는 그 행동의 하나였다. 시위에 나가는 것도 마찬가지. 나는 다른 여성들이 그리고 다른 아동들이 당할 많은 고통과 피해들로부터  그들을 한걸음 더 멀어지게 하고 싶었다. 나는 여성과 아동을 보호하고 싶었는데, 그러다 보면 나 역시도 아무도 몰래 나에게 묻게  됐다. 내가 이러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은 약자의 편에 서기 위함인가, 아니면 나의 트라우마는 이것의 원인이 되었는가. 예측과  우려를 벗어나고 유형과 증상을 뛰어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는 이 삶 자체, 티를 내지 않겠다는 매일의 그 다짐 자체가, 그러나,  내가 바로 거기에 갇혀 있다는 거였다.




정신건강  영역에서 '외상 trauma'이란 과도한 위험과 공포, 스트레스 상황에 대한 심각한 심리적 충격을 일컫는다. 《정신장애 진단 및  통계 편람 4판》에 따르면, 외상이란 심각한 죽음이나 상해를 입을 위험을 실제로 겪었거나 그러한 위험에 직면했을 때, 혹은 타인이  죽음이나 상해의 위험에 놓이는 사건을 목격하였을 때, 이에 대하여 강렬한 두려움, 무력감, 공포를 경험한 경우를 의미한다.  (p.17 서론 中)


하루에도 몇 차례나 일어나는 여성과 아동을 대상으로 한 성폭행에 바닥으로  끌려들어 가면서 나는 그럴 때마다 그 증상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트라우마를 건드렸다거나 트리거 눌렸다는 것만으로  표현했었는데, '주디스 허먼'의 이 책, 《트라우마》를 읽으면서 비로소 적합한 단어를 찾았다. 내가 겪고 있는 것은 트라우마의  공포 중의 하나인 '침투', 그중에서도 '재경험'이었다. 재경험이라는 단어를 이 책에서 맞닥뜨리자마자 주저앉아 엉엉 울고  싶어 졌다. 경험 만으로도 힘든데 재경험이라니. 그런데 그 재경험이 나에게는 몇 번이나 일어난다. 결코 끝이 나지 않는다.



내가  스스로 인지하는 증상이 '재경험'이었다면, 인지하지 못한 것 중에는 '과각성'이 있었다. 잠을 깊이 자지 못하는 것, 코를 골며  자다가도 작은 소리에 벌떡 깨버리는 것. 주디스 허먼은 이 과각성 역시도 트라우마의 고통 중 하나라고 했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걸 극복하고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 생각보다 더 많은 고통을 끌어안고 살고 있었던 것 같다.



외상을  경험한 뒤, 인간의 자기 보호 체계는 영속적인 경계 태세로 들어가는 것 같다. 마치 위험이 어느 순간에라도 되돌아올 것처럼  말이다. 생리적 각성은 줄어들지 않는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주요 증상인 이러한 과각성의 상태에서, 외상을 경험한 사람은 쉽게  놀라고, 작은 유발에도 과민하게 반응하며, 잠을 잘 자지 못한다. 카디너는 "외상 신경증의 핵심은 '생리  신경증 physioneurosis'"이라고 제안하였다. (p.71)




이  책을 읽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도 위에 언급한 것처럼 예측과 우려를 벗어나고 유형과 증상을 뛰어넘을 수 있기를 바라서였다.  그러니까, 나 스스로 원인과 증상을 진단하고 또 해결하기 위해서. 스스로 극복하기 위해서. 나는 내가 스스로 극복했다고 자신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 책을 읽으면 그전보다 더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이런 나의 기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충분히 충족되었다. 트라우마에 대해서 설명하는 1부에서 나는 트라우마에 대해 희미하게 내가 파악하고 있던 것들을 정확한 용어들로 설명한 정확한 문장들로 읽게 된다.



번역된  이 책의 제목은 《트라우마》이지만 원제는 《Trauma and Recovery》이다. 나는 '트라우마'만 보고 이 책을 구입하긴  했지만 원제의 리커버리를 보고 너무 좋았다. 게다가 이 책의 1부를 읽으면서 미친 듯이 밑줄을 그으며 읽었기 때문에 2부의  리커버리는 더 기대됐고. 1부를 읽으면서 '이 책은 어쩔 수 없이 올해 내가 읽은 최고의 책이 될 것이다!' 했는데, 2부를  읽으면서 나는 당황했다. 이 책에서 말하는 회복은 내가 기대하는 회복이 아니었다. 나는 스스로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고, 극복하고,  그렇게 일상으로 돌아오는 방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기대했다. 그러나, 이 책의 2부에서 말하는  리커버리는, 내 기대와 달리 '치료자'와 피해자의 관계, 치료자가 할 수 있는 방법 그리고 생존자가 해나가야 하는 방법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다. 그렇다 해서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치료자에게 조력자도 필요하다고 말해주고 또 집단 치료의 효과에 대해서 말해주기  때문에, 외상의 피해자에게는 역시 전문 치료가나 치료방법이 가장 효과적이겠구나, 를 알 수 있었으니까. 그런 치료자와 함께 더  나아진 삶을 살게 되고 치료가 됐다고 믿었던 환자라도, 시간이 흐르면서 어떤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면 다시 플래시백, 과거로  끌려들어 가 고통을 겪을 수 있다. 외상의 피해자는 그러니까 외상이 없었던 것처럼 살 순 없다는 거다. 다만, 그것을 인정하고 다시  살아가기를 택하는 것뿐.



복합성 외상을 겪은 생존자  혹은 피해자들은, 성인의 경우 성격이 바뀌기도 하고 아동의 경우 성격이 형성되기도 한다. 그들이 원만한 인간관계를 갖고 일상으로  회복되기까지는 매우 어려운 시간들이 그들 앞에 남아있는데,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들에게 사회적 지지가 있다면 더 치료되기가 쉽다고  주디스 허먼은 얘기한다. 굳이 이 책에서 얘기해주지 않아도 실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인데, 적극적 지지, 공감, 사랑,  신뢰는 누구에게든 다시 일어설 힘이 되지 않는가. 그러니 트라우마의 생존자에게도 그런 긍정적 감정들과 지지가 있다면 생존자가  일상을 회복하고 사회에 자연스레 섞여 드는 일은 좀 더 수월할 것이라는 걸, 나 역시 믿는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 사회적 지지 혹은 나를 믿고 신뢰하는 사람의 얘기를 했다고 해서, 나는 궁극적으로 타인에게 기대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그게 틀리다는 게 아니라, '그래도 될까?' 하는 생각. 나는 물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가족과  다른 누군가-에 대해서라면 언제까지나 믿고 지지할 것이고, 나의 신뢰가 그들이 혹여 받게 될지 모를 세상의 숱한 상처로부터  극복하는데 힘이 되기를 바랄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진심으로 애정을 줄 것이다. 그러나 나를 놓고 보자면, 내가 타인에게 그것을  기대하는 것이 나에게 좋을지는 잘 모르겠다. '사회적 지지'라는 용어가 반복되는 책을 읽고 오히려 나는, '역시 나는 혼자여야  하겠구나'를 더 실감했다. 혼자여야 해. 때때로 재경험 때문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상대까지 힘들게 하는  일은, 나는 하고 싶지 않다. 그걸.. 도저히 내가 감당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무너질 것 같은 나를, 상대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가까스로 억지로 지탱하고 싶지도 않고. 나는 그간 내가 받았던 애정과 신뢰로 이런 성격을 쌓았고 이 성격은 나로  하여금 많은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게 만들었으며 또 극복하게 해 줬다. 나는 내가 극복할 수 있다는 걸 알고 또 믿는다. 도움을 잘  받는 것이 용기라는 것도 너무나 잘 안다. 그렇지만 내가 받을 수 있을지를 모르겠다. 내가 나를 있는 그대로 다 드러내고 다른  사람의 따뜻한 마음을 받는 것을 해도 될까? 정말 그래도 되는 걸까? 물론 여태 그렇게 살아왔고 그 점이 나의 큰 행운이었으며  그래서 감사하지만, 그런데 누군가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온전히 나를 다 드러내고 그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져버리기도 하는 삶을..  내가 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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