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락방 Sep 16. 2020

《철로 된 강물처럼》상실속에도 함께 있다면

《철로 된 강물처럼 Ordinary Grace》, 윌리엄 켄트 크루거, RHK, 2016





프랭크가 사는 작은 마을에서 한 아이의 시체가 발견된다. 연달아 그 동네 떠돌이가 죽고 그리고 주인공의 누이도 죽는다. 이  모든 죽음들에 어떤 연관성이 있을지 범인을 찾아가는데, 읽으면서 자연스레 과연 누가 죽인 걸까 마을 주민인 사람들을 나 역시 차례로  의심해보기도 했다. 중간을 지나면서부터 살인 도구에 대해 언급되는 걸 보고 아, 이거 누가 썼더라, 하면서 막 생각도 하고  그랬어. 그렇지만 어쨌든 이것은 상실에 관한 이야기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고  살아가야 하는 이야기.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은 가능할까. 딸의 죽음으로 엄마는 무너진다. 속이 빈  계란 껍데기 같이 망가져버리는데, 그런데 그런 엄마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은 가능할까? 누나의 죽음으로 프랭크와 동생인 제이크가  상실감에 허우적거리고 또 같은 상실감으로 자신들을 돌보아주지 않는 엄마 때문에 외로워야 하는 것들을 표현한 것은 이 책이  궁극적으로 보여주고자 한 바가 아닌가 한다. 작은 마을에서 사람들이 죽었지,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상실감을 느껴야 했어, 그들은  다시 예전처럼 살 수 있을까, 그들은 남아있는 자들끼리 다시 결속할 수 있을까, 그들은 그 상실을 계기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것들. 그렇다 해도 지나치게 많은 죽음이 나와서 좀 과하다 싶었지만, 그러나 죽음이란 것은 인간에게 반드시 찾아오는  것이기에 어쩌면 죽음과 죽음과 그다음 죽음을 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겠다.



최근에  강한 태풍으로 산사태가 일어나는 뉴스를 보면서, 산이 무너지고 있는 현장의 근처에 있던 사람들, 아파트 주민이나 공장 직원들은,  저 산이 무너져 내가 다칠 수도 있다, 죽음의 위험에 놓일 수도 있다는 것을 상상이나 했을까,라고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했다. 인간이 태어나 살아가면서 죽음은 필연적으로 찾아올 것인데,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죽음이 찾아올지 알 수 없다. 늙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죽는 것, 아프지 않고 죽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지만, 우리는 사고로 죽을 수도 있고 자연재해로 죽을  수도 있다. 때때로 어차피 죽을 거라면,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 걸까,라고 되묻게 되지만, 제대로 된 답을 내리지 못하면서도  어제를 살고 오늘을 살고 내일을 산다. 



그리고 사랑에 대해 생각한다.

이  책에는 사랑이 나온다. 왜 아니겠는가. 어느 책에서든 어느 영화에서든 사랑을 다루지 않는 것이 있던가. 그러나 사랑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사실 필요를 사랑으로 착각하지 않는가, 욕망을 사랑으로 착각하지 않는가. 사랑이란 이름을 덮어 씌우면 그것이  마치 아름답고 긍정적인 무엇이 되는 것처럼, 사실은 가지지 말아야 할 감정에 대해 사랑이라 이름 붙이지 않는가. 그렇게 사랑은  집착을, 폭력을 숨겨버리지 않는가.

어느 순간부터 사랑은 집착이 될까. 어느 시점에서 사랑은 집착이 될까.



일전에  읽었던 프랑스 소설에서 자신은 상대를 사랑하고 헌신하는데 그것이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돌아오지 않자 극단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내용이 나왔더랬다. 사랑은 그대로의 사랑이어야 할 것인데 지나치게 자기희생적이 되는 순간부터 망가져버리는 것 같다. 사람은  자기가 준 것만큼 받고 싶어 한다. 지극히 당연한 이치다. 내가 하나 주었으니 너도 하나를 주렴, 하는 것은 모두가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나 같지 않기 때문에 내가 하나를 주었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를 받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대체적으로 그런 일은  가장 공평해 보이고 가장 상식적으로 보이지만, 그러나 잘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내가 하나를 주고 두 개를 주고 열셋만큼 주어야  비로소 하나가 오기도 하고, 내가 스물만큼 주어도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기도 한다. 반대로 내가 둘을 주었는데도 나에게 열일곱이  돌아올 때도 있다. 그러면 나는 그 차이인 열다섯을 어딘가에서 얼마큼은 쓰고 있을 것이다. 내가 너에게 하나 네가 나에게 하나, 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세상이 굴러가는 건, 네가 나에게 열일곱 내가 너에게 둘, 내가 저 사람에게 넷, 다른 저 사람에게 서른, 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열넷... 하는 식으로 굴러가는 거다. 그러다 보니 내가 많은 걸 준 상대가 내게 적게 주었을 때 억울하고  속상한 사람이 생긴다. 그럴 때 내가 상대에 대해 가졌던 선한 감정은 변질되고 만다. 내가 이만큼이나 했는데 너는 왜?


필요도 있다. 필요. 

사람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느끼는 데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누군가는 '내가 너에게 이만큼이나 필요한 존재지'를 느끼면서 그 가치를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다. 세상 그 어떤 말보다 '네가 없었으면 나는 어떻게 살았을까'란 말로 자기 인생을 긍정하는 사람도 있다.  내가 사랑하는 이 사람이 나를 이만큼이나 필요로 한다는 사실은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을 유지하는 가장 큰 축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게 무너질 것 같다던가 위태롭다던가 하면, 그걸 바로 세우기 위해 나는 잘못된 선택과 판단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그런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이 저지르는 가장 일반적이고 큰 실수가, '내가 사랑하는 이  사람에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을 못 견디기 때문에 일어난다. 나는 너에게 우선순위어야 해, 나는 너에게 일 순위어야  해, 나는 너에게 유일해야 해. 그것이 유지되어 오는 것 같다가 어느 순간 그 사람이 꼭 내가 아니어도 살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면 마음이 난장이 되어버려.. 그것을 다스리지 못하는 순간 파국을 불러온다. 그래서 내가 누누이 예전부터 지금까지, 쭉,  한결같이, 한 사람만으로는 안된다고 하는 거다. 그 사람만 보는 걸로는 삶을 건강하게 유지할 수가 없어. 우리가 파국으로 치닫지  않게 건강하게 지낼 수 있으려면, 내 인생에 너만이 유일해서는 안된다. 네 인생에 나만이 유일해서도 안되고. 그렇다면 그다음에  일어날 예기치 못한 일들에 우리가 대처할 수가 없단 말이다. 주저앉고 무너지고 망가지는 건 시간문제야. 휴우-




프랭크  아버지의 직업은 목사다. 프랭크의 어머니는 목사랑 결혼한 게 아니었다. 변호사 지망생과 결혼했고, 남편은 제일가는 변호사가 될 줄  알았는데, 참전 후에 돌아온 남편이 갑자기 목사가 되어버린다고 하는 거야... 빡이 치는 거죠.. 나는 변호사랑 결혼하는 건 줄  알았는데... 아버지의 신앙은 대단했고 언제나 신앙을 중심으로 세상을 살았고, 아버지를 지탱하는 가장 큰 축은 하나님이었다.  가족의 상실을 같이 겪었는데 아버지는 신앙에 기대려 하고, 딸을 잃는 것에 있어 아무것도 해주지 않은 하나님 아버지를 내 앞에서  언급하지 말라고 엄마는 말한다. 한 번만 더 하나님 찾았다가는 당신을 떠날 거야,라고 말하고, 직업이 목사인 이 신앙인은, 아아,  하나님 나한테 가장 중요한 거 알면서 어떻게 그래,라고 하는 바람에 엄마는 짐을 싸들고 떠나버린다.



프랭크의 아버지는 참전의 상처를 가지고 있다. 그 안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고 가족들도 그 상처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지 않지만, 목사가 된 이후의 그는 신앙에 충실하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으로 감싸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이 나쁘다고 욕하거나 차별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편견을 갖지 않으려 한다. 마땅히  그래야 할 자세이지만, 가끔은 원망스럽기도 하다. 기도 대신, 감싸 아는 거 대신, 포용 대신 지금은 분노가 필요할 때가 아닌가. 아마 나도 속된 인간이라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속에서 아버지인 목사님이 장례를 집전하며 했던 말씀이 좋더라. 이런 말씀을 특히나 상실감에 쌓였을 때 듣는다는 것은 좋을 것 같다. 길지만 좀 인용해 보겠다.




아버지는 시편 23편을 읽은 후 롬 8장 38절과 39절 말씀을 읽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아버지가 성경을 덮었다.


"우리는  자꾸만 우리가 걷는 인생길을 홀로 걷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이  남자조차도 하나님께는 알려져 있었고 하나님은 줄곧 이 남자와 함께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쉬운 삶을 약속하시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고통받지 않게 하겠다고, 절망과 고독, 혼돈, 자포자기의 감정을 느끼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우리를 고통 중에 혼자 있지 않게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대로는 우리가 눈이 멀고 귀가 먹어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보고 듣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곁에, 우리 주위에,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른 것을, 모든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을 약속해주셨습니다. 바로 끝이  있게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의 아픔에, 우리의 고통에, 우리의 외로움에 끝이 있게 하겠다고,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있게  하겠다고 그리고 하나님을 알게 하겠다고, 그래서 그곳이 천국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살았을 땐 지독한 외로움을 느꼈을 이  남자도 이젠 더 이상 외롭지 않습니다. 살았을 땐 끝없는 기다림의 나날을 보냈을 이 남자도 이젠 더 이상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마련하신 자기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기뻐하는 이유입니다." (p.112-113)



기뻐하기까지  하는 건 좀 오버인 것 같지만,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대해서는 나랑 같지 않을 것이다. 위의 문장을  읽으면서 이미 죽은 자에게는 죽음 자체가 슬픔일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픔은 남은 자의 몫, 누군가를 상실한 살아있는 자의  몫이라는 생각. 



프랭크는 누나를 잃고 자신의 가족이 이대로 붕괴되어 버릴 것  같다는 느낌에 두려워한다. 아버지와 엄마가, 자신과 동생이 모두 마음적으로 뿔뿔이 흩어질까 봐. 그러나 그들은 그 가족 내의  구성원이었고, 모두의 공통된 슬픔에 각자의 슬픔을 얹어 괴로워한 후, 흩어지는 대신 결속하게 된다. 하나님은 끝이 있게 하겠다  약속하셨다는데, 그 약속에 대해서라면 잘 모르겠다. 이런 종류의 상실감이, 끝이 있긴 한 걸까? 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옅어지는 건  아닐까? 그러나 혼자 있게 하지 않겠다는 약속은 이 가족에 대해서라면 지켰다고 해도 좋겠다. 각자의 고통을 겪고 영혼이 빠져나갈 것  같은 상실감 속에서도, 그러나 그들에게는 서로가 있었으니까. 



"행복이란  게 뭘까, 네이선? 내 경험으로는, 길고 험난한 길을 가는 중간중간 잠시 쉬었다 가는 것, 그게 행복이던데. 항상 행복한 사람이  어디 있겠나. 행복이 아니라 지혜라는 변덕스럽지 않은 미덕을 갖게 되길 바라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p.107


작가의 이전글 《트라우마》그래도 될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