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후광

《항구의 사랑》

by 다락방
《항구의 사랑》, 김세희 지음, 민음사, 2019


'김세희'의 《항구의 사랑》여중과 여고를 다녔던 그때의 학생들에게 늘 있었던 일들. 여중과 여고를 다녔던 학생들이라면 경험하거나 아는 일들이 자연스럽게 보인다. 대표적으로는 여학생이 다른 여학생을 좋아했던 일 같은 것.


그 당시의 나는 이런 환경이, 여자들만 있는 환경이 여자가 여자를 좋아하게 만든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남녀공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의 기저에는 동성애는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던 것이고. 이런 잘못된 사랑을 하게 하는 건 이들만 한 공간에 두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거다. '버지니아 앤드류스'의 [다락방의 꽃들] 시리즈에서 다락방에 갇힌 크리스와 캐시가 사랑한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니던가. 한 공간에 갇혀서 다른 사람을 전혀 볼 수 없었던 남녀가 서로를 사랑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환경의 제약 때문이 아니던가. 나는 여중, 여고생들의 동성애를 그런 시선으로 바라봤던 거다. 그러니까 이성과 한 공간에 두었으면 이런 일은 없었잖아, 하고.



그 시절의 일들을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게 된 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누가 누구를 사랑하든, 그러니까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고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듯이 여자가 여자를 사랑하고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일도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여중시절에 여고시절에 누군가 좋아했다면, 남자가 없어서 좋아한 게 아니라 그저 그 상대가 그 순간 좋았을 수 있었던 거였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됐다. 그때 나도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가지면서 '그렇지만 이건 좀 이상한 거잖아' 하고 고민했던 것이, 스스로에게 그리 괴로울 게 없을 일이었는데, 이건 안 되는 거라고 생각하니까 고통이었다.



나는 요즘 우리가 가지는 고민의 일부 아픔의 일부가, 사실은 동성애에 대한 혐오만 없었어도 진작에 없어졌을 것들, 애초에 생기지 않았을 고민과 고통들이라는 것을 생각한다.




김세희는 이 책에서 그 학창 시절에 대해 얘기하면서, 그러나 '사랑'에 대해 얘기한다. 그러니까 '여자가 여자를' 사랑했다는 것에 방점이 찍힌 게 아니라 여자가 여자를 '사랑했다'는 것에 대해 얘기한다. 그러니까, 결국은, 사랑 이야기. 나는 그 사랑이 그저 사랑일 수밖에 없음을, 후광 때문에 깨닫는다. 후광. 상대에게서 반짝거리는 그 후광.



지금 돌이켜 보면 그 시절 그녀의 모습이 더 잘 보인다. 선배는 사실 그렇게 예쁘지도 않고, 내 생각과 달리 그리 인기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 우연히 연극 동아리에 가입해 연기를 하고 주인공 역할을 맡게 된 건 그녀의 인생에서 손꼽을 만큼 중대한 사건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의 인생에 처음 일어난 중대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경험은 그녀로 하여금 자기 안의 에너지를 깨닫게 만들었고, 그녀에게 후광을 덧씌웠다. 그 후광이 내게도 작용했다. 내가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그녀는 후광에 감싸여 있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게 그녀에겐 놀라운 일이었을 테고, 재미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 깨닫게 된 사실들을 동원해 지금 그녀를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고 해서 더없이 매력적이던 그 시절 민선 선배의 인상까지 훼손되는 건 아니다. 그녀는 정말 매력적이었다. 당시 난 그녀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나처럼 그녀를 사랑한다고 의심하기까지 했다.

그녀의 광채에 빨려 들어갈수록 나 자신은 점점 희미해지는 느낌이었는데, 또 그럴수록 나를 뺀 사람들은 생기발랄해 보였다. 그녀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은 그녀가 사랑하기에, 그녀의 사랑을 받기에 충분해 보였다.

어느 날은 수돗가를 지나다 우연히 선배를 보았다. 누군가와 둘이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연극 동아리 1학년 학생으로 나도 얼굴을 아는 아이였다. 두 사람은 웃는 얼굴로 환한 햇살의 웅덩이 안에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전기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급작스러운 통증을 느꼈다. (p.80-81)




여기서부터가 나의 아픈 지점이었다.


2010년 6월 24일에 만났던 남자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사랑했던 상대에게 했던 칭찬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최상의 칭찬이 뭐냐고. 그 당시 나는 '당신의 추리닝 입은 모습도 멋지다'는 거였고, 내게 그 질문을 던졌던 남자는 '네가 너무 빛나서 네 주변까지 빛나'라고 대답했던 거다. 그 칭찬은 당시에도 멋졌다고 생각했는데, 《항구의 사랑》을 읽는 순간 갑자기 그 날의 만남이 내게 훅 다가왔다. 그때 만났던 그와는 나중에 연인이 되었고 다정하게 지내다 지금은 헤어졌는데, '그가 연애했던 상대 중에 가장 사랑한 사람은 내가 아니겠구나, 그때 그 빛난다는 칭찬을 받던 사람이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버린 거다.



《항구의 사랑》에서 주인공은 사랑에 빠진 선배로부터 후광을 본다. 그 후광이 빛나서 그걸 다른 사람들도 볼까 봐 전전긍긍한다. 어떻게 이런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 이 선배를 본 누구라면 다 이 선배를 사랑하지 않을까.

그러나 화자의 친구는 그 선배를 도대체 왜 좋아하느냐고 묻는다. 추녀라고 화까지 낸다.

나는 사랑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지점이 그 후광이라고 생각한다. 남들은 보지 못하는 빛을 나는 보는 것.

그 후광 때문에 반짝반짝 빛이 나서 다른 사람들도 보지 않을까 걱정되는 것. 저렇게 반짝이고 환한 사람을, 주변까지 환하게 만드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하면서 고민하게 되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의 시작이고 절정이 아닐까. 2010년 6월 24일에 만난 남자는 다른 상대로부터 그 후광을 느꼈다고 얘기하는 거다. 나는 그 후광을 당신으로부터 느꼈는데. 그래서 당신을 사랑하는 게 내내 애를 태우는 일이었는데. 이렇게 멋진 남자를 다른 사람들도 보면 다 사랑할 텐데, 이 사람의 시선을 어떻게 나한테만 고정시킬까, 나는 그걸 고민했는데. 나는 당신의 후광을 봤는데, 당신 자체로 빛이 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당신이 하지 못한 일들과 스스로 못난 점들에 대해 아무리 얘기할 때에도, 나는 당신이 앞으로 더 나은 삶을 살 걸 확신하는 그런 사람이었는데. 나는 당신으로부터 그 후광을 본, 당신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는데, 그런데 그 날, 당신이 다른 사람의 후광을 봤던 일에 대해 얘기했던 게 생각나면서, 아아, 그 사람이 가장 사랑한 건 내가 아니었겠구나, 하게 되어버린 거다.



맙소사, 2010년의 일을 떠올리며 슬퍼하다니. 벌써 십 년 전의 일인데!

나란 여자가 이렇구먼...




마찬가지로 사랑의 소멸은 그 후광의 소멸과 같이 온다고 생각한다. 《항구의 사랑》속 화자가 오랜 시간이 흘러 그 날의 후광이 모두가 볼 수 있었던 빛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지만, 그러나 자신이 봤던 빛까지 부인하지는 않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 사실 내가 상대의 후광을 봤던 일은 좀처럼 없다. 후광을 보지 못했던 상대와 연애를 했을 때는 그다지 '다른 누군가가 저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까'에 대한 고민도 한 적이 없고. 그건 아마도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져도 괜찮다고 은연중에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그러나 내가 후광을 본 상대에 대해서는, 책 속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그의 후광을 다른 사람들도 본 건 아니다, 모두에게 보이는 후광은 아니었다, 는 것을 알고 있으나, 아직까지도 내가 본 후광이 사라졌다거나 잘못 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여전히 그는 그 후광과 함께 다닐 것이고, 그 후광이 그의 미래까지 비출 거라고 믿는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그녀를 사랑하게 될 것 같았다. (p.157)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해도 그의 후광은 환할 것이고 마지막으로 돌려도 내게는 반짝반짝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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