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한 장소, 적당한 시간

《비 온 뒤》

by 다락방
《비 온 뒤》, 윌리엄 트레버 지음, 한겨레출판, 2016


그녀가 펜시오네 체사리나에 혼자 있는 것은 연애가 끝났기 때문이다. - 「비 온 뒤」 p.120


연애가 끝나지 않았다면 해리엇은 그녀의 애인과 함께 그리스의 한 섬에 가 있었을 거다. 그곳에서 애인과 함께 2주간 휴가를 보낼 계획이었으니까. 그러나 연애는 끝났고, 그녀는 혼자 이탈리아에 와있다. 어릴 때부터 가족들과 해마다 왔던 곳이기에 익숙했고, 그 익숙한 곳에 혼자 와 머물고 있는 것. 그녀는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와인을 마신다. 남은 와인은 침실로 가져가 마시기도 한다.



그녀는 내내 헤어진 애인을 생각한다. 연애에 있어서의 자기 자신을 반성하기도 하지만 애인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헤어지자는 말을 들었던 그 당시에 대해서도 어쩔 수 없이 떠올리고야 만다. 그걸 어떻게 안 떠올릴 수 있겠는가.



그가 둘의 연애가 제대로 흘러가는 것 같지 않다고 말한 건 '렘브란트 시네마' 휴게실에서였다. 그녀가 "하지만 우리 행복하지 않았어?" 하고 외친 게 그때였다. 그들은 말다툼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나중에, 왜 영화관 휴게실에서 그 이야기를 했느냐고 물었을 때조차. 모르겠다, 그가 말했다. 그냥 그 순간이 적당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공유하는 어떤 단편적인 분위기 때문에. 만일 휴가 여행이 그렇게 이르지 않았다면 그들은 관계를 한동안 더 끌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지 않는 게 훨씬 낫다, 그는 말했다. (p.134)




해리엇은 자신들이 행복한 연애 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애인은 그렇게 느끼지 않았다. 당신과 내가 만드는 관계에서 당신과 내가 진행하고 있는 관계에서 왜 나는 행복을 느끼는데 당신은 제대로 되고 있지 않다고 느낄까. 이게 어디 해리엇의 이야기이기만 할까. 해리엇은 행복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갑자기 이별의 말을 듣고 의아하다. 우리 행복하지 않았어? 그 행복은 해리엇의 것이었으되 애인의 것은 아니었는가 보다. 렘브란트 시네마 휴게실. 극장의 휴게실. 그는 왜 하필 거기에서 내게 이별을 말한 걸까. 해리엇으로서는 당연히 궁금하고 물어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거기에서 말했어? 그런데 왜 하필 그때 말했어? 이건 아마도 이별통보를 받은 사람 쪽에서는 그 이별을 받아들이기까지 수십 번 수백 번 물어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뭐가 달라질까. 렘브란트 시네마 휴게실이 아니었다면, 뭐가 달라졌을까. 렘브란트 시네마 휴게실에서 마침 그때 얘기한 게 아니었다면, 그들의 관계는 유지될 수 있었을까. 하필이면 그 장소, 그때가 아니라 해도 언젠가는 '하필이면 그 장소, 그때'가 오는 거잖아. 렘브란트 시네마 휴게실이 아니라 올림픽공원 이면 달라졌을까? 그 시간이 아니라 다음날 아침이면 달라졌을까?

이별하기에 적당한 장소와 적당한 시간이라는 게 있기는 한가?



나는 한 번도 이별을 말했던 연인에게 '왜 하필이면 거기서 그때'냐고 물어보지 못했다. 나는 그랬어야 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해리엇처럼 나는 우리가 행복하다고 믿었다. 우리는 완전하고 완벽하다고, 단단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렇게 믿고 깔깔 웃고 있는데 그는 이제 이 관계를 그만둬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우리는 몇 개월 후에 외국에서 만나기로 했고, 비행기표도 끊어두었고, 비자 발급까지 마친 상황이었다. 오전만 해도 깔깔대고 웃으며 좋았는데, 오후에도 그는 내내 다정했는데, 그런데 밤에 그는 이제 그만두자고 말했다. 하필이면 내가 거기에 있을 때, 하필이면 그 시간에. 나는 그래서 그 말을 잘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게 와 정확히 그 뜻이 이해되기까지는 좀 시간이 걸렸다. 그 말인즉슨 그러니까, 내가 예약한 비행기표를 취소해야 함을 의미하는 거냐고 그에게 물었다. 그는 그렇다고 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몇몇 친구들이 하필이면 그때 그 타이밍에 이별을 말한 나의 애인에 대해 의아해했다. 아니, 왜 거기 있을 때 그랬대? 왜 어떤 기미도 없이 그때 그랬대? 나는 그가 아니기에 알 수 없었다. 심지어 나는 이별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는걸. 그러나 짐작해 친구들에게 그를 대신해 대답했다. 아마 내내 그러고 싶었겠지, 그리고 참고 참고 미루고 미루다가 그때는 더 이상 미룰 수 없었겠지.

아마 그런 거겠지.

그러니, 거기에서가 아니었던들, 다른 장소였다 해도, 뭐가 달라졌을까. 그날 밤이 아니라 다음날 밤이라고 하면 또 뭐가 달라졌을까. 어차피 그렇게 되었겠지. 그도 아마 몇 월 며칠 몇 시에 어디에서,라고 계획했던 바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더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마침내 입 밖으로 내야겠다고, 그때, 그렇게 생각했겠지. 그래서 궁금했다. 그렇다면 뭣 때문에 더는 안 되겠다, 이쯤에서 그만두자, 그로 하여금 입 밖으로 내게 했을까. 무엇이 그렇게 했을까. 돌이켜보고 돌이켜봐도 좋았던 기억 밖에는 없었는데, 오늘 우리 대화를 아무리 곱씹어 봐도 우리 좋기만 했는데, 우리 많이 웃었는데, 뭔 얘기만 하면 이렇게 잘 웃는 걸까, 그런 생각도 했는데, 그건 다 뭐였을까.



나는 우리가 단단하고 안정적이라 믿었고 우리 둘이 모두 행복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로부터 이별의 말을 들었던 것이 당황스러웠고. 그러나 놀랍게도 나 역시 이 관계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몇 개월 전부터 짐작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됐다. 나중에. 내 일기장을 들춰보다가. 웃으면서 즐거워했으면서 일기장에는 불안과 불만이 가득했다. 좋지 않은 예감들이 내 일기장에는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단단하다고, 안정적이라 믿었던 것은 그저 보이는 내가 그러는 것이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던 마음이 크게 작용했는가 보았다. 이별할 당시에도 나조차 알지 못했던 것을, 그러나 일기장에서는 몇 개월 전부터 이런 일이 있을 거라는 걸 짐작하고 써 내려가고 있었다.


그러니 그 장소가 아니었어도, 그때가 아니었어도, 그 일은 일어날 일이었다. 이별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다른 장소 다른 시간으로 아무리 바꿔봤자 달라질 건 없었다. 일기장 속의 나는 불안했다. 단단하지 못했다. 나는 알고 있었다.




해리엇은 자신에게 이별을 말하는 애인에게 우리 행복하지 않았냐 물었지만, 그리고 그렇게 물을 당시 해리엇은 자신은 내내 행복했다고 생각했겠지만, 그러나 해리엇 안의 또 다른 해리엇, 좀 더 솔직하지만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그 해리엇은 알고 있었을 거다. 그 관계가 오래가지 못할 거라는 걸, 이런 순간이 올 거라는 걸. 해리엇과 나의 차이가 있다면, 내 안의 또 다른 나는 그걸 들여다보고 일기를 썼다는 것. 해리엇이여, 일기를 쓰자... 일기를 쓰면 이렇게 자기 안의 또 다른 나를 마주칠 수 있게 된다.


(여러분, 일기를 써요. 일기를 쓰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일기를 쓰자.)




'윌리엄 트레버'의 단편집 《비 온 뒤》에서 표제작 「비 온 뒤」의 해리엇이 놓여있는 상황이 몇 해 전 나의 이별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게 봄에 나는 이별을 맞닥뜨렸고, 나는 행복했는데 그는 아니었던 건가, 수개월 아팠고, 그리고 나 역시 해리엇처럼 그와 함께 계획했던 비행기 티켓을 취소하고, 대신 혼자 여행을 했다. 해리엇은 혼자 여행하면서 헤어진 그에게 엽서를 쓸까, 생각하지만 쓰지 않는다. 나는 혼자 여행하면서 헤어진 그에게 엽서를 보낼까, 하다가 엽서를 보냈었다. 이게 바로 해리엇과 나의 다른 점이었다. 해리엇은 이탈리아로 갔지만 나는 베트남으로 갔다. 해리엇은 이탈리아어를 조금 할 줄 알았지만 나는 베트남어를 할 줄 몰랐다. 해리엇은 애인과 함께 그리스로 가려고 했었지만, 내가 그와 함께 머물기로 했던 곳은 다른 섬나라였다.




당연한 듯 해리엇은 그가 다른 사람과 함께 그리스에 갔을지 궁금해한다. 왜 아니겠는가. 아직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리고 설사 헤어진 후 시간이 오래 지났다 해도 그런 것들은 궁금해지지 않나.



해리엇은 그가 결국 거기에 갔을지, 런던에 남지 않고 오늘 거기에 있을지, 심지어 함께 갈 사람은 찾았는지 궁금하다. 그가 스키로스에 있는 모습, 이야기하던 대로 아트 시트사 만에서 윈드서핑을 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트시트사 만에서 복잡하지 않고 행복한 동반자, 그저 뭔지 알아보려고 치유를 받아보는 동반자와 함께 있는 모습이 선하다. (p.138)





내가 그때 비행기표를 취소하고, 그 시간에 거기 있기로 했던 계획들이 다 취소되었을 때, 그래서 내가 결국은 혼자 베트남에 가 있었을 때, 그때 그는 함께 머무를 다른 사람을 찾았었을까. 그래서 그 다른 사람과 거기에서 나 대신 함께 있었을까. 그때 다른 사람과 함께 하면서 그는 행복했을까, 행복한 동반자를 찾았다고 생각했을까. 행복한 동반자와 함께했을까. 그래서 좋았을까.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모두 '그렇다' 아니, 모두 '그랬다'. 우리는 그 후에 다시 만났고, 그는 나와 헤어진 뒤 다른 사람을 만나 함께 지냈다. 내가 갈 수 없는 곳에서, 그러니까 가지 못했던 곳에서 그는 다른 동반자와 함께 했더랬다. 그걸 나는 나중에 그를 통해 들어 알게 되었다. 해리엇의 애인은 아마도 다른 동반자를 찾아 그토록 좋아하는 해를 온몸으로 받아가며 윈드서핑 중일 것이다. 그런 일들은, 일어나기를 바라지 않아도 일어나곤 한다. 해리엇은 그에게 정말이지 작별을 고해야 할런지도 모른다. 작별을 고하기 위해 혼자 거기에 갔을 것이고. 그러나 혼자 거기에 갔어도 뭐 그게 그리 마음먹은 대로 잘 되나. 아마 거기까지가 끝이었을 거다, 해리엇과 그와의 관계는. 그 시점에서는 해리엇이 돌아서는 게 맞았을 것이다.



그녀가 사랑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자, 이미 과거가 되어 버린 상황을 바꾸려고 더 밝은 현재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래의 불변성을 강요하자, 그는 다른 남자들처럼 물러섰다. (p.141)



이별 후에 나 역시도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사랑에 많은 것을 기대했나? 아니면 내가 사랑에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나? 내가 너무 관심이 많았나? 아니면 내가 너무 무심했나? 내가 너무 빈틈이 많았나? 아니면 내가 너무 빈틈이 없었나? 내가 너무 잘했나? 아니면 내가 너무 못했나?


그러나 내가 어느 쪽이었던들 그 시간은 왔을 거다. 그 장소가 아니었어도, 그 시간이 아니었어도 왔을 거다. 뭐가 어떻게 되었어도 달라질 건 없었을 거다. 그랬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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