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자인간 Nov 11. 2024

식구는 아니지만 가족인 막내아들

반려견 '쪼리'

나의 식구는 나와 아내와 아들, 이렇게 세 명이다. 그런데, 그렇게 얘기하면 서운해할 만한 가족이 하나 더 있다. 그는 식구는 아니지만 가족이다. 왜냐하면 그와 우리 식구 셋은 한솥밥을 공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식구'에 대한 네이버 국어사전의 정의는 "한 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가족'의 정의는 다르다. "주로 부부를 중심으로 한,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집단. 또는 그 구성원. 혼인, 혈연, 입양 등으로 이루어진다." 그는 우리 집에 입양 왔기 때문에 '가족'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다. 다만, 사람이 아니어서 '사람들의 집단'으로서의 가족의 일원은 아니기도 하다. 전국의 천만 반려인들이여 단결하라. 네이버 국어사전 상 '가족'의 정의에 항의하라.


그와는 밥을 같이 먹지 않는다 뿐이지, 나와는 집에서의 거의 모든 활동과 주말 나들이의 상당 부분을 공유한다. 그는 내가 음악을 듣고 있으면 내 무릎 위에 올라오곤 하는데, 이제는 제법 음악을 들을 줄 안다. 교향곡이 끝나면 웅크려 있다가도 벌떡 일어나니, 최소한 음악의 종지에 대한 감각은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한 시간 30분 동안 그를 괴롭히던 시끄러운 소리가 비로소 끝나는구나 하는 해방감에서 기인한 것인지, 말러의 '부활'교향곡 피날레의 감동에 기립박수라도 치고 싶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아마도 전자일 확률이 높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음악의 마지막까지 버틴 이유가 음악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자리에서 뜨는 비매너가 싫었기 때문인지, 집사의 품에 있을 때의 행복감이 소음의 괴로움을 이겼기 때문인지는 역시 알 수 없다.


그는 심지어 나와 동침도 한다. 식구 중에는 일찍 잠드는 편인 내가 침대에 누울라치면 '취, 취' 재채기 소리를 내며 침대로 이어지는 계단을 잽싸게 올라와서 내 발바닥을 열심히 핥는다. 참고로, 그가 재채기하듯이 '취, 취' 소리를 내는 때는, 주로 밥을 먹기 전, 산책 가기 전, 간식 먹기 전 등, 뭔가 매우 기쁜 일이 있을 때다. '아싸' 또는 '오예' 등으로 번역할 수 있겠다. 진의를 확인할 길은 없지만. 아무튼 부드러운 혀로 발 마사지를 받으면서 나는 잠이 들곤 하고, 그 역시 발 핥기를 어느 정도 만족스럽게 했다 싶으면 내 옆자리에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잠을 청한다. 어떨 때는 핥던 발을 베개 삼아 얼굴을 괴고는 잠들어 버리기도 한다.


그의 숨은 개인기 중 하나는 집사의 의상 종류를 파악하는 것이다. 헐렁한 츄리닝 차림으로 있던 집사가 드레스룸 문을 열기라도 하면, 궁금함을 가득 담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집사를 빤히 바라본다. 기대를 실은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리면서. 집사가 청바지나 면바지를 주섬주섬 입고 반팔 티셔츠를 팔에 끼울 때쯤 되면, 그는 중력을 잊고 앞다리를 띄워서 4킬로 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파워로 내 몸을 찍어 누르기 시작한다. 이윽고 집사의 입에서 '가자!' 소리가 나오면, 그의 다리는 톰과 제리가 쫓고 쫓길 때의 바퀴모양으로 변하고 과부하가 걸려 마루를 헛돌면서 드리프팅 묘기를 보여주기까지 한다. 만약 집사가 입고 있는 옷이 민망한 스판덱스 자전거용 쫄쫄이거나 달리기 할 때 입는 유채색 계열의 반팔 반바지 운동복이라면, 기대로 띄워졌던 꼬리가 물먹은 억새처럼 내려가고 초롱초롱했던 눈망울도 용돈을 뺏긴 아이의 그것처럼 침울하게 변한다. 언젠가는 그의 눈앞에서 자전거용 빕(멜빵바지)을 입고는 외출용 반팔을 걸쳐볼 생각이다.


그는 사실 전주인으로부터 버림받은 개다. 그의 정체는 전주인이 자동차 영업사원으로부터 '서비스'로 받은 민간 분양 말티즈다. 어째 덩치도 크고 짖는 소리도 우렁차고 힘도 센 것이, 다양한 견종의 피가 흐를 것 같고 뭔가 특출한 출생의 비밀을 품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는 굳이 알 필요가 없다는 표정이다. 아무튼 노총각 전주인으로부터 외아들처럼 사랑받으며 유년기를 보냈겠지만, 그가 사춘기를 맞이할 무렵 노총각 전주인에게도 늦은 애인이 생겼고, 결국 전주인은 개를 싫어하는 애인과 아들 같던 강아지 사이에서 애인을 택했다. 그는 찬바람이 불던 11월의 어느 날 밤, 태어난 지 일 년 삼 개월 만에 전주인의 애인의 직장동료였던 집사의 아내에게 보내졌다. 지금은 집에 낯선 사람이 오면 '나는 사실 늑대요'라는 듯 사나운 맹수의 태도로 짖고는 하지만, 그때 우리 집에 처음 온 그는 처음 보는 낯선 사람들에게 매달리며 온갖 아양을 떨었다. 그와 조금이라도 친해지고자 집사가 옆에서 잤는데, 몸을 돌돌 말고 일 미터는 떨어져서 잠을 청했던 그의 처량한 모습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집사의 발바닥 손바닥을 빨고 핥는 지금의 그와는 전혀 다른 모습인데, 아무리 아양을 떨어도 본심은 서먹했던 것이다.


나는 그가 우리와, 특히 나와는 신비로운 인연이 있다고 믿는데, 그런 믿음을 갖게 된 특별한 사건이 있다. 아내가 우리 집에 올 강아지라며 사진을 보여줬을 때 나는 이 강아지의 이름을 '쫄쫄이'라고 부르기로 했었다. 왠지 사람을 쫄래쫄래 쫓아다닐 것 같은 모습이었기 때문에. 그런데 놀랍게도 나중에 알게 된 그의 이름은 '쬬리'가 아닌가. 전주인이 '쬬리퐁' 과자를 좋아하기 때문이라나. 사실 나도 '쬬리퐁' 좋아하는데. 아무튼 이름에 얽힌 이 기막힌 우연은 인연이라는 말로 설명해야 비로소 납득가능하다고 스스로 믿고 있다. 이제 그는 새 삶을 살기 위해 '쪼리'라는 개명된 이름으로, 때로는 쫄쫄이로, 때로는 쫄탱이로 불리고 있다.


이제 그가 우리 가족이 된 후 9년이 흘렀고, 그의 나이는 이미 열 살이 넘었다. 그간 슬개골 수술도 하고, 담석 제거 수술도 할 뻔하고, 디스크 증세가 있다고 침도 맞고, 혈소판감소증 치료를 위해 스테로이드 약을 먹다가 털이 빠지기도 하는 등, 적지 않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리고 사람 나이로는 환갑에 가까운 어르신이 되어 가지만, 그는 여전히 우리의 작고 사랑스러운 막내아들이다. 이제 그가 없는 우리 집은 상상하기 어렵고, 그가 무지개다리 넘는 언젠가가 온다는 것이 두렵기는 하지만, 그와의 모든 매일매일을, 나는 그를 쓰다듬고 안아주고 산책시키고, 그는 내 발바닥 손바닥 턱을 게걸스레 핥으며, 서로 아끼며 충만하게 보낼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트럼프 2.0 시대가 열리다. (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