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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중독자를 위한 기계

브레빌 BES 860 에스프레소 머신

by 전자인간

커피는 새벽녘 원시적 무지몽매함에 빠져 있던 나를 스마트한 현대인인 것처럼 변용시킨다. 이른 아침 출근한 사무실에서 메일함을 열 때, 테이블 주위에서 동료들과 업무에 대한 논의를 할 때, 심지어 뉴스 사이트를 기웃거리면서 월급 루팡짓을 할 때에도 커피 한 잔은 둔탁했던 두뇌를 예열해 주고 사고 회로에 윤활유를 뿌려준다. 본질적으로 게으르고 멍 때리기 좋아하는 나를 유능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커피에 나는 내가 벌어들이는 수입의 상당 부분을 빚지고 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그러했듯이, 예전에는 나도 이른바 '믹스커피'를 마셨다. 요사이 믹스커피는 희화화 또는 경멸의 대상이 되곤 하는데, 믹스커피는 깔볼만한 대상이 절대 아니다. 믹스커피는 한국의 일꾼들이 모자라는 잠을 극복하고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건설해 나가는 데 있어서 혁혁한 공을 세운 일등 공신이었기 때문이다. 믹스커피는 '프림'과 설탕, 인스턴트커피를 황금비율로 섞었으므로, 아메리카노와 쿠키를 번거롭게 함께 먹지 않아도 손쉽게 허기도 극복하고 정신도 차릴 수 있도록 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발명품 중 하나다. 이토록 일터에서 엄청난 유용성을 가진 믹스커피를 만들 때는 '탄다'라고 표현해야 한다. 물에 타는 것이야말로 가장 경제적이고 최적화된 커피를 만드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사무실에서 아침마다 핸드드립 커피를 '내린다'. 핸드밀로 정성스레 간 원두를 필터를 얹은 드리퍼에 넣고 핸드드립 용 주전자로 인내를 갖고 물을 부어서 찬찬히 커피를 내린다. 사람들은 나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구도자적 풍모와 부지런함을 칭송하곤 한다. 사실인즉슨 이는 원두에 존재하는 카페인을 최대한 우려내서 커피 한 잔의 카페인 농도를 최대화하려는 눈물겨운 노력의 일환이다. 회식 자리에 폭탄주가 있다면 사무실에는 폭탄커피가 있는데, 그게 바로 핸드드립 커피다. 핸드드립 커피를 마시면 스팀팩을 먹은 마린처럼 스스로를 오버클러킹 된 일꾼으로 만들 수 있다. 갖가지 열매의 향은 덤이다.


주말에는 에스프레소 머신을 이용해서 카페라테나 아메리카노를 만들어 마신다.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커피를 만들 때는 현대적인 도구를 이용해서 과학 실험을 하고 있다는 착각이 든다. 따라서 이 때는 '추출한다'라고 표현해야 더 그럴싸하게 느껴진다.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추출하는 커피는 우리 집을 카페로 공간이동시킨다. 10년 넘는 주말 또는 휴일의 우리 집을 홈카페로 공간이동시킨 마법의 기계는 브레빌 BES 860이다.


요즘에는 괜찮은 피자 오븐의 메이커로도 잘 알려진 브레빌은 프로 에스프레소 머신만큼 비싸지는 않은 가격에 제대로 된 에스프레소를 만들 수 있는 가정용 커피 머신으로 예전부터 명성이 자자했다. 내가 쓰고 있는 브레빌 BES 860은 백화점 브레빌 매장에 근무하는 직원조차 '그런 모델이 있었어요?'라고 물어볼 만큼 초고대적 유물과도 같이 오래된 물건이다.


BES 860은 그 흔한 LCD 디스플레이조차 없이 커피 추출 압력을 아날로그 바늘로 표현해 주는데, 자동 그라인더로 커피 원두를 갈고 적당한 압력으로 탬핑한 후 그룹 헤드에 포터 필터를 끼우고 그저 버튼만 눌렀을 뿐인데도, 묵직한 소리와 함께 쭉쭉 올라가는 압력을 가리키는 바늘을 보고 있노라면, 나는 수십 년 경력의 커피 장인이라도 된 듯한 느낌을 받으면서 전문 바리스타인 양 심각한 표정을 짓게 된다. 그와 동시에 온 거실로 확산해 나가는 쌉싸르한 향을 품을 입자들 중 일부가 코로 들어오기 시작하고, 몸은 이미 각성상태에 들어갈 채비를 한다.


카페라테를 만들기 위한 선택 사양인 우유 거품은 주로 휴일 아침에 낸다. 알레그로 빠르기의 일정한 리듬으로 턱턱 소리를 내며 노즐이 화난 듯 증기를 내뿜으면, 내게 남아있던 잠기운은 혼비백산 모조리 사라진다. 스팀피쳐 안에는 우유가 회오리를 만들면서 아래에서부터 솟아나는 보드라운 눈발이 차곡차곡 쌓이는데, 이윽고 스팀봉 부근의 눈 쌓인 우유가 지글거리기 시작하면 기계를 끈다. 눈 덮인 우유를 흙탕물 같은 에스프레소 원액에 가차 없이 부으면, 토성의 표면처럼 밀키한 갈색이 예쁘게 대류하는 모습의 카페라테가 완성된다.


이제 다 준비된 커피를 마시면 된다. 브레빌 에스프레소 커피 머신으로 내가 직접 만든 아메리카노나 카페라테의 맛은 분명 웬만한 커피 전문점의 맛에 뒤떨어지지 않지만, 잠이 덜 깬 휴일 아침 또는 휴일 오후에 멍한 노곤함이 엄습할 때 마시게 되는 커피의 본질은, 커피 자체의 맛이라기 보다는 만들 때의 향기와 마신 후의 또렷한 정신상태라 할 수 있다.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으면서, 또는 글을 쓰면서 마시는 커피가 그것이 없었으면 쉬고 있을 미각에 즐거움을 더하지만, 결국 그 커피로 인해 공간의 농도는 첼로의 저음처럼 좀 더 아늑하게 짙어지고, 두뇌가 잠시나마 또렷한 도핑상태에 돌입하게 되는 것이다. 그 커피는 담뱃재 맛이 나거나 쓰고 텁텁하기만 한 질 낮은 커피가 아니여야 함은 물론이다. 이런 점에서 잘 볶아진 원두만 있다면 나의 브레빌 커피 머신은 신뢰할만하다. 집 안에서의 삶에다가 커피를 통한 격조와 낭만을 불어넣는 데 있어서 그 기계는 실패하는 법이 없다.


* 커버 이미지 출처 : 다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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