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래디에이터 II
리들리 스콧 Ridley Scott은 그의 초기작 <에이리언 (1979)>과 <블레이드 러너 (1982)> 까지만 찍고 감독 생활을 그만두었더라면 더 위대한 감독으로 남았을 것이다. <델마와 루이스 (1991)>, <블랙 호크 다운 (2001)>, <마션 (2015)> 등, 평범한 감독의 영화였다면 일생의 대표작으로 꼽힐만한 좋은 영화들도 많이 만들었지만, 내가 귀 청소를 시도할 때마다 송곳니를 드러내면서 혀를 낼름거리는 우리 집 강아지 쪼리의 모습에서 <에이리언>의 소름 끼치는 외계 생물체를 떠올리고, 네온사인 휘황한 비 오는 서울 강남역 뒷골목을 걸을 때면 <블레이드 러너>의 축축하고 암울한 미래세계(현재의 시점에서는 과거 세계지만)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되는 것을 보면, 다른 범작을 압살해 버리는 그 두 영화의 위압적인 존재감이 내 의식의 흐름에서도 중요한 길목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 두 영화에 하나를 더 얹는다면, <글래디에이터 (2000)>이어야 할 것이다. 펑퍼짐한 나막신 마냥 반 정도는 높은 층이 없는 것으로 여겨졌던 콜로세움이 원래는 번쩍거리는 거대한 원통이었음을 일깨워 준 영화. <조커>에서 호아킨 피닉스의 광기 어린 연기의 수원지처럼 인식되는 영화. 한때 마초적 남성성의 전형으로 여겨지던 막시무스, 아니 러셀 크로우 Russell Crowe를 만들어 낸 바로 그 영화.
24년 만에 공개된 <글래디에이터>의 속편인 <글래디에이터 II>는 전설이 어떻게 일상이 되는지 보여준다. 사실 <글래디에이터> 그 자체도 영화의 '진정성'의 관점으로는 그리 후한 점수를 주기는 어렵지만, 강렬한 '오리지널리티'가 철철 넘치고, 특히 막시무스가 검투사로서 사투를 벌이는 장면은 관객들을 2000년간의 인간성 계몽의 순방향 흐름을 거슬러 올라, 흡혈귀 얼굴을 하고는 피범벅이 되고 있는 검투장에 환호하던 로마시대의 군중으로 빙의시키는 마력이 있었다. <글래디에이터 II>는 분명 <글래디에이터>에 비해 한층 확장되고 다채로우며 다양한 검투사의 사투를 보여주는데, 액션의 쾌감은 있을지언정 매일 검투경기를 보던 로마인들 마냥 관객들을 일상적인 오락의 무덤덤함에 빠뜨린다.
전설이 무덤덤하게 된 것은 캐릭터의 안이함도 한몫했다. '루시우스'라는 1편에서의 불씨가 2편에서 분명히 어떻게든 활용될 것으로 예상했기에, '하누'라는, 처음에는 엉뚱해 보였던 북아프리카의 캐릭터가 극이 진행해 감에 따라 어떤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인지는 마치 수정구슬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명확했다. 덴젤 워싱턴 Denzel Washington이 연기한 '마크리누스'만이 인물의 살점과 부피감을 느낄 수 있었고, 그 외의 대부분의 캐릭터는 극히 전형적이고 평면적이어서 마치 팝업북에서 튀어나온 사람 그림인 것 같았다.
게다가 아무리 공화정이 싹튼 로마였다 하더라도 2000년씩이나 전이 배경인 이야기인데, 현대의, 미국의, 할리우드의, 영웅을 중심으로 한, 그래서 더욱 모순적인 민주주의적 메시지를 과도하게 덧입혀 놓은 나이브함은, 외계인을 때려잡기 위해 미국 대통령이 전투기를 몰도록 했던 롤랜드 에머리히의 향기마저 느끼게 한다. 영화적인 과장법을 극대화하기 위해 스토리를 매끈하게, 한층 과장된 캐릭터를 느끼하리만치 쿨하게 만드려고 애썼다는 점에서는 마이클 베이의 그림자도 느껴지고.
정리하자면, 걸작과 범작, 졸작을 번갈아가며 양산해 냈던 리들리 스콧 감독이 만든, 범작과 졸작의 경계선 정도에 위치한 오락영화다. 역시 리들리 스콧은 <블레이드 러너>에서 멈춰야만 했을까?
* 커버 이미지 출처 : 다음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