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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훈 Apr 07. 2022

영화 박하사탕 선택적 리뷰, 해석

*이 리뷰는 개인적 소감에 불과하며 언제든지 수정되거나 파기될 수 있습니다.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들은 괴물 같다. 나는 괴수와 괴물을 구분하여 표현하는데 괴수는 형태와 생김새가 누가 보기에도 포악하고 흉악한 것들이고 괴물은 그 흉악함과 포악함이 조명의 각도에 따라 정도가 달라지고 때에 따라 온화해 보이기까지 한다. 나는 둘을 그렇게 나눈다. 나는 항상 이창동 감독의 영화를 볼 때 그런 생각을 한다. 그의 영화 시, 버닝, 박하사탕은 내가 생각하는 괴물에 가까운 영화 같다. 구토감이 섞이는 불편함과 동시에 느껴지는 한 인간의 따스한 온정. 이창동 감독은 영화 박하사탕을 통해 무엇을 하려 했을까? 그는 괴물 같은 한 인간, 영호라는 인물의 삶을 거꾸로 훑어가며 재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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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유명한 대사,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그의 말을 끝으로 열차는 역주행을 하며 철로를 달린다. 철로는 근대화의 상징이다.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철로를 까는 것이었다. 근대 산업시설에 가장 기초가 되는 철로는 광물과 연료, 산업시설, 군수물자, 탱크, 군인들을 육로로 수송하기에 가장 유용한 시설이다. 철로는 지금도 가끔 정치인들에 의해 재조명되며 북한, 러시아, 부산 등을 잇는 꿈과 희망의 운송수단으로 여겨진다. 나는 대한민국이 정치적인 의미에서 '근대'의 문을 닫고 '현대'의 문을 열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다. 너무 빠른 산업화와 격동의 근현대사는 여전히 살아 남아 정치적이고 일상적인 수많은 문제들을 달고 다닌다. 대한민국의 정치철학은 여전히 '보수'들의 사이에서 줄넘기를 하며 뛰어다니고 있다.



 영호가 난데없이 잘만 달리고 있는 열차를 가로막으며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외치는 것은 근현대의 역사 속 앞으로만 내달리는 시간의 흐름을 정면으로 막아서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열차는 한 개인이 막아서기엔 너무나 강하고 무거운 것이기에 영화에서 표현되진 않았지만 영호는 산산이 으스러졌을 것이다. 영호의 삶 역시 그랬다. 그는 한 개인으로써 막아설 수 없는 역사의 흐름 앞에 자신과 자신의 주변인들을 파괴했다.

 개인으로써 영호에게 자신의 삶 가운데 선택지가 없었느냐?라고 묻는다면 당연히 있었다. 영호는 매 순간 선택지 앞에 섰었다. 그가 쓸데없이 많은 열쇠 꾸러미를 들고 다니는 것이 바로 그가 수많은 선택지를 가지고 있었음을 얘기한다. 그는 그 많은 열쇠 꾸러미를 가짐에도 문을 열지 못하지만 남은 쉽게 열어준다. 그러니까 개인에게 삶 속의 선택지는 무수히 많다. 그걸 지켜보는 타자들은 혀를 차고 답을 찾아주지만 막상 그 상황에 놓인 주인공은 수 많은 열쇠꾸러미 속에서 헤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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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기는 껍데기고 필름은 알맹이다. 박하사탕은 껍데기고 추억은 알맹이다. 영호는 껍데기 같은 삶을 살았다. 사실 영호의 진심이 무어인지 그의 환경이 조금만 달랐어도 다른 선택들을 했을지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가 진심으로 사진사가 되길 원하고 꽃을 좋아했는지 순임의 작고 소소한 진심을 정말로 소중히 여겼는지 알 수는 없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가 누워 혼자 눈물을 흘리는 것과 낯익다는 영호의 말에 순임이 그건 꿈에서 본거라는 대답, 모두 영호의 상상인지 감독의 위로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가 껍데기 같은 삶을 살은 것은 분명하다. 그가 자신을 성찰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들 모두 외면한 채 그저 시곗바늘의 흐름과 남들의 부추김대로 살아간 것 모두 껍데기 같은 삶의 총체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 시작점은 광주에서 일까? 영호는 강제였던 아니던 피해자가 명확한 역사 속 사건의 가해자 측의 한 사람이었고 그 이후엔 쭉 가해자로 살았다. 이 영화는 왜 가해자의 시점에서 삶을 돌이켜 보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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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징병제는 국가가 개인에게 하는 가장 파괴적인 제도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제3세계에서 벌어지는 내전으로 인해 소년병들이 만들어져 가치관과 윤리관이 확립되기도 전에 살인과 폭력을 종용당하는 것과 20대 초반의 청년들을 강제 징병하는 것은 무엇이 다른 걸까? 그 둘이 같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우린 마치 소년병들처럼 군대에서 폭력과 감시, 처벌을 서로가 서로에게 하도록 종용당했다. 인격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행위들의 일체를 우리는 그 시스템 사이에서 행하도록 교육받았다. 하지만 이것은 '군대'라는 시스템으로 하루아침에 발생한 것은 아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우리는 근대식 교육을 받고 근대식 행동을 강요받았다. 우리는 이런 것들이 하루아침에 발생한 것이 아닌 역사 속 긴 시간 동안 겹겹이 쌓인 것을 안다. 우리에게 ‘영호’라는 인물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외계 생명체나 괴수같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근대화의 여진과 쓰나미들을 살갗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징병제도가 사라지지 않는 한 ‘영호’와 같은 인물은 늘어갈 것이고 그들을 통해 폭력은 계속해서 전이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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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은 아름답다. 영호는 전역 이후 순임은 물론 그 당시 야유회를 함께 했던 친구들 모두 찾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문화 대혁명 당시 어린 홍위병들이 문혁 후에 부모와 사회에 버림받은 것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영호는 스스로 지인들과 연을 끊고 살아갔을 것이다. 그의 부모들 역시 보이지 않는다. 영호는 삶은 아름답다.라고 말하며 동료와 친구들을 지키려는 학생을 자신과 마찬가지로 구렁텅이에 빠트린다. 영호는 ‘삶은 아름답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자신처럼 지옥으로 끌어내려 자신과 비슷한 삶을 살길 바라는 사람이다. 그가 순임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같은 맥락이다. 죽음의 고비 앞에서 순임은 아름다웠던 순간들을 기억한다. 영호로 인해 더럽혀졌을 수도 있을 기억을 그녀는 아름다움의 영역으로 끌어냈다. 하지만 영호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더러움, 역겨움만을 기억할 뿐이다. 이러한 맥락으로 마지막 씬에서 그가 흘리는 눈물은 영화적 상상일 뿐이어서 진실이 아니거나 꿈일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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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하사탕을 보고 텁텁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이 영화는 박하사탕이 가지는 기존의 목적인 입가심이 아닌 텁텁한 뒷맛을 남기며 마음속에 깊은 불쾌감, 불편함을 남긴다. 아무리 양치를 한들 이 문제적인 영화를 지울 수 있을까? 전염병처럼 번져만 가는 폭력의 세계에서 나약하고 힘없는 개인으로써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우리는 어떻게 하면 젊고 또 나이가 든다 하여도 자신의 존엄을 지키며 껍데기 같은 삶을 살지 않을 수 있을까? 아쉽게도 감독은 '답'을 내려주는 사람은 아닌 듯하다. 그러니 이토록 텁텁한 박하사탕이 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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