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리뷰는 개인적 소감에 불과하며 언제든지 수정되거나 파기될 수 있습니다.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의 큰 토대는 '사랑'과 '가족'에 두고 있다. 두 단어 모두 꽤나 보수적인 단어라 이런 파괴적인 영화엔 어울리지 않을 법 하지만 그래서 의외로 잘 어울리는 법이다. 그리고 대게 그런 영화가 재밌다. '사랑'과 '가족'은 인간 세계의 근간이 되는 가치관이다. 특히 서구세계에서 기독교 중심의 보수적 가족관과 사랑관은 오랜 세월 그들 전반의 삶과 문화를 지배하고 있다. 티탄은 지배적으로 군림하는 서구세계의 근간인 예수 그리스도를 훔쳐와 뒤틀었고 종반부엔 새로운 그리스도의 탄생을 목도하게 만든다. 전통 세계관의 붕괴, 파괴적인 창조는 늘 흥미롭다. 하지만 예술이 단지 전통 세계관을 과격하게 파괴하는 것만을 목표로 삼는다면 그저 그런 예술이 될 것이다. 단지 파괴를 위한 창조라면 그건 배설이나 자위에 가깝다. 내 생각에 티탄이 그런 영화는 아니다.
알렉시아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영화의 오프닝은 자동차 엔진으로 추정되는 기계장치를 보여주다가 곧 자동차의 엔진 가속음을 따라 하는 어린 알렉시아를 보여준다. 곧 사고가 나고 알렉시아의 머리에 티타늄을 심는다. 알렉시아의 정체성은 기계(자동차)이다. 평이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인간이 기계적인 동물이란 것은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일상에서 그런 걸 느끼기가 어렵기도 하거니와 인간성을 숭배하도록 교육받아온 '인간'에게 그런 상상은 사실 쉽지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우리가 충분히 잘 설계된 기계적인 유기체임을 잘 알고 있다. 특히 극단적인 신체의 절단이나 부상, 변형 등에서 우리의 육체가 얼마나 기계적인가를 잘 알 수 있다. 우리는 많은 외과 수술에서 여러 가지 신체가 인공물로 대체가 가능한 것이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났고 그 기술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발전했음을 상기해야만 한다. 그런데 임신과 출산이라는 것만큼은 여전히 성역에 있는 것만 같고 꼭 반드시 그곳에 있어야만 할 것 같다. 임신과 출산만큼은 인간성 숭배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미 임신과 출산은 신체의 극단적인 변형이자 절단이지 않은가? 임신과 출산은 여성성의 상징의 극단이다. 티탄은 알렉시아에게서 여성성을 뺏아가지도 남성성을 부여하지도 않았다. 알렉시아에게 부여된 것은 '기계성' 뿐이다.
이미 많은 예술에서 섹스와 성은 보수 가치관에 머리통을 내려찍듯 해체되며 표현되어 왔다. 티탄의 전반부의 거의 대부분의 모티브가 된 듯한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크래쉬(1996)를 그 대표로 들 수 있겠다. 티탄 역시 그 흐름을 그대로 계승하여 임신과 출산이라는 주제를 통해 기존 보수 가치관을 대놓고 망치로 내려 찍어버리고 있다. 티탄은 전반부에서 임신과 출산을 기계적인 유기체의 유전자 전달의 과정 중 하나로 전략시켜버린다.
감독은 왜 전반부에 그런 파괴적이고 강렬한 이미지를 사용했는가?라는 질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여성의 경우 남성이 절대로 가질 수 없는 임신과 출산이라는 극단의 여성성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남성에게 도달할 수 궁극적인 '성역'이 되며 이 영화에서 가장 큰 주제가 된다. 만약 그녀가 기존 남성성을 탐하거나 전복시키는 걸 의도적으로 비유한 캐릭터라면 그녀에게서 여성성의 극단적 상징 중 하나인 임신과 출산은 배제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감독은 그녀가 기계적 유기체로써 결정된 성인 여성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들었다. 전반부에선 임신이 그녀의 발목을 아득히 잡아끌지만 엔딩에서 그려지는 그녀의 출산은 그녀가 새로운 세계로의 창조를 이끄는 숭고한 인간으로 변하는 매개가 되어주며 여성성이 가진 남성이 도달할 수 없는 '성역'에 대한 완성으로 인도해준다. 아이러니하게도 알렉시아의 기계적 유기체로써의 임신과 출산이 기존 보수 가치관에 지배적인 남성 중심의 세계를 무너트리고 마는 것이다.
그녀가 기존의 남성성으로 상징되는 기계와 섹스를 하고 그 위에 군림하고 또한 남성성으로 상징되는 작대기를 들고 남성들을 살해하는 데서 끝났다면 영화는 사실 더 직관적이고 편했을 것이다. 하지만 감독은 알렉시아에게 단순히 남성성을 카피하게 만들어 기존 세계 전반을 지배하던 남성들에게 의미 없는 '복수'만 이뤄지지지 않도록 만들었다. 영화는 조금 더 상위 개념인 전통적 가족관과 성역할이 현대에 이르러 어디서 충돌하고 있는지 이어서 더 과장하자면 다가올 미래에 대면해야 할 가족관과 성역할에 무엇인지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이런 추론은 바로 뱅상의 등장에서 비롯된다.
초반부 알렉시아는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인물로 그려지다가 뱅상의 등장을 기점으로 2부로 넘어가면서 완전히 다른 인물로 탈바꿈하는데 이때 그녀의 감정선과 행동양식 조차도 완전히 뒤바뀐다. 이로 인해 관객은 더욱 그녀를 이해하기 어려워지지만 그녀를 인물이 아닌 사상적 흐름의 발전으로 바라보면 이해가 조금은 편해진다. 역사 속에서 기존 세계관을 뒤흔들고 무너트리는 가치 혹은 사상의 등장은 놀랍도록 폭력적이다. 그리고 곧 기존 세계의 일부를 받아들이고 그곳에서 다시 싹트고 새로운 사상적 변화를 이룬다.
뱅상은 알렉시아를 완성시켜주는 인물이다. 그는 알렉시아의 출산의 목격자이자 수난자이며 기독교 세계관의 현신이다. 뱅상이 알렉시아(아드리엥)에게 너를 건드리는 놈은 죽는다. 내가 널 건드리면 나도 죽는다.라는 말을 시작으로 뱅상은 대놓고 기독교 세계관의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그려진다. 스테로이드를 주사하는 장면에서 세 개의 거울에 뱅상이 비치는 등, 자신과 알렉시아(아드리엥)를 신과 예수로 비유하는 등. 남성들이 득시글 거리는 곳에서 유일신으로 군림하는 그는 판테온이 수두룩한 로마를 지배하는 카톨릭과 같다. 알렉시아는 계속해서 뱅상을 벗어나려 하지만 뱅상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그녀는 더 견고한 세계관에 봉착한 것이다. 뱅상은 다른 세계들처럼 비녀로 죽일 수도 없고 오히려 제대로 덤비라고 조롱한다. 그녀는 뱅상이 지배하는 남성 세계에 남성인 척 자신을 지워내고 살아가려고 하지만 임신은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즉, 그녀의 기계적인 여성성은 절대 사라지지 않고 따라온다. 뱅상을 제외한 그곳의 남성들은 사실 그녀가 여성인 것을 알고 있는 듯 한 눈치인데 뱅상만큼은 그녀에 대해 모르는 척하는 것만 같다. 뱅상은 정말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다. 사실 애초에 그의 세계에 남성만이 존재해야 하는 규칙 같은 건 없는 듯하다. 그녀가 딸이던 아들이던 상관없다는 투다.
뱅상의 입장에서 알렉시아는 영화 속에서 표현된 대로는 불 속에서 타들어가는 아이이고 성경에선 돌아온 탕자이다. 하지만 뱅상은 죽은 자식의 불알을 만지는 사람이다. 그는 도움이 필요하고 돌봄이 필요하다. 유전적 자식은 실종됐고 자신의 세계를 견고히 하기 위해 약물에 의존하는 늙은 뱅상은 보수 가치관, 불 속의 인간 알렉시아는 진보 가치관이 어디에 서있는가를 생각하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후반부 알렉시아가 소방차 위에서 춤을 추고 성관계를 맺는 장면, 뱅상이 불을 붙여 자살을 기도하는 장면들은 두 세계의 관성을 예견하는 것만 같아 보인다. 결국 두 세계는 버림받을 것이며 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거기서 끝이 나지 않는다. 알렉시아는 뱅상의 도움으로 아이를 출산하고 사망한다. 알렉시아는 예수이자 마리아로 뱅상은 신인류를 품에 안고 자신의 쓸모를 읊조리며 눈물을 흘리는 하나님이자 마리아가 된다.
알렉시아 뱅상 모두 비유적으로 남성이자 여성, 여성이자 남성이 되는 듯한 엔딩은 흥미롭다. 뱅상과 알렉시아는 서로에게 부재하기만 하는 반대 성별이 되어주고 완성시켜 준다. 그리고 곧 태어난 아이에게 인간의 성별은 별로 중요치 않아 보인다. 두 개의 성별을 모두 가졌는지 아니면 세 개의 성별(남성, 여성, 기계성)까지 가졌는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신인류의 탄생만큼은 거짓증언할 수 없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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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엔딩을 통해 기존 세계관의 전통적인 가족관, 사랑관을 무너트리면서도 동시에 그것들이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야 하는가,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개인에게 종의 생존 자체를 미루는 문명 세계가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감독은 스스로의 영화를 '괴물'이라고 표현했지만 나는 그의 상상력은 인류라는 종 전체가 변화해가는 흐름의 한 물결 중에 하나로 불과하다 생각했다. 인류의 가족과 사랑에 대한 가치관의 인식 변화는 생각보다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 국가와 문명은 보수적일 수밖에 없고 개인들은 더욱 빨리 진보한다. 결국 과학 기술의 발달이 우리를 구원해줄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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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탄은 마치 108분짜리 헤비메탈 오케스트라 같다. 그 과격한 이미지 사용과 모호한 정체성과 금기에 대한 도전은 보는 이의 동공을 쿡쿡 찌르는 것만 같다. 호불호가 심하게 갈릴 수 있겠지만 이런 영화도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평가를 나누는 것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각자의 자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