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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온 Oct 31. 2024

아침에 일어나 너는 무엇을 할 것인가?

2024-2 문학과 창의적 글쓰기

1. “아침에 일어나면 이불부터 개라.”


 나의 아버지라면, 아침에 일어나시더라도 반드시 오전 6시 5분 전에 침대에서 일어나 이불을 반듯하게 개어 침대 위에 정갈하게 놓으실 것이다. 오래 산 거북이처럼 딱딱하게 굽은 그의 등은 천천히 펴질 준비를 시작한다. 굽은 등보다 더 굽은 목과 그보다 더 앞선 발걸음으로 더벅더벅 현관문을 향하시는 그에게는 문 앞에 신문이 왔다거나 우유나 계란 배달이 와 있으면 그것을 집 안으로 들여놓는 것이 우선 할 일이고, 어젯밤에 버리지 못한 쓰레기봉투를 처리하는 것이 다음 할 일이다. 이 일을 마치시면 바로 집 앞의 헬스장으로 발을 옮기신다. 지은 지 이제는 십여 년이 된 아파트 헬스장이지만, 지어질 당시에는 천안에 이보다 좋은 아파트 헬스장은 없었고, 아버지는 그 덕을 십여 년간 톡톡히 보고 계신다. 그전에는 시내의 헬스장에 가기 위해 20분씩은 차로 가야 했었다. 집 앞의 헬스장에는, 유달리 마음에 드는 이유라고 예상하건대, 연식이 있어 보이는 러닝머신이지만 티비가 달려서 아침마당이나 뉴스를 챙겨보시며 러닝을 30분을 하더라도 심심하지 않을 것이다. 흥건히 흘린 땀과 함께 아침잠은 날아가 버릴 것이다. 아버지는 30대 때부터 30년을 넘는 시간 동안 매일 이렇게 보내셨다고 말씀하신다. 어릴 적부터 쉬는 날이든, 명절이든, 휴가든 예외 없이 아침에 일어나시는 아버지는 나에게 중요한 이정표가 되어주셨다. 그렇게 나에게도 텁텁하게 짜증을 부리는 듯한 부산 사나이 (나에게는 부산 사나이가 상남자의 이미지보다도, 짜증을 부리는 츤데레의 이미지가 강하다.) 특유의 목소리로 말씀하신다.

    

2. “사과라도 깎아줄까?”


 어머니는 삼남매를 키우시면서 막내인 내가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평일 아침마다 아침밥을 항상 준비하셨다. 일종의 의무이자 책임감처럼, 지금 생각해 보면 어쩌다 하루 이틀은 알아서 챙겨 먹으라고 하실 수도 있음에도, 아무리 힘든 날이라도 과일을 깎아주셨다. 아침밥을 못 해주시는 날이 있으면 미안함을 담은 말과 함께, 다음 날에는 더 좋은 음식이나 반찬을 몇 개라도 더 챙겨주셨다. 하지만 그럼에도 막내는 아침에 시리얼이 아니면 잘 먹고 싶지도 않았고, 시간도 아깝다 생각하며 등굣길에 오르곤 했다. 아침밥을 잘 먹지 않는 막내를 위해 제일 좋아하는 삼겹살을 아침에 구워주셨고, 그런 날을 제외하면 막내는 아침을 종종 거르곤 했다.

 어머니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셨다고 한다. 쌀 만 석을 거둘 땅을 가지고 있다는 ‘만석꾼’으로 불리시던 할아버지. 큰 전원주택에 넓은 마당과 개, 집사와 도우미, 운전사까지 있었다던 어머니의 어린 시절 삶을 들으면, 나는 동떨어진 옛날 동화를 듣는 것만 같다. 이 동화를 들려주시면서 어머니는 항상 마트에 가서 음식 재료는 가격표를 보지 않고, 좋은 것만 산다고 말씀해 주신다. “음식은 항상 건강하고 맛있는 재료로 해야 해. 엄마가 곱게 자라서 그래.” 그래서 그런지 독립을 하고 나니, 엄마보다도 내가 야챗값이나 과일값을 걱정하는 일이 잦아졌다. 시간이 지나, 그것이 엄마가 비싼 가격을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삼남매의 입안에 들어가는 것에는 좋은 것 외에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로 집에 있을 때, 엄마가 해주는 아침밥은 과일이라도 막내는 천천히 오래오래 씹어 먹는다.


 혼자 살게 되면서 내가 무언가를 시작할 때, 이를테면 사소한 집 안 청소나 간단한 작업에서부터 중요한 약속에 나가는 일까지, 나는 시작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방 안의 침대보를 깔끔하게 펴고 이불을 개어놓는다. 그리고 부엌을 정리하고, 간단히 과일이 든 커피든 입안에 무언가를 집어넣으려고 한다. 그러면 정리된 방과 적당한 포만감으로 아침을 맞이하게 된다. 이는 내가 갖는 올바른 마음가짐이자 행동이며, 필연적으로 해야 하는, 또 다음 날 아침에도 반복해야 하는 불가피한 습관으로 자리 잡았다.



3. 사계절


 막내는 스무 살에 입시에 실패하고, 부모를 어떤 방식으로든 설득하기가 어려울 거로 생각해 집을 나와버렸다. 당시에는 출가[出家]라고 생각했던 가출[家出]이었다. 어릴 적부터 명절 때 모아두었던 용돈만을 들고나갔고, 급하게 잘 곳을 알아보고 생활용품들을 사야 했다. 친구 자취방 바닥에서 쪽잠을 자면서도, 내가 제일 먼저 알아본 것은 매트리스 위에 올릴 이불과 베개였다. 그렇게 얼마 동안 집에 나와 있을지 모르면서 없는 돈에 십만 원의 사계절용 이불과 베개를 구매했다. 회색에 무게감 있는 솜과 푹신하지도 딱딱하지도 않은 촉감을 가진 것은 한 달 동안은 새 이불 냄새가 쉽게 빠지지 않았다. 새로운 촉감과 향에 익숙하지 않은 잠자리를 보내야 했음에도, 나는 집을 나와 고생만 하다 돌아오는 하루 끝에 그 침대에 몸을 맡기면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사계절용 이불을 사계절 간 다 써볼 즈음 본가에 돌아가게 되었다.

 집에서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가 매년 사계절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맞춰 침구를 일일이 바꿔주셨었고, 본가에 돌아가서 결국 다시 그 침구류들과 함께하게 되었다. 봄과 가을에는 넓고 푹신해서 온몸에 덮기 좋은 이불, 여름에는 얇고 약간은 꺼끌꺼끌한 이불과 베개, 겨울에는 극세사로 무엇보다도 부드럽고 따뜻한 이불이었다. 아버지는 그 극세사 이불에 둘러싸여 누워있는 막둥이인 나를 장난으로 괴롭히곤 하셨다. 아주 어릴 때의 일이다. 주말에 안방 큰 침대에 누워있는 막내의 볼따귀에, 아버지는 까끌까끌한 수염을 비벼대곤 하셨다. 부드러운 극세사 이불의 촉감과 까끌까끌한 아버지의 수염은 나에게는 같은 감촉으로 기억된다.



4. 잠재태


 20대 초반의 나는 하루하루를 즐거우면서도 의미 있게 보내야 했고, 밀도가 높은 인간관계나 영감이 주변에 넘쳐났다. 그런 나에게 홍대에서 친구들과 지낸 셰어하우스는 제2의 고향이자, 어디를 둘러봐도 에너지를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나는 친구들과 미라클 모닝을 함께하고, 아침 운동과 아침밥을 함께하며 그들과 에너지를 공유했다. 젊은 날을 함께 보내는 열정적인 친구들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하루하루 힘이 되었다. 당시의 나는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하루를 무수한 가능성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현재 나의 대부분의 정체성이 그 시기에 결정된 듯하다. 열정이라던가, 자유로움이라던가, 남이 하지 않은 일을 해서 성공해야겠다는 생각까지도.

 그 셰어하우스의 침실에는 이층침대의 1층 자리에 내 안식처가 있었다. 작은 침대에서 눕거나 일어날 때마다 머리에 맞닿는 구조물이 불편할 법도 했지만, 나는 그 구조물이 감싸주는 위요감과 셰어하우스의 부대끼는 공간 속에서도 나만의 공간을 갖는 것이 좋았다. 거기에 앉아 작업할 때가 제일 편안하고 좋았다. 한껏 열정을 불태운 내가 잠시나마 차분히 굽어 들어앉아 쉬어갈 수 있는 공간. 매일 그 작은 공간에서 나는 잠재태로서 존재했다.



5. 현실태


 서울의 내 방에는 내가 당근마켓에서 구한 비싸 보이는 침대가 있다. 그 침대에 누워 포근하게 개어둔 이불 위에 눕고, 이불을 조금씩 흩트리는 것만으로도 묘한 쾌감을 느낀다. 가끔은 이불을 그대로 개어둔 채 발만 넣어 발부터 몸을 데우고, 그 온기를 몸 위로 옮기며 잠에 빠져들 때도 있다. 낮잠을 잘 때, 자고 싶은 마음과 일어나면 다시 이불을 개야 한다는 마음이 겹쳐 그렇게 하곤 한다. 소파에서 잘 때는 잠시 낮잠을 자거나, 꼭 일어나야 하는 순간, 혹은 왠지 모를 여유를 느낄 때이다. 바닥에 베개 하나만 두고 누워 잔다는 것은 얼른 일어나야 하는 경우다. 잠을 잔다는 것은 나에게 그저 하루를 보내는 것보다도 더 많은 의미를 지닌다.

 자고 일어난 나는 어제의 죽은 나와는 조금은 달라져 있기를 바란다. 잠을 자고 일어난 근래의 나는 현실과 사회를 마주한 듯하다. 한 청년이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로 나아가는 과정은 점점 정해진 상태를 마주하는 것 같다. 내가 누군지를 알아가고, 사람이 무엇인지, 사회가 무엇인지 알아가는 과정이다. 이제는 잠재태보다도 현실태를 마주한다.


 “너 뭐 될래?”라고 누군가 물어본다면     


 나는 나의 꿈이 무엇인지 되묻고,

 앞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되묻고,

 내일 나의 하루를 어떻게 보내고 싶은지 되묻고,

 내일 아침에 어떤 마음가짐으로 일어나고 싶은지 되묻고,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무엇을 할 것인지를 물어볼 것이다.


 그럼 나는 일어나서 아버지가 말해주신 대로 이불을 개고, 어머니가 해주신 것처럼 피곤하더라도 맛있는 아침밥을 차려 먹고, 책을 읽든 운동을 하든 글을 쓰든 하루를 시작하는 새로운 내가 되어, 어제의 나를 접어두고 무수한 잠재적인 실덩어리로서 하루를 맞이할 것이다.



6. 아침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손등으로 코를 슥 닦으며 이불을 고이 접는다. 뒤늦게 기온이 떨어진 날씨와 함께 무겁게 움직이는 머리를 깨우며, 햇빛은 두 시간쯤 전부터 나를 깨우다 지쳐 더 이상 나를 비추지 않는다. 지금은 벽돌에 반사된 은은한 빛만이 커튼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방안을 조용히 채운다. 척추를 쭉 펴고 천장을 바라보며 일어나니, 왼쪽 코가 흘러 입술 위가 촉촉해진다. 금세 차가워진 액체의 온도가 느껴진다. 그래, 온도. 나는 이 온도와 서늘한 바람을 기억한다. 부엌 의자에 걸려 있는 조끼를 꺼내 입고 집 밖으로 나간다. 현관문을 여는 순간, 멈춰 있던 바람들이 나를 맞이한다. 나는 여름 이후로 멈춰 있던 가을의 기억을 마주한다. 넘쳐흐르는 이 온도를 기억한다.


 나는 창조성을 지닌 바람이고, 날아다니는 풍족한 근육이다. 나는 왕이자 묵직한 군화이며 금덩어리이고, 화분에 뿌려지는 촉촉한 물방울이다. 나는 분사되는 꿈에, 지금의 현실에 머물지 않는 찢어진 전광판이다.



본 글은 홍익대학교 서울캠퍼스 2024-2학기 문학과 창의적 글쓰기라는 교양수업에서 과제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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