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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lash Jul 02. 2022

한 장의 자료를 위해 하루를 바친 날

미생 일기

상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늘 예상하지 못하는 불량은 생긴다. 


그리고 그 원인을 분석하고 대응 방안을 찾고 대응 방안이 불충분하다면 상품을 부분적으로 재설계하는 것이 나의 일이자 엔지니어의 역할이다. 


사실 연차가 별로 없는 사람에게는 위와 같은 불량에 대해 분석을 시키는 일은 드물다. 하지만 지금 내가 속한 조직의 상황은 사람이 너무나도 부족하기 때문에 나도 현재 생긴 불량을 분석하는 일에 투입이 되었다. 내가 이번에 맡은 일은 과거에 출시되었던 상품과 이번에 만든 상품에서의 차이점을 찾아서 비교하여 문제점을 시각화하는 일이었다. 난 기존의 상품이 어떤 특징을 갖는지, 현재 만들고 있는 상품이 어떤 특징이 있는지도 모두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래도 일을 맡게 되었으니 최선을 다해 비교하고 시각화하여 자료를 만들었다. 리더는 이틀이면 다 할 거라고 말하였고 위 자료는 높은 임원들에게 보고되어야 하니 깔끔하게 정리해달라고 하셨다. 개인적으로 2일은 너무 부족했다. 주말까지 출근하여 3일 동안 분석하고 만들었다. 깔끔하게 각 상품들을 비교하여 마음 편하게 주말에 퇴근하며 혼나지는 않겠거니 생각했다.



월요일 아침 리더에게 정리한 자료를 보여드리자 많이 혼이 났다.


"이걸 보고 어쩌라는 거야?"

"말하고 싶은 게 뭔데?" 

"PPT 이렇게 많이 만들지 말고 한 페이지에 넣어서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를 적어야 하는 거 아니야?" 

"이거 맞아? 여기에 이거 넣고 저기에 이거 넣고 이렇게 다시 만들어와"

"나는 이게 궁금한데 왜 그건 없어?"


나는 짧은 시간 내에 처음 접한 일로 위 일들을 비교하고 정리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리고 그 부분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게 나의 일이라 생각하였고 내가 결론을 내기에 성급하다 생각하였다. 또한 비교한 자료가 너무 많아서 이것들을 한 페이지에 넣기에는 자료가 어지럽고 지저분해질 것이라 생각하여 페이지를 나누어 깔끔하게 만들었다. 너무 디테일한 것을 비교하면 "이런 부분까지는 필요 없다.", 너무 큰 흐름으로만 넣으면 "디테일이 부족하다"라는 말을 들었다. "이렇게 저렇게 만들라고 하실 거면 내 자료를 복사하여 만드시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생각도 했다. 어차피 리더가 원하는 스타일이 있으니 내가 뭘 만들어도 만족이 안될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4번 검토를 받았고 모두 다시 해오라고 혼이 났다. 속으로 하루 종일 욕도 했다. 그리고 나의 리더는 8시에 퇴근을 했다. 도대체 이제 뭘 해야 하지 머리를 감싸며 짜증이 나서 자리에서 한숨을 많이 내쉬었다. 그러자 내 지도선배가 나에게 다가와 조언을 해주셨다.


"비교한 부분에 대하여 과감하게 너의 의견을 써봐, 그리고 혼난다 생각하지 말고 배우고 있다고 생각해. 원래 이때는 많이 혼나는 거지. 처음부터 완벽할 순 없어" 


시각화하는 부분까지가 나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시각화를 하면서 내가 본 것들에 대한 결론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많이 혼나고 나니 이제 될 대로 되라라는 심정으로 비교한 것을 바탕으로 현재 상품의 문제, 그리고 대응방안이 어려울 것 같으니 재설계가 필요한 이유, 나의 생각을 깔끔하게 한 장에 모두 표현하였다. 건방지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과감하게 썼다. 하지만 이제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기 때문에 밤 10시까지 작성을 마무리하고 퇴근하였다. 그렇게 나는 주말까지 분석하고 만든 자료를 어떻게 표현할지 가공하는데 하루를 온전히 썼다.




다음날 아침, 리더가 오자마자 나는 리더에게 다했으니 검토해달라고 했다. 무섭지도 않았다. 어차피 또 혼날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빨리 혼나자는 마음에 출근하시자마자 말씀드렸다."잠깐 자리로와"라는 말과 함께 의외의 대답을 듣게 되었다. 


"정리 깔끔하게 잘했고 결론도 좋다. 이 부분 내가 수정할 필요 없으니까 네가 직접 임원들한테 보내봐"

"그리고 너 몇년차더라, 연차 치고는 굉장히 잘하네. 수고했어" 


기대도 하지 않았던 칭찬에 놀랐고 내가 정말 높은 임원에게 직접 메일을 쓴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렇게 되고 보니, 나의  리더는 내가 싫어서도 아니었고 그 자료 자체가 마음에 안 들어서도 아니었다. 그저 윗사람의 시선에서 내가 부족한 부분을 알려준 것이었고 그 수정을 반복하며 버틴 나에게 기회를 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윗사람을 위해 단순히 자료를 만드는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나의 의견을 피력할 기회를 준 리더에게 감사했다. 그리고 조언을 해주시고 믿어주신 나의 지도선배에게도 너무나 감사했다. 



이번 기회에 배운 점은 여러 가지가 있다. 

다른 상품들과 비교하면서 원리도 알게 되었고 윗사람에게 보고하기 위해 자료를 표현하는 법도 배웠다. 

그리고 '자료를 정리하라'라는 의미는 '정리하라'가 아니라 그 정리를 통해서 내가 생각한 문제점이나 장단점과 솔루션등까지 모두 포함해보라는 의미까지 배울 수 있었다. 이 부분이 늘 말하는 '윗사람처럼 생각하기'와 '하나를 시켜도 둘, 셋을 하는 사람'이 갖추는 자세라는 것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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