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낭독일기8> 인생에도 ‘잠깐 멈춤’의 순간들이 있지
여느 때처럼 이번 추석 명절에도 시댁에 갔었다. 나는 사실 편한 며느리라 명절이라고 특별히 부엌 스트레스가 있는 편은 아니다. 양가에서 차려주시는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하하 호호 담소를 나누다 오는 게 전부다. 그런데 요즘 들어 내가 예전과 달라졌다고 느끼는 부분이 있다. 바로 내 부모님과 남편의 부모님, 이젠 명확한 노년의 시기에 접어든 그 어른들의 변화다.
아이가 커 감에 따라 대화의 주제가 많이 바뀌는데 이번 화제는 mbti였다. 혈액형별 성격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mbti로 번진 것이었는데 시부모님께서 당신들의 mbti를 궁금해하셨다. 문득 두 분의 mbti가 궁금해진 우리는 흥미를 더하기 위해 상금을 걸고 '할머니 할아버지의 mbti 맞추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성격의 변화가 없는 시아버지의 mbti는 모두 같은 유형 예측했는데 시어머니가 예측 불가였다. 남편이 느끼는 어머니의 성격과 아이들이 느끼는 할머니의 성격, 그리고 내가 느끼는 시어머니의 성격이 모두 달랐다. 관계가 다르니 당연히 그럴 수 있겠지만, 내가 조금 놀랐던 건 어머니의 변화였다. 어? 어머니가 언제 이렇게 변하셨지?
내가 결혼했을 때 50을 갓 넘긴 나이셨던 시어머니는 이제 70이 넘으셨고 그때와 성격이 조금 달라지셨다. 워낙에도 밝고 명랑한 성격이셨지만 감정을 밖으로 잘 드러내지 않으셨던 기억이 있는데 요즘엔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는 감정을 드러내는 데 거침이 없으시다. 나이 든 분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예전보다 좀 더 서운해하실 때도 있고 말이다.
인간의 전전두엽은 감정조절과 충동 억제, 주의력과 자기 통제 등의 고차원적인 인지 및 행동을 조절하는 뇌 부위다. 반면 변연계는 뇌에서 기쁨이나 슬픔 분노 두려움 등의 본능적인 정서를 관장하는 부위이다. 그런데 전전두엽은 그 성장과 발달이 25세까지 천천히 이루어지며 나이가 들수록 그 기능이 저하되는 반면 변연계는 노화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감정을 조절하는 전전두엽의 기능은 나이를 들어갈수록 저하되는 반면 분노나 기쁨을 느끼는 1차적인 감정표현을 관장하는 변연계는 늙지 않는다는 말이다. 누군가는 나이 들수록 치매보다 분노나 화를 표출하는 변연계의 늙지 않음이 더욱 두렵다는 말을 했었는데 그 말에 많은 공감이 되었다. 그러니까 시어머니도 노화하지 않는 변연계의 영향을 받고 계신 거였다.
그럼 노화가 없다는 변연계는 컨트롤할 수 있는 방법이 정말 없을까? 고민하던 차에 어떤 영상을 하나 보게 되었다. 알고리즘을 따라 재생되는 영상이었는데 이름하여 '우아하게 나이 들기'였다. 우아하게 나이 드는 방법이라? 호기심이 일었다. 그런데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다름 아닌 말을 느리게 하는 것. 나이가 들수록 마음은 급해지고 말은 빨라지는 것을 경계하라고.
그러니까 1차적인 감정을 표출하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 템포를 늦추어 말을 천천히 하는 것만으로도 우아하게 나이들기, 즉 변연계의 적극적인 활동성을 잠재울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였다.
그러고 보니 내가 하는 낭독에서도 이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낭독에서는 '포즈(pause) 활용 훈련법'이라는 게 있는데 문장의 의미를 생각하며, 쉬어가며 읽는 방법이다. 포즈활용을 잘하면 낭독이 참 고급스러워진다.
낭독 초급반 수업 때부터 성우선생님이 가장 강조했던 것 중의 하나가 '침묵훈련'이었다. 낭독에서의 침묵은 마침표와 쉼표, 말줄임표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대화가 시작되기 전이나 장면이 바뀌는 곳, 혹은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만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읽는 글을 완전히 이해한 후, 그러니까 그 글을 씹어먹을(?) 수 있을 정도로 내 것으로 만든 후에, 침묵의 공간을 두고 싶은 곳에서 포즈를 두는 것을 말한다. 적당한 곳에서 포즈활용을 잘하면 청자에게로 향하는 전달력이 커진다. 글을 더욱 몰입감 있게 전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인생도 이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멈추는 순간. 특히 나이가 들수록 숨을 고르는 순간, 쉼과 침묵이 필요한 순간들 말이다. 그렇지만 어디 쉽겠는가. 안 그래도 점점 급해지는 성격이 고민인데.
그런데 쉬웠다면 연습이 필요 없었을 것이다. 중급반 낭독회를 준비하며 긴 글을 천천히 정성스레 읽는 연습을 참 많이 했다. 초급반 때와 달리 체력도 많이 필요했다. 하지만 연습을 거듭할수록 나도 모르게 차분해지고 텍스트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었다.
비록 아직 낭독을 연습할 때만 쉼과 침묵, 그리고 몰입을 경험했지만 언젠가는 일상에서도 멈춤과 침묵의 순간을 경험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가 된다.
글을 읽을 때도 말을 할 때도 의식적으로 한 템포 늦춰보고, 버릇없는 사춘기 아이에게도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멈추어보는 것. 아마 내가 이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면, 모르긴 몰라도 낭독은, 나이듦에 따라 폭주하는 나의 변연계를 달래는 무기가 되어줄 것이다.